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도 가끔 죽음의 유혹을 느낄 때가 있다. 너무나 간단하고 아무것도 아닌 일을 못해서 쩔쩔맬 때, 이를테면 바로 앞에 놓인 컵을 집으려다 떨어뜨려 짜증이 확 솟구칠 때, 혹은 눈이 시리도록 화창한 휴일 오후를 그저 침대에 누워 멍하니 텔레비전이나 지켜보고 있노라면 차리리 죽어 버릴까 싶어진다. 그럴 때마다 나는 애써 그 날 퀸스 공동묘지에서 얻은 깨달음을 떠올리며 나 자신을 추스른다. 그래 맞아, 죽으면 정말 심심할 거야…….
--- p.202
이제 나에게 남은 것은 선택이었다. 끝까지 희망을 버리지 않고 기적이 일어나기를 기대할 것인가, 아니면 나의 현실을 받아들이고 그 안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것들을 찾아 나설것인가. 만약 전자를 택한다면 내 의지에 따라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 왜냐하면 나는 기적을 일으키는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다.
--- p.250
오큐페이셔널 세러피의 목표는 '할 수 있는 것은 다 한다'는 것이다. 아주 사소해 보이는 일이라도 혼자 힘으로 할 수 있는 일이 많으면 많을수록 그만큼 더 자유로워지기 때문이다.숟가락 사용하는 법, 글씨 쓰는 법, 양치질하는 법, 면도하는 법 등등 마치 젖먹이가 하나하나 동작을 배워 가듯 내 힘으로 할 수 있는 것은 뭐든지 연습했다. 처음 숟가락질을 배울 때는 입 속으로 들어가는 것보다 흘리는 음식이 훨씬 더 많았다. 특히 국물을 먹을 때는 입가에 숟가락이 도착할 무렵이면 내용물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을 지경이었다.
--- p.100
나는 다치기 전에 건강한 몸을 유지하기 위해 상당히 신경을 많이 쓴 편이다. 비록 울퉁불퉁한 근육질까지는 아니었어도 단단하고 매끈한 몸매 하나는 누구에게 보여도 부끄럽지 않을만큼 자신이 있었다.
다친 뒤로 몸매가 망가지는 것을 지켜보는 것은 가슴 아픈 일이다. 지금은 근육을 전혀 쓰지 못하는 팔다리가 점점 가늘어져 내가 봐도 안쓰러울 지경이다. 하지만 안타까운 것은 안타까운 것이고, 나 같은 사람이 할 수 있는 운동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현실을 부정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세상에는 노력을 해서 될 일이 있고 아무리 노력해도 안 되는 일이 있다. 그것을 잘 판단하는 것이 인생을 슬기롭고 효과적으로 사는 방법인 듯 싶다. 물론 노력하면 열마든지 할 수 있는 일을 게을러서, 혹은 자신감이 없어서 시도조차 해 보지 않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하지만 그보다 더 어리석은 것은, 애당초 되지 않을 일에 매달려 아까운 시간과 노력을 낭비하는 일이 아닐까 싶다.
--- pp.128-129
나는 내 손으로 밥을 먹을 수 있고 글씨를 쓸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고마운 일인지를 오랜 방황과 좌절 끝에 비로소 깨달았다. 지금 당장 몸을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은 숟가락을 들 수 있는 것조차 축복이라는 말을 쉽게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내 입장에서는 자신이 원할 때 밥을 먹을 수 있는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다'며 좌절하는 것을 이해할 수 없다. 문제는 무엇이든 잃은 다음에야 그것의 소중함을 깨닫게 된다는 게 아닐는지.
--- p.4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