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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비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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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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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일 2012년 04월 12일
쪽수, 무게, 크기 336쪽 | 139*200*30mm
ISBN13 9788996864318
ISBN10 8996864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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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1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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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말은 내가 중학교 3학년일 때까지 집에 있었다. 내가 저를 핍박하고 서러움 줄 때 그는 이미 늙어 있었다. 그가 죽던 마지막 모습도 그랬다. 말굽을 박았는데도 공사장에서 벽돌을 내릴 때 땅에서 바로 선 대못을 밟아 오른쪽 앞다리부터 못쓰게 되더니 한 해 겨울을 늘 구부린 채 서서 앓다가 어느 날 배를 땅에 대고 만 것이었다. 알리지 않았는데도 어떻게 알고 시내의 마부들이 마차를 끌고 와 죽은 그를 싣고 내려갔다. 아부제는 따라가지 않았다. 마부들이 그럼 저녁때 고기라도 보낼까, 하고 묻자 아부제는 그러지 말라고 했다. 작은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이후 그날 처음으로 나는 남몰래 감추는 아부제의 눈물을 보았다.---「말을 찾아서」 중에서

왜 하필이면 길을 바꾸어 떠난 곳이 지도에도 나오지 않는 은비령이었을까. 바다로 가는 길을 눈을 보러 가는 길로 바꾸고, 눈을 보러 가선 또 별을 가슴에 담고 돌아온 그 여행길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별처럼 여자는 2천 5백만 년 후 다시 내게로 오겠다고 했다. 나도 같은 약속을 여자에게 했다. 벗어나면 아득해도 은비령에서 그것은 긴 시간이 아니었다. 어쩌면 그때 은비령 너머의 세상은 깜깜하게 멈추어 서고, 나는 2천 5백만 년보다 더 긴 시간을 그곳에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아니, 그보다 이제 겨우 다섯 달이 지난 2천 5백만 년 후 우리는 그 약속을 지킬 수 있을까.---「은비령」 중에서

돌아보면 쉽게 풀 수 없는 매듭으로 꽁꽁 묶이고 헝클어진 시간들이었지만, 그 헝클어짐의 시작은 지극히 작고 사소했다. 심심해서, 너무도 심심하고 무료해서 사람을 죽였다거나, 햇살이, 눈(目) 위의 햇살이 너무도 강렬해, 그 강렬함을 참을 수 없어 사람을 죽였다는 이야기에 비하면 우리의 별거는 그 시작이 아무리 작고 사소해도 아주 납득하지 못할 일은 아닌 것 같았다. 어쩌면 나는 쳇바퀴를 돌리기 싫었거나 다른 쳇바퀴를 돌리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자존심 때문에 직접 말을 못 담아 그렇지 나중엔 아내도 그렇고, 어머니도 그 다른 쳇바퀴를 다른 여자로 생각하는 것 같았다. 여러 번 그렇지 않다고 해도 어머니와 전화를 하면 매번 마지막 물음은 다른 여자를 보고 있지 않느냐는 것이었다.---「수색, 그 물빛 무늬를 찾아서」 중에서

작가마다 자신의 목숨이 다하는 날까지, 아니 그 목숨이 다한 이후까지도 자신의 분신처럼 살아남아 늘 독자의 부름을 받았으면 하는 책이 있다. 물론 과한 욕심인 줄은 안다. 그러나 내겐 이 책 『은비령』이 그렇다. 내가 내 고향 강원도의 이름 없는 한 고개에 대하여 ‘은비령’이란 이름을 붙이고 소설을 쓴 다음 그곳에 ‘은비령 길’과 ‘은비령 동네’가 새로 생겼듯 이 소설집 역시 그 길처럼 나와 내 이웃에게 영원했으면 좋겠다.
---「작가의 말」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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