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항에 도착해서 한숨을 돌리는가 싶었는데 유럽에서 쓸 수 있는 쓰리유심카드를 갈아 끼울 핀이 없어 난감하다. 두 달간이나 스마트폰을 정지시켜 놓고 쓰리유심카드만을 달랑 들고 왔다. 파리공항에 도착해서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은 픽업을 맡은 위캡Wecab 택시회사와 통화를 해야만 하는 것이다. 마음이 점점 조급해지고 가만히 앉아 있을 수없어 이리저리 돌아다니던 중, 애플매장을 발견하고 다행히 직원의 도움을 받아 유심카드를 교체했다. 그제야 공항의 Wi-Fi가 잡히자 한결 마음이 느긋해졌다. 유심카드를 끼우기만 하면 별다른 조치 없이 간편하게 사용할 수 있다고 장담했던 판매자의 말을 철석같이 믿고 안도했다.
긴장된 마음도 쓸어내림 겸 공항 커피하우스에 들러 에스프레소를 주문하자, 오케이를 한 직원이 “스트롱 샷?”이냐고 묻는다. 반복해서 묻자 멍을 때리고 있다가 주문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길게 늘어서 있자 괜히 나 때문인가 싶어 머쓱한 마음에 한마디 보탰다.
“스트롱 샷을 내가 어찌 알겠니? 싱글 샷, 더블 샷은 알겠는데 그냥 주면 안 되겠니?” 홀로 나선 여행에 쫄은 놈, 커피 한잔에 진땀을 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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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장피에드포르 순례자 사무소에서 안내해 준 지트데타프에체구앙 Gite d’?tape Etchegoin 숙소에 윤상과 경미, 지영과 함께 짐을 풀었다. 도미토리가 딸린 오뗄로 분류된 이 숙소에서는 아커이유뻴러렝Accuil Pelerin 공립 알베르게의 스탬프를 찍어 주었다. 저녁을 먹고 긴장이 풀린 까닭에 내일 출발에 대한 별다른 준비 없이 생장피에드포르에서의 첫날을 보내게 되었다. 까미노의 알베르게에서는 특별히 베드버그Bedbug를 조심해야 한다고 들었지만, 평소 벌레에 잘 물리는 체질이 아니어서 무사태평하게 잠을 청할 수 있었다. 모두가 깊은 잠에 빠져 있는 조용한 새벽, 잠결에 견딜 수 없는 가려움이 생기더니 점점 심해졌다. 더 이상 달콤한 잠을 기대할 수가 없다. 예상하지 못한 베드버그에 물린 것이다. 그것도 한두 군데가 아니어서 발작적인 가려움으로 잠을 잘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염치 불고하고 베드버그용 스프레이를 가지고 있는 윤상을 흔들어 깨웠다. 깊은 잠에서 눈을 뜬 윤상이 비몽사몽 중, 긴 머리를 풀어헤친 나를 발견하고는 귀신인 줄 알고 놀라 말을 잇지 못했다. 이름도 생소한 베드버그 소동에 잠든 순례자들이 깨어날까 봐 마음을 졸여야 했다. 순례의 길에 준비성 없는 것을 비웃기라도 하듯, 베드버그의 무지막지한 환영식을 치렀다. 가벼운 배낭꾸리기에 급급해서 기본 물품만 간신히 챙겨 넣은 게 내심 염려가 되어 뒤숭숭한 생장피에드포르의 밤은 뜬눈으로 하얗게 지새우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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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오후, 론세스바예스에 도착해서부터 후두둑! 떨어지던 빗방울이 장대비가 되어 쏟아지는 아침, 아무런 준비 없이 주섬주섬 배낭만 챙겨 메고 청년들의 뒤를 따랐다. 순례자 중 마지막으로 알베르게를 나서는 우리에게 오스삐딸레로들이 박수로 배웅해 주었다.
“Buen Camino. Corea!”
“그라씨아스 오스삐딸레로”
여름의 시작을 알리는 빗속을 익숙하지 않은 배낭과 긴 판초우의를 입고 걸어야 하는 것이 아픈 허리에는 무리지만, 바욘에서부터 동행하고 있는 윤상과 경미, 지영이 있어 마음이 든든하다. 노란화살표의 까미노를 따라 너도밤나무숲과 목장 사이로 평평한 길이 이어져 윤상의 뒤를 졸졸 따라가기만 하면 되었다. 얼마나 걸었을까? 배는 고프고 어딘가에 기대어 쉬고 싶은 생각이 간절하지만 쉴 곳은 없고, 줄기차게 내리는 비는 그칠 기미가 없으니 애꿎게 내리는 비가 야속하기만 하다. 빗속에 음산하게 서 있는 바리의 산 니꼴라스교회를 지나고 있는 마을 부르게떼Burguete는 학창시절 읽었던 헤밍웨이의 첫 장편소설 『태양은 또다시 떠오른다』에 등장하는 마을이다. 잠시 후, 길 건너의 바르를 발견한 우리는 구세주를 만난 듯 더욱 잰걸음을 했다.
“올라”
바르에 들어서자 첫 번째 듣는 인사말이다. 아직은 “올라”가 낯설어 “하이!”가 입밖으로 먼저 나온다. 몹시 배가 고파 뭐라도 많이 먹을 것 같았지만 막상 까페 꼰 레체Caffe con leche 한 잔을 마시자 거짓말처럼 배고픔이 사라졌다. 바르에서 잠깐 숨을 돌린 뒤 에너지바 하나를 입에 물고 다시 길을 나섰다. 머잖아 순례자의 하루는 ‘올라’와 ‘부엔 까미노’로 시작해서 ‘부엔 까미노’로 마치게 될 것이다. ‘Buen’은 ‘Good’과 같은 뜻이다. ‘Camino’는 길을 뜻하는 말이니 산띠아고 데 꼼뽀스뗄라로Santiago de Compostela 가는 순례자의 길이 안녕하기를 바라며 좋은 여행이 되라는 인사말이다. 판초우의에 가려져 얼굴은 알지 못해도 각국에서 온 순례자들은 서로를 위해 “부엔 까미노”를 외치며 다시 묵묵히 걷기 시작한다.
“부엔 까미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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깔사디야 데 로스 에르마니요스를 지나 만시야로 가는 길은 스페인에 남은 로마가도Calzada Romana중 하나이다. 까미노에서 로마를 향해 만든 길을 간혹 볼 수 있다. 로마는 스페인의 비옥한 땅에서 얻은 소산물들과 광물들을 동서횡단 길을 통해 로마로 공수했다.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 했던 팍스 로마노! 곳곳에서 로마의 흔적이 모습을 드러낼 때마다 영원한 권력, 영원한 제국이 없음을 일깨워 주는 역사의 교훈을 마주하게 된다.
지평선까지 잇닿은 들에는 밀과 해바라기와 옥수수로 뒤덮여 있지만 아무리 둘러봐도 가옥도 없고 농부도 보이지 않는데 농사는 누가, 어떻게 짓는 것일까? 광활한 들판을 지날 때마다 드는 생각이다. 아침이면 아침이라서 조용하고, 낮에는 시에스따라서 조용하고, 바르에 가면 수다 중인 노인들을 볼 수 있을 뿐 도대체 농사를 지을 만한 사람들은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는다. 추수의 계절이 되면 수확하는 사람들로 활기찬 들판을 볼 수 있을까? 하루 종일 걷는 일 밖에 할 게 없으니 괜한 것까지 궁금해진다. 드디어 길 건너편에서 옥수수 밭고랑을 정리하는 트랙터를 발견했다. 아무 상관도 없는 일에 궁금한 것이 많아 기계 하나에 놀라서 신이 났다. 일상이 단순해지니 눈에 보이는 것마다 소중하게 보이고 사색도 풍부해진다. 깔사다 델 꼬또Calzada del Coto의 갈림길에서, 센다를 따라 이어지는 엘 부르고 라네로El Burgo Lanero를 가기 위해 왼쪽 길을 따라간다. 만약에 사아군에서 깔사디야 데 로스 에르마니요스를 거쳐 만시야 데 라스 물라스로 가는 로마가도를 걷고 싶다면, 10킬로 이상을 더 걸을 수 있는 체력과 넉넉한 물을 준비를 준비해야 낭패를 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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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리시아지방의 특징이 목축인 만큼, 하루 종일 대지를 달궈대는 태양의 무자비함 앞에 가축의 분뇨 냄새가 역하게 진동한다. 소들이 방목해 있는 목초지를 지나 까미노를 걷는 것은, 더위보다 더욱 고통스럽다. 평생 맡아보기 힘든 분뇨 냄새를 몸서리치게 맡은 갈리시아다. 유칼립투스 숲으로 들어서자 어디선가 향기로운 바람이 불었다. 아무리 둘러봐도 꽃은 없고 나무만 울창한데, 단 한 번도 맡아본 적이 없는 향기라니, 황홀함을 주는 향기가 도대체 어디로부터 불어오는 것인가? 미스터리하다. 많은 순례자들이 알베르게에 자리 잡았을 늦은 시간, 키 큰 나무들로 빼곡한 숲에서 홀로 향기에 취해 걷는다. 숲으로 들어서기 직전까지만 해도 역한 냄새 때문에 진저리를 쳤는데 말이다. 갈리시아지방의 가축똥 냄새를 잊게 해준 신비한 묘약이라고 밖에 설명할 방법이 없다.
“아름다운 갈리시아여! 가축 똥만 아니라면 얼마나 좋을 텐가!”
한 시간을 족히 걸었다. 산 훌리안San Xulian에서 만난 바르 주인장은 “이 시간에 12킬로미터는 아주 멀게 느껴지는, 고통스러운 거리”라는 것이다. 앞으로도 3시간을 더 걸어야 한다고요?! 오늘 저녁은 반드시 멜리데의 뿔뽀를 먹겠다고 왔는데 이런 낭패가! 그나마 나은 소식은 산 훌리안에 내가 잠잘 수 있는 침대가 남아 있다는 것이다. 허탈한 심정에 배낭을 풀었지만 바람이 불면 집게가 없이 널린 옷 중 하나는, 똥 위에 떨어질지도 모른다는 걱정까지 해야 한다. 굴러다니는 게 가축 똥이니 말이다.
---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