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문장] 이 책은 전시장에서 보이는 사진들에서 출발한다. 그것이 반드시 현대 미술로서의 사진, 또는 이른바 ‘예술 사진’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전시라는 형식이 미술에만 한정된 것도 아니고, 애초에 전시장 자체가 미술로만 이루어진 공간도 아니기 때문이다.
이제 사진은 그냥 사진적인 스타일의 그림이 아닐까? 그렇지만 사진을 더 이상 그림과 구별할 필요가 없다고 말하려 하면, 무언가 석연치 않은 느낌이 뒤따라온다. 그 말은 우리가 사진이라고 알고 있었던 것, 또는 사진으로부터 배웠던 어떤 것을 적극적으로 망각할 것을 요구한다. 하지만 사진을 그림과 구별하지 않음으로써 상실하게 되는 것은 정확히 무엇일까? 그것을 무엇이라고 이름 붙일 수 있을까?(15쪽)
우리는 여전히 이미지를 흉내내서 또 다른 이미지들과 사물들, 인물들과 환경들을 형성하고 있다. 우리의 세기는 우리가 다른 동물들보다 특별히 더 뛰어난 존재가 아님을 거리낌없이 보여주고 있지만, 그럼에도 인간은 이미지를 만드는 존재이며, 여기 없는 것의 이미지를 그려내고 그 이미지를 실현하고 스스로 그 이미지가 되려고 하는 특이한 동물이다. 이 책은 그런 이미지와의 상호작용에, 그 가능성에 더 초점을 맞춘다.(36쪽)
그러므로 사진이 변했다면, 그것은 카메라 내부의 어두운 방에서 필름이 디지털 이미지 센서로 대체된 것뿐만 아니라 카메라 외부의 밝은 세계가, 카메라를 둘러싼 사람들과 사물들의 배치 전체가 변했다는 것을 의미한다.(46쪽)
사진가는 건축을 통해 자신이 다루는 매체의 객관성과 창조성, 또는 더 정확히 말해 객관성의 창조성을 시험할 기회를 얻었다. 역으로 건축은 사진이 제공하는 새로운 재현 가능성을 바탕으로, 건축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비전을 확장하고 재검토할 수 있었다. 사진은 "자연의 연필"인 동시에 건축의 연필로서, 건축가의 도구 상자를 확장시키며 향후 한 세기 반 넘게 건축의 역사를 함께 했다.(49쪽)
그렇다면 이 작업은 가짜를 진짜처럼 호도하는 미디어 환경을 비판하는 것일까? 스마트한 척하는 멍청한 가짜 창문을 들여다보기를 멈추고, 진짜 햇빛이 쏟아지는 진짜 세계로 돌아가야 한다고? 눈을 감고 들으면 그럴듯한 이야기다. 하지만 대형 출력된 해바라기 무늬 시트지의 낯익은 물성이 시야를 가로막은 곳에서, 진짜를 보라는 말은 조금 공허하게 들린다.(90쪽)
지금처럼 과거를 시각적으로 충만하지만 현재와 단절된 이국적 풍경으로 대량 생산하고 소비할 수 있게 된 것은 정말로 얼마 되지 않았다. 그것은 세계가 변화하고 시간이 흐르는 속도가 한 세대 내에서 체감할 수 있을 만큼 빨라지고, 그런 시간의 편린들을 생생하게 기록하여 신속하게 유통할 수 있는 기술이 보급된 결과다. 그렇게 변모하는 세계와 세계상의 되먹임 속에서, 변하지 않는 것은 극복의 대상인 동시에 갈망의 대상으로서 모순적인 위치를 점한다. 그래서 어제는 고구려 시대가 유행하고 오늘은 백제 시대가 유행한다. 지난주에는 프로방스 스타일이 유행이고 이번 주에는 포틀랜드 스타일이 유행인 것처럼. 당신은 어디로든 갈 수 있다.(123쪽)
생리학과 미디어 기술의 발전은 눈의 위치를 능동적인 시각의 주체에서 점점 더 자동화된 시각적 작용의 객체로 이동시켰다. 눈이 무언가를 하기도 전에, 눈에 무언가 행해진다. 카메라를 든 사 람은 눈의 편에 설 수도 있고 눈을 향해 설 수도 있지만, 어느 쪽에서도 눈은 하나의 단독적인 시점으로 성립하지 않는다. 그것은 인공화된 자연으로서 이미 언제나 다른 것들과 연합한 상태로 발견된다.(209쪽)
하지만 우리가 이미지라면, 우리는 눈이 달린 이미지이기도 하며, 그 눈은 살과 뼈로 이루어진 절연체 속에 파묻혀 있다. 빛을 완전히 차단하지는 못하는 불투명한 눈꺼풀을 깜빡일 때마다, 우리의 눈은 언제나 어느 정도 지저분한 백지로 되돌아온다. 작은 못 자국이나 흐릿한 테이프 자국을 남기고 텅 비워진 전시장만큼의, 또는 커서가 깜빡이는 텅 빈 도큐먼트만큼의 가능성이, 거기에는 아직 남아 있다.(232쪽)
이를테면 전시장을 둘러싸고 우리가 행하는 모든 것은 이제부터 나와 당신 같은 필멸자들 사이의 일이 된다. 전시장과 전시물과 그에 관한 모든 것은 자동으로 보편성을 부여받는 대신(결국 영원이 보편의 시간적 측면이라면, 이제 무엇이 미술에 보편성을 부여할 것인가?) 자신의 시공간적 범위에 대해 일정한 판단을 해야 한다. 각자는 언제까지 유효하며 얼마만큼의 시간과 공간을 점유할 능력과 권한이 있는지. 어느 정도까지 가능하며 어느 정도가 합당한지. 언뜻 생각하면 가능한 넓은 시공간을 차지할수록 좋을 것 같고, 그것이 무엇이든 훌륭한 성취에 부합하는 보상일 것 같다. 그러나 영원이 사라진 곳에서 오래 산다는 것은 새로운 수수께끼가 된다.(234쪽)
과거의 인간은 오래 살지도 못하고 완전하지도 않기에 예술을 통해 그 모든 한계를 극복하고자 했다. 이것은 시간의 흐름을 견딜 수 있는 견고한 재료가 미적 매체가 되었던 이유이기도 하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오래 살기를 피할 수 없는 상태에서 시시각각 변하는 세계의 순수한 변덕스러움과 대면한다. 인간보다는 곤충의 생애 주기가 진화적 관점에서나 개체적 관점에서나 훨씬 적절하게 느껴지는 분주하고 반복적인 동시에 예측 불가능한 세계에서, 전시는 일시적인 것의 엔진이 된다. 그것은 일시적인 것들이 태어나는 계기가 되고, 단순히 오래 살던 것들에 일시성을 회복시킨다. 그 시간은 고통스러운가? 대체로 그렇다. 하지만 영원을 복원하는 것으로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가? 아마도 그렇지 않다.(23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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