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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18년 09월 30일
쪽수, 무게, 크기 320쪽 | 150*222*29mm
ISBN13 9788993703481
ISBN10 8993703485

목차 목차 보이기/감추기

저자 소개 (1명)

책 속으로 책속으로 보이기/감추기

우린 시간 속에 존재한다. 시간(時間)은 문자 그대로 어디에서 어디까지를 이르는 말이다. 시간은 되돌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렇기에 그 속에서 살아온 인간의 삶 또한 되돌릴 수가 없다. 이것이 바로 삶이 소중한 이유이기도 하다. 이러한 삶 속에서 탄생하는 것이 수필이라는 글이다. 희로애락이라는 삶의 여정을 거치면서 평범하나마 나도 여기까지 살아왔다. 보고 느끼고 때로는 깊은 생각도 해보면서…….

나무보다 아름답고 진실한 글을 쓰고 싶었다. 백지보다 깨끗하고 순결한 글을 쓰고 싶었다. 종이가 된 죽은 나무 이상의 글. 그것이 책으로서의 가치라 생각했었다. 그러지 않아도 너저분한 세상, 전보다도 못한 글로 더 오염시키지는 말아야지 결심했었다. 그런 생각을 하다 보니 두 번째 수필집을 낸 지 10년을 넘어서게 되었다.

또한 격조가 있고 침묵이 있으며 울림과 감동이 있는 글을 쓰고 싶었다. 그런 까닭에 오랜 기간 수필을 써 왔지만 과작(寡作)이다. 이것은 나의 능력 탓이기도 하지만, 수필이라는 글의 속성상의 한계이기도 하다. 삶의 이력을 필요로 하는 글이, 정신적 깊이와 품격이 느껴지는 글이, 어찌 뚝딱 뚝딱 써질 수가 있으랴!

정리를 해놓고 보니, 한 시골 소년이 60 평생을 걸어온 부끄러운 내 이력의 일기장이 되어 버렸다. 퇴고를 하는 과정에서 신작이라도 버릴 것은 버리고, 옛 글이라도 이월가치(Over Value)가 있다고 생각되는 것은 다듬어서 다시 실었다. 그렇게 하다 보니 자연 수필선집의 성격을 띠게 되었다. 기간도 30년이나 되기에 발표년도를 표기해 두었다. 어떻게 보면 한 권의 수필로 정리된 이제까지의 내 삶이요, 인생 철학서라는 느낌이 든다.

돌아보니 내가 써온 글이 나를 가르쳤고, 이런 정도의 나를 만들어 왔다는 생각이 든다. 나 또한 가끔씩 이 책을 다시 꺼내 읽으며, 천천히 지나간 내 삶을 추억해 보리라. 혹 같이 읽어줄 독자들이 있다면, 그는 내 호젓한 산책로의 길벗이 될 것이다.

2018년 8월
樂書齋에서 윤병화
---「책머리에」중에서

새소리에 잠 깨어난 아침 시간이 나를 기쁘게 한다. 화단에 돋아나는 새싹, 촛불처럼 피어나는 튤립, 처마 밑에서 들려오는 제비들의 재잘거림, 나비처럼 피어난 하얀 목련, 그 사이를 오가며 짝짓기에 여념이 없는 새들의 자태. 그 꽃그늘 아래에서의 나의 발길이 내 마음을 그들 같은 기쁨으로 이끌어 간다. 구름처럼 피어 있는 벚꽃! 그 아래로 외투를 벗고 나온 좀 추울 것도 같은 늘씬한 다리의 처녀애들. 걸어가는 젊은 여인의 몸매, 대학 캠퍼스 너른 잔디밭에 앉아 있는 동료이거나 연인들의 모습이 내 마음을 즐겁게 한다.

프리지어 향기, 풀 속에 숨어 핀 앙증스런 제비꽃, 홀로 걷는 둑길에서 웃고 있는 민들레의 무리, 겨울을 감내하고 피어난 인동꽃의 내음, 패랭이꽃, 재잘대는 채송화의 웃음. 내가 웃음으로 느낄 때엔 내 마음부터가 벌써 즐거운 것이지만, 그 작은 미소들이 나를 또한 기쁘게 한다. 이슬비 내린 초봄! 거미줄에 매달린 물방울, 단풍나무 잔가지에 맺힌 수많은 물방울들이 보석처럼 빛날 때, 나는 그 순간적 장면을 사랑한다. 호수에서 피어오르는 물안개, 야영을 하며 듣는 계곡물 소리, 고산(高山)에서 보게 되는 저녁노을, 봉우리만 남기고 안개에 묻힌 산, 흰 눈에 뒤덮인 산야(山野), 이 모든 것들이 나의 삶을 더없이 신비롭게 한다.

신록의 계절 숲으로 난 오솔길을 천천히 걸어가게 될 때, 내 마음은 시작부터가 행복하다. 양산처럼 펼쳐 내린 나무, 오월의 투명한 햇살 속에 선명히 드러나는 잎맥. 아직 벌레들도 생기지 않은 숲 속 어디선가 휘파람새 소리가 들려오거나, 아주 먼 곳에서 물 흐르는 소리가 귓가로 젖어들게 될 때, 그리하여 고요히 발길 멈추고 ‘오! 내 사랑하는 계절이여, 또다시 돌아왔구나!’ 하고 홀로 외일 때, 나는 흔히 행복한 느낌 속에 머물러 있다.

불빛에 비친 벚꽃나무 길을 걷거나, 차를 타고 산벚나무꽃이 만발한 시골길을 달려가게 될 때, 나는 어느새 아무 걱정 없이 행복하다. 그런가 하면 꽃 핀 때죽나무 그늘에 앉아 보거나, 커다란 목백합나무가 만개한 꽃송이를 달고 바람에 일렁일 때, 나는 대체로 감동하게 된다. 그런 감동을 느끼며 사는 삶을 나는 또한 사랑한다.

달 밝은 저녁 여울을 흘러내리는 물소리, 싱그러운 봄 숲 속 가까이에서 들려오는 것 같은 뻐꾸기 소리, 사원(寺院) 가까운 숲 속에서 후투티의 낢을 다시 보게 될 때, 푸른 벌판 백학(白鶴)의 비행. 바닷가 여행지에서의 아침 잠결에 귓가로 젖어드는 파도 소리, 일몰 후 드넓은 해변에서 보름달의 떠오름을 다시 보게 될 때, 그 또한 나를 더없는 기쁨으로 몰고 간다. 이슬 머금은 장미꽃의 매혹! 저녁 햇살 속에 피어나는 분꽃, 향기 짙은 백합, 못 가득 피어있는 연꽃의 모습, 관심 저만치에 밀려 있다 나팔 불듯 피어난 선인장 꽃잎. 이 모든 것들을 나는 또한 사랑한다.

다시 보게 되는 고향 마을의 느티나무, 청보리밭의 비릿한 풀 내음, 찔레꽃 향기, 솔밭을 스쳐오는 바람, 늦가을 논둑길의 풀 타는 냄새, 빨갛게 타 들어가는 모닥불. 농가의 저녁연기, 아궁이에서 타닥타닥 불타는 소리, 누룽지 눋는 냄새, 고향집에 누운 밤 완숙에 지쳐 뒤란에서 ‘툭-’ 하고 들려오는 알밤 떨어지는 소리. 뭐 그런 사소한 것들이 나를 또한 기쁘게 한다. 암수 서로 정답게 모이를 쪼아 먹고 있는 토종닭의 무리, 짚으로 싸 묶은 달걀 꾸러미를 보거나, 뽀얗고 갸름한 달걀에 남아 있는 따뜻한 온기를 느껴 보게 될 때, 혹은 물 마시는 새들을 바라보게 될 때, 우연히 알이 담겨 있는 새둥지를 발견하게 될 때, 그것들은 또한 그처럼 다정스런 느낌들을 가지게 한다.

뜻하지 않게 만난 옛 친구, 먼 타처(他處)에서 고향 사람을 만나 보게 될 때, 그리하여 고향 사투리를 다시 듣게 될 때, 어린 딸내미가 친구들과 놀며 서로 지어내는 작은 미소들. 진열대 위에서 매일 웃고 있는 목각 인형 ─ 그것은 러시아의 어느 장인이 만든 일곱 인형, 그 자잘한 미소가 나를 또한 즐겁게 한다. 그런가 하면 맛있게 먹거나 즐겁게 노는 내 아이들의 모습을 바라보게 될 때, 아내의 웃음 띤 얼굴, 이 모든 것들이 나를 또한 행복하게 한다.

비단결이나 벨벳의 감촉! 옥상에 빨아 넌 새하얀 옷가지들. 몸이 약간 불편하여 홀로 잠시 누워 있게 될 때, 그리하여 명상의 자유를 마음껏 누려 보게 될 때, 아니면 놀이터에서 들려오는 아이들의 웃음소리, 복도 층계에서 반갑게 나누는 인사하는 소리가 나를 또한 즐겁게 한다. 강을 따라 펼쳐진 누런 갈대밭, 떼 지어 나는 겨울 철새들, 홀로 걷는 길가에 늘어서 있는 플라타너스, 가을 누런 벌판으로 날아내리는 참새 떼, 소국(小菊)의 무리, 바람에 흔들리는 코스모스, 노을 진 저녁 강가 그 잔잔한 물결 위로 뛰어오르는 물고기들을 다시 보게 될 때, 나는 그저 보는 그것만으로도 행복하다.

숲 속으로 난 오솔길을 만났을 때, 푸른 들판을 뚫고 유유히 흘러가는 강물, 달빛 속의 달맞이꽃, 맑은 물속에서 몰려다니는 피라미 떼, 여름 먼 길에서의 맑은 우물물, 비 온 뒤의 뭉게구름, 밤하늘의 초록 별빛, 안개 걷히는 호수, 새벽 낮달, 단풍으로 붉게 물든 산! 보도(步道)를 뒤덮는 노란 은행잎, 마른 잔디이거나 쌓인 낙엽에 누워 푸른 하늘 우러를 때, 가로등불 밑으로 나뭇잎이 지거나 눈송이가 날릴 때, 내 마음은 또한 기쁨으로 가득 차 있다.

크리스마스 무렵 가로수에 설치한 꼬마전구의 휘황한 불빛, 감동 깊은 영화의 한 장면, 불꽃놀이의 밤! 그런가 하면 푸른 잔디밭에서 골프하는 모습, 짝을 이뤄 타는 피겨 스케이팅의 조화로움, 체조 경기에서 완벽한 성공을 거둔 운동선수의 환희에 찬 미소가 나를 또한 기쁨으로 이끌어 간다.

글을 쓰다 하얗게 밝힌 밤, 홀로 듣는 새벽 종소리! 늙은 어머니의 기도 소리, 존경한다는 편지글을 받아 보게 될 때, 혹은 고적한 겨울 밤 눈을 밟고 오는 소리, 그리고 기다렸던 노크 소리가 나를 또한 기쁨으로 몰고 간다. 그런가 하면 원고료나 출장에서 남은 몇 푼 가외의 돈이 나를 또한 기쁘게 한다. 그리하여 오랜만에 가족과의 외식이 이루어질 때, 그것은 아내나 아이들을 뜻하지 않게 기쁘게 하는 것! 나는 기쁨으로 다가오는 이러한 매순간들을 사랑한다.

맘에 드는 그림을 바라보게 될 때, 또는 시간적 여유를 갖고 아름다운 음악을 감상하게 될 때, 읽을 만한 좋은 책을 수중에 넣었을 때, 그리하여 편안히 누워 그 속으로 점점 빠져들게 될 때, 나는 정말 행복하다. 사소한 것들과의 만남, 그 접촉을 나는 사랑한다. 그렇기에 그러한 느낌의 순간들을 이렇게 적어 보는 것이다.

시골에서 태어났다는 것을 나는 다행으로 여기며, 그리 불편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복잡하지도 않은 읍내에 사는 것을 행복으로 여긴다. 자연을 몸으로 느낄 수 있고, 느끼며 산다는 것에 우선 행복감을 갖는다. 자그마한 기쁨들을 행복이려니 생각하며 사는 삶이 나는 좋다. 말하자면 내가 건강히 살아 있으니 좋고, 내가 해야 할 일이 있으니 좋고, 내가 사랑할 사람과 새로이 만나야 할 사람이 있으니 나는 좋다. 인생의 궁극적인 목적은 언제 어디서나 행복에 닿아 있다. 나는 나를 기쁘게 하는 것들과 함께 살아가고 싶다. 될 수만 있다면, 나 또한 그들에게로 가서 그들의 기쁨이고 행복이고 싶다. (1994)
---「나를 행복하게 하는 것들」중에서

시월의 무르익음은 보는 것만으로도 배부르게 하는 계절이다. 가족 간에 모여 웃는, 오랜만에 함께 나누는 넉넉한 잔칫상이다. 시월은 코스모스와 국화의 달이요, 시월은 단풍의 달이다. 또한 시월은 무엇보다도 과일의 달이다. 포도, 사과와 배, 감과 대추, 밤 등 ─ 포도 향으로 흘러넘치는 과수원, 산기슭에서 가지를 늘어뜨리고 붉게 익어 가는 사과, 배는 먹음직하게 누렇게 큰 열매로, 감은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주홍빛으로 빛난다. 대추는 뜰 안에 붉고, 숲은 알밤 떨어지는 소리를 낸다. 여름이 가져다 준 이 풍요함…….

주여, 가을이 왔습니다.
여름은 참으로 위대하였습니다.

라는, 릴케의 시구를 떠올리게 하는 계절이다. 시월의 빛은 들판의 황금빛이거나 아니면 청명한 하늘빛 바로 그것이다. 그것은 가던 길 멈추고 온 길을 잠시 뒤돌아보게 하는 빛이다. 시월은 이처럼 우리가 살아온 날들을 회상케 하는 달이요, 지난 계절의 은혜로움을 되새겨 보게 하는 달이다. 때문에 시월은 마흔한 살 중년 고개를 넘긴 사람들이 가까이하는 달이다.

하늘은 흘러내릴 듯 푸른 빛! 그 빛 하나로 넓은 호수를 이루고 구름이 돛배 되어 흘러간다. 그런 하늘 밑엔 으레 들국화가 핀다. 이 세상 어디에 우리나라 시월의 하늘처럼 해맑은 곳이 있을까? 누런 플라타너스 널따란 잎새의 잎맥이 가을볕 속에 드러난다. 산책길 거닐며 다시 나뭇가지 사이로 드러나는 하늘 조각을 본다. 참으로 맑고 푸르다. 이렇듯 시월은 경건히 하늘 우러르게 하는 달이다.

시월에는 온 날을 세지 말고 갈 날을 세지 말자. 잠시 만족해하자. 짙푸른 하늘에 눈을 박고 맑아진 가을물 소리를 듣는다. 이처럼 세상이 다 맑아지니, 마음까지도 가벼워지는 느낌이다. 어디선가 볕 속에 풀 마르는 냄새가 흘러온다. 풀숲에서 뛰어오르는 메뚜기, 여전히 살아 있음이 좋다. 제비들이 떠난 하늘엔 푸름만이 가득하다. 밤이면 달이 밝고, 귀뚜라미 울고, 이제 또 다른 철새들이 점점이 길 놓아 오리라. 폭염과 장마의 계절을 거쳐 내게 당도한 가을. 내 여기서 더 바랄 것이 무엇인가? 나도 이제 열매처럼 서서히 익어가는 것……. 풍요로운 시월이 햇살 속에 향기를 더해 가고 있다. (1996)
---「시월」중에서

제자 중에 중학교 2학년 나이에 대학에 가 천재성을 발휘한 녀석이 있는데, 그의 아버지에게서 전화가 왔다. 그들은 이곳 서천에 집을 놔두고 더 깊은 산골에 가 살고 싶다며 부여 만수산 가까이에 가 살고 있는 분들이다. 어떻든 자유롭고 멋스럽게 사는 이들이, 기억에 남는 아들의 초등학교 때 선생님 한분과 중학교 때 선생님 한분을 모시고 같이 식사라도 하고 싶은데 오실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초등학교 때 여선생님도 익히 알고 있는 터라 그러마 하고 허락을 했다.

즐겁게 점심을 마친 우리는 산책이나 하자며 만수산 태조암 가는 길을 걸었다. 늦가을 빛이 더없이 맑은 오후였다. 단풍이 든 산도 아름답거니와 흰 자작나무 숲 또한 시원스레 보기 좋았다. 그런가 하면 길가에 끝없이 늘어선 감나무의 붉은 알들이 푸른 하늘을 더욱 아름답게 장식해 주었다.

비어 있는 암자를 거쳐 산책길을 내려오던 중에 제자가 선생님인 나를 업어주겠다고 했다. 어엿한 청년으로 성장한 녀석이 대견스러웠지만, 부모님이 계신데 업혀 가는 것도 뭣하고 해서 사양을 했다. 그랬더니 주변 풍경에 흥이 났던지 두 부자(父子)가 그러면 함께 선생님을 위해서 노래를 불러 드리겠다는 것이었다. 그들은 음악에 소양이 깊고, 특히 첼로 연주에 특별한 재능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이수인이 작시?작곡한 신작 가곡 「내 마음의 강물」이 어떻겠냐는 것이었다. 잘은 모르지만 ‘KBS 열린 음악회’ 때 한두 번 들러본 노래인 것도 같았다. 좋다고 했더니, ‘강물’의 정확한 의미는 잘 모르지만, 좋아서 자주 부르는 노래라고 하였다. 그러면서, “수많은 날은 떠나갔어도- 내 맘의 강물 끝없이 흐르네- 그날 그땐 지금은 없어도- 내 맘의 강물 끝없이 흐르네-” 하며, 갑자기 두 부자가 목청껏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목소리가 너무 커 약간은 당황도 했지만, 가을 정취에 젖어 대자연 속에서 부르는 노래는 그야말로 육성(肉聲)의 신선함이 느껴졌다. 그 노래는 계곡을 차오르며 하늘 높이 솟아오르는 듯싶었다. 그리고,

새파란 하늘 저 멀리 구름은 두둥실 떠나고-
비바람 모진 된서리 지나간 자국마다 맘 아파도-
알알이 맺힌 고운 진주알 아롱아롱 더욱 빛나네-
그날 그땐 지금은 없어도 내 맘의 강물 끝없이 흐르네-

하고, 1절이 끝났다 싶을 바로 그때였다. 갑자기 왼쪽 산봉우리 숲 속에서 우렁차면서도 아주 선명한 노랫가락이 이곳 감들이 꽃처럼 달려 있는 계곡을 향해 흘러내려 왔다. 사람은 보이지 않았으나 단풍나무 숲 사이로 움직임이 느껴졌다. 아마 산마루까지 오른 산나그네인 듯싶었다. 목소리가 어찌나 컸던지 그 깊은 계곡에 가득 차오르는 느낌이었다. 목소리뿐만 아니라 음색(音色) 또한 선명했다. 1절을 듣고 흥이 났던지 바로 2절을 이어 불렀던 것이다. 아마 잘은 모르지만 흥(興)이란 노래란 바로 저런 것이 아닌가도 싶었다. 그들은 풍류인(風流人)일 것이 분명했다. 그때 두 부자는 갑자기 흘러온 노래에 이건 또 무언가 싶어 잠시 노래를 멈추고 있다가, 아하 오늘 뭔가 통하는 사람들을 만났다 싶었던지 더욱 큰 소리로 산봉우리를 향해 2절을 함께 불러 제꼈다. 그야말로 단풍든 온 산을 가득 메우는 생판 얼굴도 모르는 사람들끼리의 합창이었다.

양쪽 산봉우리 사이 푸른 하늘로 마침 흰 구름덩이 하나가 흘러갔다. 더없이 맑은 하늘 밑으로 단풍이 흐드러진 가을날이었다. 그때 계곡과 산봉우리에서 마주 부르는 노랫소리는 그 어떠한 음악보다도 더한 감동을 불러일으켰다. 붉게 물든 산을 배경 삼은 그 노래는 마치 자연과 인간이 하나 되는 대자연의 합창과도 같았다. 가을 숲 속에서 내게 바쳐진 노래라 생각하니, 더욱 잊지 못할 진한 감동으로 밀려왔다.

이처럼 노래라는 것은 우리 마음을 대변해 줄뿐 아니라, 사람 마음을 한층 더 고양시켜 준다. 뿐만 아니라 동질감 속에 함께 어울리게도 하는 등 참으로 폭 넓은 공감대를 형성시켜 준다. 노래는 나그네의 길동무요, 분위기에 동화된 감정의 유로(流露)다. 나아가 아름다운 그 장소에 대한 친근감과 찬미의 표현임이 분명하다. 우리는 지난 세월을 그리워하며 그렇게 천천히 산길을 걸어 내려왔다. 그리고 헤어져 돌아오면서 나는 제자에게 책을 선물하였고, 그분들은 또다시 내게 직접 가꾸어 캔 것이라며 고구마를 차에 실어 주었다. 산 계곡을 빠져나와 점점 멀어져 왔으나, 메아리 된 그 노래는 그때껏 내 가슴에 남아 흘렀다. (2009)
---「산 속에서의 합창」중에서

시골집 사랑방에 홀로 누워 있는 한낮이었다. 휴가를 맞아 느긋해진 무료한 시간. 나는 일정하게 그려진 천장 도배지의 꽃무늬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 삐죽이 열려 있는 문틈으로 뜻하지 않게 정적을 깨치듯 풍뎅이 한 마리가 날아들어 왔다. 이내 그놈은 잘못되었음을 알아차렸던지 다시 빠져나가려고 날개 소리를 내며 이리저리 날아다녔다. 그러다가 창호지문에 부딪치면서 운수 사납게도 미끄러운 비닐 장판 위에 나동그라지고 말았다. 뜻밖의 곤경에 처한 그놈은 뒤로 자빠진 상태에서 여섯 개의 다리를 쉴 새 없이 저어 댔다. 그것은 심심하던 차에 나의 시선을 끄는 흥미 거리가 아닐 수 없었다.

그놈은 어떻게든 일어나려고 안간힘을 썼다. 그러나 그러면 그럴수록 각질로 된 매끄러운 등판 날개가 미끄럼 타듯 장판 위를 미끄러져 나가며 맴을 돌았다. ‘뒤로 자빠져도 코가 깨진다더니, 이놈은 뒤로 자빠지니 일어서지를 못하는구나!’ 하는 웃음 섞인 말이 절로 나왔다. 하는 꼴로 봐서는 제아무리 해도 스스로는 몸을 뒤칠 재간이 없는 듯이 보였다. 그러나 그놈은 계속하여 풍풍 소리를 내며 날갯짓을 해댔다. 마치 절실한 도움이라도 요청하는 듯……. 그러나 그를 도와 줄 자 그 누구이겠는가? 그놈에게 있어서 이 방 안은 절해고도(絶海孤島)의 감옥과도 같은 곳이었다.

날개가 있으나 제 몸에 짓눌려 발로 허우적대는 꼴이란, 자기 몸도 뒤집지 못하는 갓난아이가 장판 위에 누워 악을 쓰며 비비적대며 밀려나가는 것만 같았다. 어떤 곤욕감 내지는 낭패감 같은 것이 밀려왔다. 우리 세상도 저 같은 빙판의 영역이 존재할지도 모른다는 생각 ─ 사람도 저 같은 불행한 꼴을 당하지 말라는 법이 어디 있을까라는 생각에…….

허공에 대고 십여 분 이상을 허우적대던 풍뎅이는 이제 지쳤는지 휴식을 취하는 듯했다. 그러나 잠잠하던 시간도 잠시, 얼마 되지 않아 그놈은 기력을 되찾았는지 또다시 그 같은 날갯짓이다. 날갯짓을 계속 해대며 비상을 시도해 보지만, 문에서 점점 더 미끄러져 나갈 뿐 결과는 역시 마찬가지다. 뒤로 나자빠져 있는 풍뎅이의 날개! 그것은 한낱 거추장스러운 몸뚱어리에 불과했다. 있어도 써먹지 못하는 무용지물. 오히려 제 몸의 무게에 짓눌려 깔려 있는 등판의 날개라니. 이런 경우 조물주의 세심한 배려가 무색해지는 한계를 드러내고 있었다. 참을성 있게 가만히 지켜보던 나는 이제 흥미를 넘어 괜스레 애타는 심정으로 돌아서고 말았다. 손에 땀을 쥐며 초조해지는 마음에 꼴깍 침까지 삼키면서 그놈에게 마음속으로 포기하지 말고 끝까지 해보라는 격려를 보냈다. 그것이 마치 내게 관계된 일이라도 되는 양…….

실패에 실패를 거듭하는 그놈을 보며 답답함에 당장이라도 바로 세워 주고 싶은 마음이 생겼지만, 좀 더 참고 기다려 보기로 했다. 그놈 스스로 난국을 극복하는 의지로운 모습을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다시 날기를 시도하며 풍풍 소리를 내었으나 역시 순조롭게 될 것 같지가 않았다. 나는 일단 안방으로 가 점심을 먹고 오기로 했다. 그때까지도 일어서지를 못한다면, 어떻게든 도와주리라고 생각하면서…….

약 반시간쯤 지나서 나는 다시 사랑방으로 돌아왔다. 그때까지도 그놈은 여전히 뒤로 자빠진 상태였다. 그것은 풀지 못할 문제의 답답함과도 같은 것이었다. 그러나 상황이 조금은 나아진 것도 같았다. 무수한 발버둥과 떠오르지 않는 지난한 날갯짓 끝에 어떻게 해서 장판이 꺾여 올라간 데까지 몸을 밀어갔던 것이다. 그곳은 약간의 경사가 있는 곳이었다. 그곳 경사는 그 놈에게는 확실히 어떤 전기(轉機)가 마련될 수 있는 기대할 만한 언덕이었다. 그 정도에 이르는 것도 제 딴에는 너무도 힘들고 고통스런 일이었을 것이다.

뒤로 나동그라진 비행 물체와도 같던 그놈은 무의인지 자의인지는 몰라도 발버둥의 각고 끝에 경사진 장판에 몸을 기대게까지 되었다. 그리고 좌우로 몸을 틀면서 드디어 그 반동으로 가까스로 바로 서는 데 성공했다. 그때 내 입에서는 ‘와!’ 하는 탄성이 터져 나왔다. 나는 녀석의 포기하지 않는 몇 시간의 끈질긴 노력에 더 없는 환호와 갈채를 보냈다. 그제야 몸을 일으킨 녀석은 살았다는 듯 방바닥을 박차고 창문을 향해 날아올랐다.

그러나 이것이 또한 웬일이란 말인가! 녀석은 지창(紙窓)이 허공인 줄 알았던지, 환한 창에 부딪치면서 미끄러운 방바닥에 또다시 나가떨어지고 말았다. 순간 내게는 아득한 절망감 같은 것이 다시 밀려왔다. 그래도 이번에는 상황이 조금은 순조로워 보였다. 불행 중 다행이랄까. 그놈은 떨어지면서 어떻게 바로 서게 되었던 것이다. 잠시 후 정신을 되찾은 그놈은 아까와는 달리 이제는 빛이 새어 들어오는 출구가 될 만한 문틈을 향해 필사적으로 기어가기 시작하였다. 그것은 경험이 가르쳐 준 시행착오의 결과였다. 여하튼 뒤뚱거리며 경사진 곳을 조심조심 기어올랐다. 물론 한두 번 기우뚱하며 자칫 위험한 고비를 맞기도 했지만, 기어이 통로인 문틈에 이르렀던 것이다. 그렇게 되기까지는 정말이지 나로 하여금 손에 땀을 쥐게 했다.

그놈은 드디어 햇빛이 눈부신 문틈을 통과했다. 그리고 분명 하늘을 보았으리라. 이내 ‘푸웅’ 하고 날개 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하늘을 향해 비상하는 소리가 분명했다. 나는 무엇보다도 후련한 기분을 맛보았다. 이제 그놈은 산과 짙푸른 숲을 보며 마음껏 날개 치고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 그놈은 그렇게 내게 불행에서 탈출하는 어떤 의지로운 모습을 보여 주고 떠났다.

그 일이 있고 며칠이 지난 뒤였다. 그에서 힘을 얻은 나는 무엇이고 의욕에 찬 일을 해보겠다고 집 안팎을 돌아다녔다. 그러다 좀처럼 가지 않는 뒤꼍으로 발길을 옮기게 되었다. 뒤란에는 손바닥만한 부추밭과 딸기밭이 있고 목단과 국화, 그리고 살구나무와 은행나무가 서 있는 앞에 장독대가 있었다. 장독대 앞에는 내가 어린 시절에 강가에서 주어다 놓았을 조약돌들이 푸르른 이끼를 뒤집어쓰고 아직까지도 고스란히 놓여 있었다. 정말이지 오랜만에 들어와 본 뒤란이었다.

나는 담과 포도 덩굴 샛길을 빠져 나가면서 ‘앗!’ 하는 충격에 사로잡히게 되었다. 그것은 끈적이는 거미줄이 내 살갗에 닿아서만은 아니었다. 거미줄에 닿음과 동시에 순간적으로 내 시야와 살갗을 스쳐 간 황갈색의 커다란 왕거미의 흉측함 때문이었다. 담과 포도 덩굴 사이 수레바퀴 모양으로 넓게 처져 있는 거미줄 위에, 내가 다시 눈길을 주었을 때는 이미 거미는 보이지 않았다. 그 엉큼한 거미는 내 몸의 출현을 느꼈던지 재빠르게 자취를 감추고, 다만 금록색의 풍뎅이 한 마리가 거미줄에 꽁꽁 옭매인 채 그 위에 매달려 있었다.

나는 신이 자비로운 구원의 손길을 내리듯 살며시 손을 뻗쳐 거미줄로부터 그 풍뎅이를 떼어냈다. 그러자 그놈은 내 손끝에 지펴지면서 몸체가 아래로 바삭 부서져 내리고 말았다. 손끝에 힘을 별로 주지 않았는데도 그랬다. 그 순간 나는 나도 모르게 전율하며, 전신에 소름이 돋치는 것을 느꼈다. 순간적으로 그 미물에 의한 충격은 나를 한동안 그 자리로부터 꼼짝 못하게 만들었다. 나는 정신을 수습하여 몸속을 파 먹혀 껍질만 남은 몸체가 힘없이 부서져 내린 땅바닥을 훑어보았다. 부서진 몸체는 그 형체도 분간할 수가 없었다. 다만 몸체에서 분리된 두 개의 반질반질한 날개만이 바람을 타고 땅바닥에 쓸릴 뿐이었다.

나는 양손을 들어 내 몸에 달린 양팔을 만져 보았다. 내 팔은 이상이 없었다. ‘풍뎅이란 놈은 한두 놈이 아니다. 그놈이 그놈이었을 것이라는 것은 누구도 몰라.’라는 자위적 생각을 하였다. 나는 차라리 모르는 데 희망을 묻고 싶었다. 하지만, 그런 불행이 어디 곤충의 세계에만 존재할 것인가 싶어 심란한 생각이 스쳤다. 사실 불행을 유발케 하는 것은 이 세상 곳곳에 산재해 있고, 보이지 않는 그물 또한 일상으로 우리의 앞길을 막는다. 나는 마당비로 거미줄을 걷어 내리며 ‘무섭고 알 수 없는 것이 세상이지.’라는 생각을 했다. 그런 생각에 미치자, 떼어놓는 발걸음조차 조심스러워졌다. (1998)
---「풍뎅이가 보여 준 것들」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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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병화의 「나를 행복하게 하는 것들」은 운율감이 작품을 더 아름답게 이끌어 준 보기 드문 수작(秀作)이다. 이 한 편의 글을 통하여 독자는 인생이 얼마나 아름다운가 생각해 보도록, 자연에 대한 작가의 미적 관조가 경이롭도록 섬세하게 드러나 있다. 그것은 작가의 자연과 인생, 인간에 대한 깊은 애정 때문이기도 하다.
- 윤재천 (한국수필문학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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