이 책에서 내가 강조하는 바는 여러 가지 행동과학이 서로 어떻게 구분되느냐 하는 문제보다는 이들을 하나로 묶는 것이 무엇이냐 하는 것이다. 다양한 분야의 특정 문제는 그것이 일반적인 탐구 방법을 명백히 하는 데 도움이 될 경우에만 다루고 있다.
서로 매우 다르고, 때로는 상호 적대적인 행동과학의 학파들과 접근들에 관한 내 입장은 아마도 중립적인 것으로 간주될 수 있고, 따라서 의심의 여지없이, 양쪽 진영 모두로부터?한쪽에서는 단호하지 못하다는, 다른 쪽에서는 지나치게 깐깐하다는?비판을 받게 될 것이다. 그러나 나의 목적은 타협에 있지 않고, 이상은 중용에 있지 않다. 나에게는 외부로부터 강요된 요구가 아니라 우리 자신의 열망에 내재된 요구를 따르는 것이 중요하다.(5쪽)
행동과학자들을 위한 방법론적 지향을 다룬 이 책은 행동과학자들에게, 그리고 열성이 넘치는 이들에게, 그들이 정통파든 이단이든 상관없이, 아마도 이단에게 더 유용할 것으로 판단되지만, 필수불가결한 것이다. 이 책의 유용성은 오래 지속될 것이며, 이 책은 넓은 층의 독자들이 각자 자기 분야의 장점과 약점을 발견하는 데 유용하게 쓰일 것이다. 이 책이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가 인문학과 행동과학 사이에 하나의 학문공동체가 있으며 이 중 한쪽의 타당성이 다른 쪽으로부터의 격리에 의존하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한다.(8쪽)
가로등까지 상당히 떨어진 곳에서 열쇠를 떨어뜨린 어떤 취객이 가로등 아래에서 열쇠를 찾는 얘기를 소개하겠다. 왜 떨어뜨린 곳에서 열쇠를 찾지 않느냐는 질문을 받았을 때 그 취객은, “여기가 더 밝아서요!”라고 대답했다. 행동과학의 논리에서 뿐 아니라 행동과학 그 자체에서도, 많은 노력이 이 취객의 찾기 원리 때문에 낭비되었다……취객의 열쇠 찾기가 여기에 예로서 적합하다. 우리가 느끼는 바로는, 찾기 유형은 찾으려는 것이 찾는 이가 들여다보고 있는 그 장소에 있을 확률과 매우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음에 틀림없다. 그러나 이 농담이 우리의 얘기일 수도 있다. 단지 ‘그곳이 밝기’ 때문에 가망이 별로 없는 장소에서 먼저 찾아보는 것은 현명한 일일 수 있다. 우리는, 만약 그것이 거짓이라면 기각하기가 쉽기 때문에, 또는 그것 덕분에 더 많은 수의 선택 가능성이 제거될 것이기 때문에, 아니면 그것이 다음에 어떤 단계를 택해야 하는지를 명확하게 보여줄 것이기 때문에, 다른 것이 아닌 특정 가설을 제시해볼 수도 있다.(24쪽, 32쪽)
결과적으로 우리는 역설에 말리게 된다. 그것은 개념화의 역설로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좋은 이론을 형성하기 위해서는 적합한 개념이 요구된다. 그러나 적합한 개념에 도달하기 위해서 우리는 좋은 이론을 필요로 한다. 20세기의 과학혁명이 있기 오래전에, 윌리엄 제번스는 “주어진 과학의 초기 단계에서 제안된 분류는 거의 모두가 더 심층적인 대상의 유사성이 발견되는 데 따라 세분화되는 것을 알 수 있다”라고 말했다. 분류는 모두가 임시적이며 잠재적인 이론(또는 이론들의 가족)이다. 특정 주제에 대한 지식이 자람에 따라 그 주제에 대한 우리의 관념화도 바뀐다. (80쪽)
반론은 두 방향에서 왔다. 첫째는, 인간은 자유롭기 때문에 인간 행동을 예측할 수 없다는 친숙한 교리로 표현된다. 그 신비의 가면을 벗기면, 내가 믿기로는, 이 교리는 두 가지 잘못된 가정에 근거하고 있다. 자유로운 선택은 원인에 의해 발생하지 않는다는 것과, 예측은 오직 인과연관에 관한 지식을 기초로 해서만 행할 수 있다는 것이 그것이다. 형이상학적 자유는, 만약 그러한 것이 있다면, 행동과학자들에게는 관심거리가 아니다. 왜냐하면 정의상 이는 그 주제의 가장 깊은 곳에 있는 본질이 아니라 경계를 표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다른 가정은 우리가 작동하는 원인에 관한 어떤 지식도 갖기 훨씬 전에 성공적이었던 인간이 만든 가장 초기의, 그리고 가장 성공적인 몇 가지─그 수는 천문학적인데─예측을 가지고 반증할 수 있다(우리는 틀림없이 지금도 그러한 지식을 가지고 있을 것이 아닌가!). 인간 행동에 어떤 무작위적 요소가─우리가 ‘자발성’과 같은 말로 부르는 어떤 것이─있는 것 같다는 말은 맞다. 그러나 거기에도 마찬가지로, 인성 및 성격을 구성하는 것과 같은, 그리고 습관, 제도, 관습, 원규 및 여러 가지 행동의 규칙성으로 표현되는 것과 같은, 어떤 안정적 유형이 있다. 이 무작위적 요소조차도 바로 통계적 기법에 의한 예측의 대상이 된다.(350~351쪽)
우선 이러한 모델은 과학자로 하여금 바로 그의 마음에 있는 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명백하게 드러내도록 한다. 과학은 협동적 사업이다. 모든 과학자는 자신의 발견물에 대한 비판이나 확인에서 자신의 동료들에게 깊이 의존한다. 더욱이 과학은 누적적 사업이다. 과학자는 다른 사람들이 이미 이룩한 것 위에 건설하고, 또다시 더 건축될 것을 위한 기초를 제공한다. 이 모든 상호의존성은 과학자들이 가능한 한 의미의 불명확성을 줄이고 서로를 이해할 것을 요구한다. 과학적 관념의 소통은 단순히 과학사회학의 문제가 아니라 과학의 논리에 내재하는 것이다. 예술에서와 같이 과학적 관념은 표현을 찾을 때까지는 아무것도 아니다.(368쪽)
나는 사상과 표현의 자유, 바로 이것이 과학에서 엄청난 중요성을 가지며, 오직 이것으로만 편향을 무효화하기를 소망할 수 있다고 믿는다. 과학에서 권력구조는, 그것이 아무리 비공식적이라도 어떤 억제와 균형의 체계에 종속되어 있어 어떤 학술지나 학회에서 거부되는 것이 다른 데서 채택될 수 있기만 하다면, 과학 공동체의 일반 복지에 봉사할 것으로 기대할 수 있다. 아마도 더 중요한 것은 데릭 프라이스가 우리 시대의 ‘보이지 않는 대학’이라고 부른, 고도로 유동적인 과학자들 사이의 개인적인 관념의 교류에 의해 구성되는 그 어떤 것임이 분명하다. 시장에서 관념의 자유로운 경쟁이 필수적으로 참을 희생시킨다는 것은 이와 같은 과정이 모든 사회적 선의 근원이라는 더 일반적인 믿음과 같이 신화일 수 있다. 자유와 통제 사이의 갈등은, 사회에서는 일반적으로 어떠하든 과학에서는 실존적 딜레마다. 어찌되었든 아직도 과학에서는, 내가 보기에는 이성은 항상 자유를, 우리가 그렇게 명백하게 잘못된 것으로 보도록 가르침을 받은 그러한 사상에 대해서도 자유를 밀어붙일 것을 요구한다.(507~50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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