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기 때문에 변해가는 것들이 있다. 너를 기다리며 주머니 속에서 굴리는 동전의 온기. 시큰둥하게 말라가는 사과 한 쪽과 끝까지 마른 제 잎을 부둥켜안고 있는 산세베리아. 좀처럼 건조함을 이기지 못하는 너의 목소리와 두 손. 이를테면 사랑, 이별, 관계 같은 말들이 갖고 있는 온도의 차이.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오는 새로운 계절의 냄새. 냉장고에 들어앉은, 이틀 후면 마실 수 없게 되는 우유와 주스. 다음 달이면 쓸모를 잃을 일 년짜리 오픈 티켓. 이 공기가 한 번 더 바뀌기 전에 나는 떠나야 한다. 그때가 오면, 지금 이 마음은 사라지고 없을지도 모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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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으로 나의 지난 서른한 해를 꼬옥 안아봤다. 잘했다. 잘하고 있다. 내게, 나에게 이야기해준다. 일분일초 소중하지 않을 수 없는, 고마워하며 살기에도 모자란 이토록 사소하고 소중한, 내 생의 모든 순간. 살아 있다. 고맙다. 정말이지 고맙다. 이토록 사소하고 소중한, 내 생의 모든 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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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도의 경계를 넘나들며 달라지는 나무 수종과 지붕의 모양들. 하늘의 빛깔, 사람들의 말투 그 미세한 높낮이, 눈가에 와 닿는 햇살의 무게. 두근거림, 기분 좋은 피곤함, 나른함에 뒤섞인 흥분. 자꾸만 생각나는 한 사람을 가슴속에 다시 밀어 넣으며 빼꼼히 열어보는 작은 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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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에 아이 둘을 낳고, 서른넷에 쉬지 않고 밀대를 밀어 만든 국수로 3층 건물을 올리던 여장부는 어디로 간 걸까. 저기, 오후 다섯 시쯤의 햇살 사이로 자그맣고 힘없는 소녀 하나가 앉아 있다. 차마 안아줄 수도 없는 절벽처럼 마르고 가파른 등을 가진 우리 엄마가, 있다. 삶이 두려울 때나 막막함에 다 포기하고 싶을 때마다 나는 덩그러니 홀로 앉은 엄마의 가파른 뒷모습을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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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나이 들어간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 같은 시간을 나누어 살고 각자의 삶을 따로 임과 동시에 함께 임을 느끼며 사는 것. 그가 무엇에 정신이 팔려 있던, 기다려주고, 기다려주는 것. 그렇게 함께 눈감는 순간을 꿈꾸는 것. 그래, 사랑하려면 오래 사랑하자. 오랫동안 곁을 지키고 오랫동안 서로의 짐을 나누어 지고, 먼 훗날 누가 먼저 눈감든 고마웠다고 말하자. 함께 눈감게 되면 또 그렇게 돼서 고맙다고 말하자. 저런 아름다운 뒷모습을 함께 만들고픈 너를, 절대로 놓치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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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록 아름다운 시간을 살고 있는 나를, 무엇에든 미칠 수 있는 나의 지금을, 나는 내가 알고 있는 나보다 사실 더 멋진 사람일지도 몰라요. 우리에게 필요한 건 단 한 가지. 그냥 좋은 전부를 찾으려 하지 말고 진짜 좋은 딱 하나만을 찾는 것. 그것만 기억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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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상처를 받아본 사람은 상처를 주지 않지. 던진 돌에 가슴 한구석을 다쳐본 사람은 남에게 돌을 던지지 않아. 한 번이라도 진실의 눈과 눈이 마주쳐본 사람들은 거짓을 가까이 하지 않지. 이별이란 단어에 생의 한 부분을 베어본 이들은 함부로 이별이란 말을 꺼내지 않아. 그래, 다 그런 거야. 진짜 여행을 만나고 온 자들의 입에서 좀처럼 여행을 엿들을 수 없듯이.
---본문 중에서
사람들의 말을 잘 들어주는 친구가 있고, 자신의 말을 듣게끔 만드는 친구가 있다. 그녀는 묘하게도 그 둘을 모두 갖춘 친구다. 마주 앉은 그녀는 늘 듣는 입장의 친구였지만, 왜일까, 그녀가 쓰는 글은 ‘닥치고 집중’하게 만드는 힘이 있다.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자신의 상처를 이야기하고 나의 별것 아닌 고민을 울며 들어주는 그녀를 보았을 때, 나는 그녀가 치유의 달란트를 가진 작가라는 걸 알았다. 작가란 자신의 이야기를 스스럼없이 다룰 수 있되, 남들의 아픔에 배로 반응하는 예민한 가슴을 가진 사람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언젠가, 정말 지긋지긋하게도 외로워한다, 라고 그녀에게 면박을 준 적이 있다. ‘외로움의 아이콘’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연애를 하든 말든 끊임없이 외로워하고 그리워하는 친구였기 때문에. 하지만 이 책에서 나는 그 ‘외로움’이 그녀를 작가로 살아가게 하는 힘이라는 걸 알았다. 따뜻한 외로움. 그래, 떠나온 자의 최고의 무기는 어쩌면 혼자라는 사실일지도 모른다. 이라는 겁 많고 외로움 많은 장연정과 ‘여행 에세이’라니. 그토록 모순적일 수 있을까 싶은 이 조합은, 그녀가 아니었다면 보고 느끼지 못했을 이야기들로 가득 차 있다. 혼자이기에 볼 수 있는 것들, 외롭기 때문에 가야만 했던 곳들, 그립기 때문에 느낄 수 있었던 것들. 산다는 건 외로운 거라는 당연한 전제를 놓고, 그녀는 외롭다는 것이 얼마나 멋진 일인지 가르쳐준다. 장연정, 그녀는 겁 많은 여행가이다.
김이나 (아이유 <좋은 날> <너랑 나> 작사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