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에서 “일본이 좋더라” “선진국 맞더라” 하면 듣기 싫어한다. 친일파로 찍혀 왕따를 당할 수 있다. 친미, 친중은 되는데 친일은 왜 안 될까? 설마 나라를 팔아넘긴 친일 매국노와 저가 항공, 맛집 여행을 동일시하는 것은 아닐 테지. 아무리 미운 나라라도 그쪽 사정을 아는 사람이 있어야 한다. 좋은 외교 관계 유지를 위해서, 무역하기 위해서도 그렇다. 일본하고는 ‘이성보다 감정이 먼저’라고 하는데, 감정이란 무엇일까. 옷에 묻어서 잘 안 지워지는 페인트 자국 같은 것일까. 그럼에도 한국인이 제일 많이 가는 나라가 일본이다. 페인트는 페인트, 여행은 여행일까.
--- p.15~16
우리는 광복 후 80년을 쉼 없이 일본을 손가락질하면서 불편한 마음을 감추지 않았다. 그러나 아무런 소득도 위안도 얻지 못했다. 그렇다고 실연당한 청년처럼 망치질을 해본 것도 아니다. 아무 결과물 없이 지쳐버린 것은 양 나라 국민들이다. 그러나 애초에 잘못된 만남이었어도 이성적 매듭은 지어야 한다. 조선시대를 돌아보면 참 답답한 왕과 신하들이었다. 언제나 그들 몇몇이 백성들을 전쟁에 내몰았다. 권력에 짓눌린 아랫것들은 평생 가난하게 살았다. 솔직히 일본도 별반 다르지 않다. 임진왜란도 태평양전쟁도 그쪽 몇몇 전쟁광들의 일장춘몽이 아니고 무엇이랴. 그들 세치 혀끝에 모래알보다 많은 젊은이들이 죽어갔다. 일본 국민 모두가 피해자요 억울한 가해자다.
--- p.22~23
옛날도 아니고 불과 한 세대 전까지 도쿄의 센토들이 그랬는데, 엉큼한 ‘노조키’(?き: 엿보기) 시대는 끝이 났다. 센토 내부 구조가 바뀌었기 때문이다. 무척 신기하게도 일본은 태고 때부터 혼욕문화라는 게 있었다. 신기한 쪽은 이방인의 눈이고, 온천을 좋아하는 일본인들에게 혼욕은 하나의 문화요 생활의 일부다. 옛날이 아니고 지금도 규슈 쪽이나 도쿄를 기점으로 북으로 가면 남녀가 함께 들어갈 수 있는 노천탕이 많다. 생판 모르는 남녀가 탕 속에서 담소를 나누는 것을 보면 아, 이것이 바로 ‘문화의 차이’인가 싶다.남녀 혼욕은 메이지유신(明治維新) 이후에도 도쿄에 보란 듯이 성행했다. 끔찍한 것은 혼욕 센토에 전등이 없었다. 복도에 고작 촛불 한두 개 뿐. 욕탕 안은 그야말로 깜깜무드. 그 분위기에 달아올랐을까. 알몸의 남녀들이 시시덕거리며 장난을 쳤고 마침내 센토는 야릇한 사교의 장으로 발전했다. 재미를 붙인 남녀들은 빨리 밤이 되기를 기다렸고 센토 주인은 실내를 더 어둡게 했다. 당연히 연중, 연일 만원사례였다. 일반 센토가 파리를 날리는 동안 온갖 스캔들, 온갖 추문이 난무했다.
--- p.30~31
아니 그런 원시시대 산간벽지에 인터넷도 없이 인간이 어떻게 살 수 있나 하겠지만, 놀랍게도 그곳에도 인터넷 버금가는 정보망이 있었다. 도청, 해킹 절대 불가. 그게 과연 무엇일까. ‘소문’이라는 정보망이었다. 모든 바깥세상 소식이 소문의 드론을 타고 착착 들어왔다. 밑도 끝도 없는 뜬소문, 낭설, 가짜 뉴스도 많았지만 어쨌든 빨랐다. 조선이 광복했다는 ‘긴급 소문’도 금세 날아왔다. 마을 사람들이 만세도 안 부르고 그저 입만 딱 벌린 채 다물 줄을 몰랐다. 연이어 엄청난 정보가 날아왔다.
“미국이 원자폭탄을 터뜨려 일본이 다 없어졌단다.”
다시 입이 딱 벌어졌다.
“일본에 돈 벌러 간 친척들도 함께 물귀신이 된 거냐?”
“시신을 어떻게 찾아 장례를 치르냐?”
사방에서 웅성거렸다. 그러자 다시 정보가 떴다.
“만주, 상해에서 쫓겨난 일본인들이 돌아갈 나라가 없어져서 조선으로 다 온단다. 아이고, 큰일났네.” 했다가
“일본이 다 없어진 것이 아니고 반만 가라앉았단다.”
“아니다. 가라앉은 것이 아니고 사람만 다 죽고 개, 고양이만 남았단다.”
이 시대가 가짜 뉴스에 시달리듯 그 시대도 뻥튀기 풍문이 꼬리를 이었다.
--- p.40~41
일본인들은 모두 떠났지만 도처에 일본이 남아 있었다. 일본은 결코 모두 가지 않았고, 우리도 모든 것을 떠나보내지 못했다. 지금이야 막강 전력을 자랑하는 세계적인 강군 대한민국 국군이지만, 광복 후 한국군은 솔직히 군대랄 수도 없었다. 탱크가 다 무언가. 변변한 대포, 번듯한 기관총 하나 없었다. 자주포는커녕 비슷하게 그린 그림도 없었다. 일본군이 쓰던 병영, 그들이 버리다시피 남겨준 녹슨 검과 총. 신병 훈련도 거의 일본식이었다. 물통과 식판도 한동안 그대로 썼다. 짬밥(잔반), 총기 수입(총기 손질) 같은 엉터리 일본 말이 고쳐지지도 않고 수십 년간 그대로 썼다. 일본 말을 한다고 무슨 범죄는 아니지만 제대로 알고 써야 품위를 잃지 않고 이상한 사람 취급을 당하지 않는다. 지라시(散らし: 전단지), 산마이(三枚目: 조연배우), 잇빠이(一杯: 가득), 가오마담(顔マダム: 얼굴마담), 히야시(冷やし: 차게 함), 마치 우리말같이 섞어 쓰지만 모두 한글 학자들이 불쾌해하는 단어다.
--- p.55
모두가 한번쯤 심호흡하고 숨 고르기를 해야 할 중대한 시기였다. 그러나 불쑥불쑥 등장하는 강렬한 복병들. 그것은 살기 바쁜 서민들의 혼을 쏙 뺐다. 전 국민을 열광시킨 프로레슬링, 김일의 박치기, TV 세계타이틀 권투. 어디 스포츠뿐이랴. 이미자 ‘동백아가씨’ ‘맨발의 청춘’과 신성일, 김지미…. 연이어 TV 일일 연속극이라는 괴물까지 출현, 국민들은 자식들에게 예의범절이라는 것을 가르칠 시간도 여유도 없었다. 권력자들 자제까지 어른의 잔소리를 따분한 촌티로 받아들였다. 그때까지만 해도 일본 문화가 발도 못 붙일 때였는데 못된 것만 일본을 그대로 따라가고 있었다. 그 무렵 ‘사회지도자’급 인사들이 조금만 힘을 썼으면 ‘무질서하고 남을 배려할 줄 모르는 매너 없는 한국인’이라는 뼈아픈 지적을 받지 않았을 텐데…. 권력자는 권력에 취하고 국민들은 국민들대로 무엇인가에 단단히 취해 있었다.
--- p.83
일본군은 민간인을 다 죽이지 않았다. 승전 축하 술판이 벌어졌을 때, 일본군 장수를 껴안고 강물에 뛰어든 기생 논개가 그 증거다. 적들이 왜 논개만 살려두었겠는가. 조선 말도 모르는 일본군이 그녀가 논개인지 어떻게 알았을까. 살아 있는 다른 기생에게 캐물으니 말했을 것이고, 더 많은 생존자가 있었다는 추론이 충분히 가능하다. 전쟁은 젊은 여성을 두 번 죽인다는 말이 있다. 일본군은 젊은 여인들을 기꺼이 살려야 했고, 식사와 빨래를 도와줄 일손도 필요했다. 허기진 병사 10만이었다. 1대 10 전투에서 1만 조선군이 한 사람당 2~3명을 죽이고, 죽었다 해도 7~8만이다. 거의 모든 여인들이 차례로 변을 당했을 것이다.
--- p.152
그러면서 물 낭비는 심해, 그야말로 물을 물 쓰듯 쓰고 나서 비가 안 온다고 하늘을 원망했다. 조선왕조 500년에 ‘물을 제발 좀 아껴 써라’ 교시를 내린 왕이 한 명이라도 있기는 있었나? 빗물을 모으기는커녕, 꼬마 운하를 꿈꾸기는커녕, 미국에서 알 카포네가 시가를 물고 기관총을 휘두를 때, 정말 부끄럽게도 서울 광화문 일대는 비만 오면 아낙네들이 요강을 들고나와 맑은 개천에 쏟아부었다. 조선시대만 해도 물이 맑다고 ‘청계천’이었는데 인구가 급격하게 는 탓인지. 온갖 잡동사니를 개천에 던지고 오물까지 버렸다. 청계천은 금방 더러운 탁류, 오물천이 되었다(1960년대). 어느 이른 아침 술집 여종업원이 그 물가에 쪼그려 앉아 조심스레 세수를 하고 있었다. 하필 그때 아침 산책을 나왔던 외국대사관 직원이 그 광경을 보고 딱 두 마디했다고 한다. “오, 노!”
--- p.173~17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