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 : 새뮤얼 테일러 콜리지(Samuel Taylor Coleridge)
1772년 10월 21일 영국 데번 주(州)의 오터리슨트메리에서 목사이자 교사인 아버지 존 콜리지와 어머니 앤 보든의 10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19세 때인 1791년 10월에 콜리지는 케임브리지대학교 지저스칼리지에 입학했고, 1792년 7월에는 노예무역에 관한 그리스어 송가로 메달을 수상했다. 그는 1797년 봄에 윌리엄 워즈워스(1770∼1850) 남매를 만나 우정을 쌓기 시작했는데, 워즈워스는 콜리지와 가까이 지낼 생각에서 도셋 주에서 이주하기까지 했다. 두 시인 모두에게 유익했던 이 ‘창조적 공생’의 시기는 영문학사에서 가장 생산적인 우정의 시기로 평가되고 있다. 이 시기에 콜리지는 워즈워스와의 대화를 통해 젊은 시인과 철학자로서의 자신의 생각과 느낌을 가다듬었고, <노수부의 노래> <쿠블라 칸> <크리스타벨>(제1부) <한밤의 서리> 등의 뛰어난 시편들을 썼다. 두 시인의 ‘창조적 공생’은 1798년 늦여름에 영국 낭만주의의 서막을 연 작품으로 간주되는 ≪서정담시집≫이 발간됨으로써 그 결실을 맺었다.
1800년에 호반지방의 그래스미어에 정착한 워즈워스 일가의 집에서 약 20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케직의 ‘그레타홀’로 가족과 함께 이주했다.
처음에 새 환경을 마음에 들어 했던 콜리지는 <크리스타벨>의 제2부를 워즈워스 남매에게 읽어 줄 때처럼 여러 차례 헬벨린 산(해발 950미터)을 넘어 워즈워스의 집을 방문하곤 했지만, 잦은 병 때문에 점점 더 아편에 의존하게 되었다. 또 그는 실험적 방식으로 자신의 철학적이고 과학적인 연구들을 확대하면서 “신경 체계에 해가 될 정도로까지” 자신의 감각에 숱한 실험을 했는데, 이 해로운 “난해한 연구”는 <낙심?송가>에서 언급되고 있다. 1810년 3월에 연인인 새러 허친슨과, 또 10월에 워즈워스와 결별한 이후 1816년까지의 콜리지의 삶은 사적으로는 황폐했지만 놀랄 정도로 생산적이었다. 그는 수차례 대중 강의를 했고, 신문에 기고했으며, 자신이 쓴 비극이 상연되는 것을 보았다. 그는 시집 ≪무녀의 엽편들≫(1817)을 준비했고, 문학 비평의 기념비적 저작이자 문학적 자서전인 ≪문학 평전≫(1817)의 저술에 착수했다. 1816년 4월에 친구인 의사 제임스 길먼이 콜리지를 맡아 그의 병과 아편중독을 관리해 주기 시작했다. 세상을 떠날 때까지 길먼의 집에 거주하면서 치료를 받았던 콜리지는 1824년에 당시 막 창립된 왕립문학원에서 연금 100파운드를 받는 준회원이 되었다. 콜리지의 저작의 상당 부분은 이 하이게이트 시기에 저술되었는데, 특히 ≪사색의 길잡이≫와 ≪교회와 국가의 구성 원리≫는 빅토리아 시대의 막 부상하는 세대에 큰 영향을 미쳤다. 많은 사람들에게 ‘하이게이트의 현자(賢者)’로 불렸던 그는 1834년 7월 25일 세상을 떠났고 그곳에 묻혔다.
한국외국어대학교 영어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원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취득했으며, 1985년부터 현재까지 배재대학교 영어영문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미국 노스캐롤라이나대학교 영문과에서 풀브라이트 방문학자(1992∼1993)로 연구한 바 있으며, 한국현대영어영문학회 제1회 우수논문상(2005)을 수상했다. 콜리지와 워즈워스를 비롯한 영국 낭만주의 시인들과 현대 영미 시인들에 관한 일련의 논문들을 발표해 왔고, 현대 미국 여성 시인과 원주민 시인들, 티베트 문화에 관심을 갖고 연구하고 있다. 현재 한국현대영미시학회장과 한국현대영어영문학회장으로 일하고 있으며, 저서로 ≪콜리지의 시 연구≫(2001), 역서로 ≪문학과 인간의 이미지≫(1983), ≪거상?실비아 플라스 시선≫(공역, 1986), ≪영문학사(제4개정판)≫(공역, 1992), ≪Who’s Who in Korean Literature≫(공동영역, 1996), ≪티베트 원정기≫(공역, 2006), ≪영미시의 길잡이≫(2007), ≪티베트 순례자≫(공역, 2007), ≪영문학의 길잡이≫(2008), ≪마지막 탐험가-스벤 헤딘 자서전≫(공역, 2010)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