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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르소나

페르소나

[ 양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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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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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일 2012년 03월 20일
쪽수, 무게, 크기 232쪽 | 232g | 128*188*20mm
ISBN13 9788932915531
ISBN10 89329155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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텅 빈 페이지 위로 그의 내면 무대에 출연하는 가면들, 갖가지 형상의 수많은 인문들, 탕아와 실연한 남자, 어릿광대와 해적, 경찰과 부랑자, 수도승과 난봉꾼, 지주와 거지, 현자와 바보가 불안하게 흔들리며 떠오르곤 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 모든 것 속에 그는 없었다. 때때로 그는 자신의 초상을 그려 보았다. 자신의 특질들, 성과 이름, 생년월일, 직업, 특기 사항들을 하나하나 열거했다. 그러다가 그는 돌연 멈추곤 했다. 그래 봤자 아무 소용 없다는 듯이. 그 자신을 그는 어디에 놓아두었던 걸까? 대체 그는 어디에 있었을까? ---p.15

아버지가 숨을 거둘 때, 그는 이미 오래전부터 세상에서 사라지고 없는 사람이었다. 이미 오래전에 그는 자신의 사라짐을 기획해서, 가족에게서 자신을 빼앗은 상태였다. 이미 오래전부터 우리는 아버지에 대해 말할 때면 반드시 소리를 낮추곤 했다. ---p.49

나는 자리에 가만히 앉아 아버지와 얼굴을 마주하고 있을 수 없었다. 간단히 말해, 그 자리에 그와 함께 있을 수 없었다. 아버지는 이미 피곤함과 신경질, 실내의 웅성거림 속에서 흐트러진 모습이었다. 자신이 죽으면 살아 있을 때보다 내가 자신을 더 사랑할 거라고, 그날 아버지는 아마도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납처럼 무겁게 깔리는 흐릿한 오후 햇살을 받으며 아버지는 우리를 묘지 입구까지 배웅했다. 무덤으로 향하는 그를 우리가 배웅하는 중이라는 사실을 그때는 단 한순간도 깨닫지 못했다. 나는 다정하게 아버지를 포옹함으로써 언짢은 기분으로 그를 대한 나를 용서했다. 아버지가 멀리 사라져 가는 것을 바라보지도 않았다. ---p.60

그 누구도 아버지의 증상을 구체적인 병명으로 부르지 않았다. 심지어 성인이 되어서 내가 읽는 책들, 만나는 사람들로부터 그 병에 대해 알 수 있었을 때조차도 나는 결코 그 병명을 찾아보려 하지 않았다. 내 주위 사람들은 그저 이렇게만 언급하곤 했다. 「네 아버지는 지금 별로 좋지 않으시지.」 또 여동생과 함께 아버지의 소식을 나누면서도, 그와의 최근 전화 내용을 되짚으면서도, 여동생과 나 역시 이렇게만 말하고 말았다. 「아버지는 잘 지내거나, 더 나아졌거나, 아니면 나아진 게 전혀 없거나, 지금으로선 그렇지.」 내가 「아버지는 미쳤어」라고 언제 처음으로 혼자 중얼거렸는지, 「미쳤다」라는 이 단어, 발음에 힘이 들어가면서도 말꼬리가 흐려지는, 불안감을 일으키면서도 살짝 흥분을 유발하는 이 말을 언제 처음으로 쓰게 되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사실 「미쳤다」라는 단어는 아무것도, 내가 느끼던 고통, 어린 마음에 스며들던 두려움, 아버지와 함께 허우적거리며 빠져들던 공포심 --성인이 되고 나서의 내 모든 삶은 그 공포심을 감추는 데 바쳐졌다-- 말고는 아무것도 가리키지 않았다.
---p.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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