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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렬하게, 단하나 2

열렬하게, 단하나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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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18년 10월 31일
쪽수, 무게, 크기 576쪽 | 148*210*35mm
ISBN13 9791189564117
ISBN10 1189564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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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1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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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을 타고 정신줄도 날려 버린 하나가 이제껏 참았던 덕심을 폭발시켰다.
“오빠! 도결 오빠! 좋아해요, 오빠!”
“으헉!”
다짜고짜 고백부터 내뱉으며 다가드는 시커먼 형체에 놀라 잠이 확 깬 도결이 모양 빠지게 휘청했다. 헛기침을 한 그는 다시 의자를 당겨 앉으며 허리를 세웠다.
“알아. 좋아하니까 여기 왔겠지.”
“저 되게 오랜만에 왔는데! 반갑지 않으세요? 설마 잊어버리신 건 아니죠?”
도결의 입매가 희미하게 실룩였다.
항상 선글라스로 얼굴을 꼭꼭 감추고, 밀당이라도 하듯 한동안 안 보이다가 불쑥불쑥 나타나는 오래된 팬.
그녀가 쓰고 있는 검은 마스크는 겉보기엔 평범해 보이지만 사실 오닉스의 팬클럽 [시크블랙] 1기 멤버들에게만 주어진 스페셜 굿즈로, 안쪽에 멤버들의 사인이 새겨져 있다. 아마 저 마스크 안엔 박도결 사인이 있겠지.
다음은 빨간 캡모자. 오닉스의 데뷔곡인 [Red riding hood]의 콘셉트가 ‘빨간 모자를 사랑한 늑대’였기에, 초창기 팬들이 풍선이나 봉 대신 빨간 모자를 응원 아이템으로 삼았었다. 오빠들이라면 기꺼이 한입에 잡아먹혀 주겠다는 무시무시한 애정이 담긴 물건이다.
11년이라는 시간이 흐른 지금, 꾸준히 새로운 팬들이 들어오며 팬덤 자체의 규모는 오히려 커졌지만 초창기 팬들은 같이 나이를 먹어가면서 자연스레 보기 힘들어졌다. 그러다 보니 지금은 전설의 아이템이라 불리는 빨간 모자와 검은 마스크까지 장착하고 나타나는 오랜 팬은 도결에게도 각별했다.
스타와 팬. 팬과 스타.
겉으로 보기엔 팬이 일방적으로 쫓아다니는 것처럼 보여도, 팬의 호의는 ‘조공’이고 스타의 호의는 ‘서비스’라고 할 정도로 바치고 베푸는 관계처럼 보여도, 더 아쉽고 절박한 쪽은 사실 스타였다. 좋아하는 스타 하나 없다고 인생이 초라해지진 않지만, 좋아해 주는 팬 하나 없는 연예인의 인생은 초라하다 못해 비참해지니까.
잊어버릴 리도, 반갑지 않을 리도 없다. 도결은 짐짓 시크하게 대꾸했다.
“야, 순결. 너 아직도 탈덕 안 했냐? 요새 상큼한 애들 많이 나오던데.”
“뭔 소리래요? 제 눈엔 오빠 빼고 다 칙칙하거든요? 그리고 ‘휴덕은 있어도 탈덕은 없다’는 말도 모르세요? 오빠는 저를 한동안 못 보셨겠지만 전 항상 오빠를 보고 있었다고요.”
“그 저돌적인 열정, 공부든 일이든 다른 곳에도 쏟고 있는 거 맞지? 내가 네 인생의 낙이 되어줄 순 있어도 네 인생을 책임져 주진 못해.”
“좋아서 좋아하는 거니까 책임까진 안 져주셔도 괜찮아요. 제가 오빠 애라도 가졌다면 모를까.”
“손만 잡아도 애가 생긴다면 모를까, 그런 쪽으로 널 책임질 일은 없을 것 같거든?”
한숨을 폭 내쉰 도결이 사인지 위에 ‘TO. 순결한도결’이라고 적었다. 보통 팬들은 제 이름 꼭 기억해 달라며 몇 번이고 강조하곤 했는데, 얘는 얼굴은 물론 이름조차 알려주지 않았다.
“닉네임 좀 바꾸면 안 되냐? 쓰다가 찔려서 손가락이 오그라들 것 같은데.”
“뭔 소리래요? 제 눈엔 오빠가 세상에서 제일 순결하거든요? 하찮은 제 눈 따위가 함부로 봐도 되나 싶을 정도로.”
말을 말자 싶어진 도결은 묵묵히 사인을 했다.
“고맙습…….”
하나가 사인지를 받아 들기 직전, 약 올리듯 손을 뺀 도결이 제 얼굴을 바짝 들이밀었다. 화들짝 놀란 하나가 주춤 물러났다.
“전부터 궁금했는데, 내가 톱스타지 네가 톱스타냐? 내 얼굴은 실컷 오픈 중인데 너는 왜 그렇게 가리고 다녀?”
“모, 못생겨서요.”
하나는 다급한 손길로 모자를 더 눌러썼다. 눈매가 가늘어진 도결이 사인지를 돌려주며 넌지시 덧붙였다.
“내가 예쁘다고 하면 벗을래?”
누군가 일시정지 버튼이라도 누른 양, 하나의 움직임이 멈췄다. 도결은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제 얼굴이 비칠 만큼 짙은 선글라스 위를 주시했다.
차례가 조금씩 밀리며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하나는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
“벗는 거는, 그러니까…… 오빠가 벗으라고 해주셔서 되게 좋긴 한데요, 지금은 못 벗어요. 사람도 많고 또…… 하지만 나중에 꼭 벗을게요.”
뭘 벗으라고 한 건지 듣지 못한 다음 차례의 팬이 ‘내가 방금 무슨 말을 들은 거지?’ 하는 눈을 했다.
“저요, 언젠가는 꼭 제일 성공한 팬이 될 거예요. 그때 당당히 벗고 싶어요. 오빠 앞에서, 꼭.”
뒤에 선 팬은 튀어나올 듯한 눈으로 도결과 하나를 번갈아 보았다. ‘톱스타 D군, 사인회에서 여성팬 희롱’ 같은 기사라도 본 듯한 반응이었다.
“……마스크요.”
“마스크라고, 마스크!”
하나가 말을 맺고, 도결도 손가락질까지 해가며 강조한 후에야 그 팬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시간 끝났습니다. 내려오세요.”
어느새 올라온 관리자가 인상을 썼다. 반은 떠밀리다시피 내려가면서도 하나는 끝까지 외쳤다.
“오빠, 진짜 좋아해요!”
그 소리에 돌아본 도결이 천천히 입술을 늘였다가 오므렸다.
“나도.”
단 두 글자로 하나의 가슴에 불을 싸질러 놓고, 도결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다시 고개를 돌렸다. 다음 팬에게 기다리게 해서 미안하다며 먼저 손깍지를 껴주는 광경을 넋 놓고 지켜보던 하나는 다 끌려 내려와서야 참았던 숨을 토해냈다.
“맞다, 손! 정신없어서 손도 못 잡았네. 아…….”
무대 위의 도결을 지켜보는 눈에서 아쉬움이 뚝뚝 떨어졌다. 사인회가 끝날 때까지 한 번이라도 더 보려고 기웃거리다가 마지못해 몸을 돌렸다.
백화점을 빠져나와 역 계단을 내려간 그녀는 곧장 화장실을 찾아 들어갔다. 마스크를 벗어 바지 뒷주머니에 넣고 선글라스까지 벗은 후, 사인지를 품에 꼭 안고서 눈을 감았다.
“단하나, 계 탔구나…….”
오랜만에 가까이서 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벅찼는데, 예고도 없이 쑥 들이밀던 얼굴이라니. 하마터면 심장을 내던져 버릴 뻔했다.
자칫 희미해질세라 방금 전 마주한 도결의 얼굴을, 표정들을, 목소리를, 반복하고 또 반복해 그렸다. 새기면 새길수록 가슴이 부풀었다. 너무 좋아서 울고 싶을 만큼.

“내가 네 인생의 낙이 되어줄 순 있어도 네 인생을 책임져 주진 못해.”

그러나 진심 어린 그 말을 깊이 새기고 곱씹을수록 입안이 씁쓸해졌다. 그저 낙일 뿐이라는 도결에게 쏟는 열정은 그의 웃음 한 번만으로도 쉽사리 보답 받을 수 있는데, 인생을 걸고 쏟는 열정은 왜 7년째 아무런 보답도 주지 않는 걸까.
등에 메고 있던 가방을 변기 뚜껑 위에 내려놓은 하나는 비닐백 한 장과 유성펜을 꺼냈다. 비닐백 위에 오늘 날짜를 적고, 그 안에 사인을 소중히 넣어 가방에 챙긴 후에 터벅터벅 화장실을 빠져나왔다.
이제 연습생 단하나로 되돌아갈 시간이다.
전철에 올라탄 하나는 문가에 기대섰다.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이 빠르게 스쳐 지나간다. 분명 아주 많은 것들이 있을 텐데, 사람들의 눈에 띄는 것은 아주 크거나 아주 높거나 아주 빛나는 것들뿐이다. 제자리에서 묵묵히 역할을 다하고 있음에도 끝내 눈에 띄지 못한 작은 것들은 허무하게 뭉개져 뒤로 밀려나기만 했다.
‘……가기 싫다.’
당장에라도 아무 역에서나 내린다면 다른 데로 갈 수 있다. 그런다고 세상이 크게 어긋날 리도 없다. 그러나 항상 같은 곳으로만 향하는 습관이 들어버린 발은 쉽사리 움직여 주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가방 안에 든 도결의 사인이 등 뒤를 꼬옥 붙들었다.
정확히 말하면, 사인 아래 덧붙여 준 추신이.

―P.S. 네 눈 하나도 안 하찮으니까 앞으로도 실컷 봐.

아까까지만 해도 쓰디쓰던 입안이 어느새 달아졌다. 심장이 부풀어 터질세라 작게 숨을 몰아쉬어 바람을 빼낸 하나가 입술을 말아 물었다.
‘네, 그럴게요. 앞으로도 오빠 실컷 보면서 갈게요. 오빠 앞에서 당당히 벗을 그날까지.’
--- 본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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