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일야화의 천 세 번째 이야기
--- 99/11/8 이희인(heen@ktcf.co.kr)
19세기 미국은 내게 있어 음산하고 을씨년스런 풍경들로 일렁인다. <백경>의 절름발이 에이헤브 선장이나 괴수 모비딕이 풍기는 이미지, <주홍글씨>의 어둡고 죄악에 가득찬 분위기, 포크너가 재현해 낸 19세기 퇴락한 남부 풍경들이 그렇다.
개척해야만 할 넓고 광활한 두려움의 땅, 언제 어디서 위협해올 지 모르는 잔인하고 신비스런 인디언의 존재, 콜럼버스의 배를 타고 함께 들어온 유럽의 살벌한 종교적 풍습들... 이런 것들이 복합적으로 뒤섞인 공기가 19세기 미국에 흐르고 있다. 만약 시간 여행이 가능하다면, 나는 19세기 황량한 미국 대륙에 한 번쯤 가보고 싶다.
이러한 수상한 대기 한가운데 포(Poe)가 서 있음은 두 말 할 나위가 없다. 19세기 미국 풍경을 실감나게 묘파한 작가를 꼽으라면 단연 포가 꼽힐 것이다. 아울러 인간 내면의 어두운 부분을 가장 훤히 들여다보고 들춰낸 작가를 들라면 그 역시 포를 꼽을 수 있다.
서스펜스 스릴러 영화의 거장 히치콕이 프랑스 시네마테크 아이들에 의해 뒤늦게 조명을 받았듯이, 포 역시 그의 사후에 근대 문학을 개척한 파리 젊은 시인들 - 보들레르, 말라르메 등 -에 의해 빛을 보기 시작했다. 포가 활동한 당시로서는 그의 작품들이 너무 앞서갔거나 쉽게 이해되지 않았을 것이다. 더욱 놀라운 것은 20세기 후반, 이제는 무시할 수 없는 흐름을 형성하고 있는 SF나 판타지, 호러 문학의 비조(鼻祖) 자리에 어김없이 포가 있다는 것이다. 포의 세계는 그 만큼 넓디 넓으며, 언제나 얼마 만큼씩 앞서 있다. 포가 없는 스티븐 킹은 상상할 수 없다고 혹자는 말하기도 한다.
그러한 에드거 앨런 포가 우리에게 돌아왔다. 돌아왔다고 말하는 것은 그의 진면목에 비해 포가 비교적 외면당했거나 꽤 소홀히 취급되었다는 생각에서다. 이번에 네 권으로 출판되는 포의 단편전집을 보면 이러한 생각은 확연해진다. 먼저 출판된 1권 <판타지>와 2권 <풍자>의 목차만 보아도 이제껏 들어보지 못한 생소한 제목들로 채워져 있다. 책 속으로 들어가 보면 왜 이런 작품들이 이제까지 출판되지 않았을까 의아할 지경이다.
1권 <판타지>로 묶인 작품들을 접하고 놀라게 되는 것은 음울하고 파괴적인 작품들과 그 자신 매우 불행한 삶을 살다간 염세주의자로서의 포가 아니라, 당대 과학적 이론과 사실에 밝은 합리적인 천재로서의 포를 발견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미 '황금벌레' 등을 통해 그의 집요한 면모와 과학적인 방법론 등에 혀를 내두른 경험을 우리는 가지고 있다.
과학과 수학의 천재 포를 만날 수 있는 것으로 '한스 팔의 환상 여행' 같은 작품은 단연 돋보인다. 열기구를 타고 달나라로 떠난 한스 팔이라는 대장장이의 모험담 형식인데, 지구의 대기나 달에 대한 당대 과학 지식이 백과사전적인 위용을 가지고 망라되어 있다. 열기구를 타고 점차 고도를 높임에 따라 겪게 될 상황이라든가 대기권 밖을 벗어날 경우 예상되는 문제들이 수학과 과학의 외피를 입고 현란한 상상력으로 추진되고 있다. 당연히 엉터리 같은 논리임에도 불구하고 당대 과학적 지식을 섭렵하고 그 위에 천의무봉한 상상의 나래를 펼친 작가의 천재성에 그저 감탄할 뿐이다.
흔히 포의 유일한 장편 '아서 고든 핌 이야기'가 메리 셀리의 '프랑켄슈타인'을 잇는 SF(과학소설) 문학사의 초기 대표작으로 일컬어지는데, 이 작품 '한스 팔의 환상 여행' 역시 SF의 초기작으로 보아 무방할 듯싶다. 오늘날의 잣대로 보면 꽤 엉터리 같지만 어쨌든 여하한 과학적 노력의 산물이라는 점, 현재에 쓰여지는 SF들도 결국 먼훗날에는 엉터리로 판명날 소지가 얼마든지 있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한스 팔의 환상여행' 과 같이 열기구를 타고 대서양을 횡단한 무용담인 '열기구 보고서' 도 판타지라기 보다는 SF 쪽에 기운다. 포는 분명 하늘을 동경했던 사나이였음에 틀림없다.
거칠 것 없는 판타지의 세계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작품은 '천일야화의 천 두 번째 이야기'가 꼽힌다. 얼핏 돈키호테나 셰익스피어 등을 재기발랄하게 비튼 보르헤스 식 단편들을 연상케 하는 작품인데 여기에는 판타지의 특성 외에도 포의 문학관이랄지 하는 것의 편린을 엿볼 수 있다. 우선 그 착상부터가 기발한데, 천 하루 동안의 이야기를 엮은 천일야화(아라비안나이트')의 그 다음날 이야기라는 형식을 취하고 있는 게 재밌다.
작품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두서없는 상상 속 지명과 기괴한 괴물들의 묘사는 말 그대로 환상 속에서나 보았을 법한 진풍경들이다. 이는 중국의 기서 <산해경>이나 보르헤스의 <상상 동물 이야기>에 다름 아니다. 작품 결말에서 천 하루 밤 동안 재미있는 이야기로써 목숨을 연명한 세헤라자데가 천 두 번째 날 기괴한 판타지를 들려줌으로 인해 왕에게 죽임을 당한다는 내용은 눈여겨 볼 만하다.
바로 그 전날 밤보다 더 재밌는 얘기를 들려주지 못하면 목이 달아날 운명에 처해 있는 여주인공 세헤라자데의 존재를 두고 그것이 작가가 가지는 창작의 고통에 대한 은유라고 말하는 평론가도 있거니와, 포는 한 발 더 나아가 이야기꾼을 죽임으로써 아직 남아있는 재밌는 이야기들을 듣지 못하게 되는 것이 말살자에 대한 복수라는, 꽤 재치있는 발언을 하고 있다. 이로써 천일야화의 천 세 번째 날 이야기는 지상의 밤에서 영원히 사라지고 왕에게는 암흑 같은 여생만이 남을 것이다.
대저 천 두 번째 밤 이야기가 하필 현란하고 기괴한 판타지라는 점, 이야기를 말살하는 행위가 말살자 스스로에 대한 치명적인 보복이라는 발언 등 서사에 대한 의미심장한 비유가 작품 결말에 함축되어 있다. 첨단 테크놀러지의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는 천일야화의 천 세 번째 날 밤 이야기를 듣고자 하는 사람들일는지 자문해 볼 만하다.
<판타지>에 묶인 나머지 작품들은 서정적이고 탐미적인 취향을 보인다는 점에서 포의 널리 알려진 작품들과 그다지 다르지 않다. '엘레오노라'에서 우리는 '에너벨리'나 '헬렌에게' 같은 시의 정조를 다시금 환기시킬 수 있고, '타원형 초상화'에서는 '어셔가의 몰락'에서 본 기괴한 그림과 다시 한 번 대면하게 된다. 페스트를 의인화한 '페스트 대왕'에서는 또다른 전염병을 의인화한 '붉은 죽음의 가면극'이 재현되고 있다. 때때로, 작가의 습작품이 아닐까 하는(분량의 문제가 아니다!!) 작품들도 간간히 눈에 띄지만 대체로 포 특유의 탐미성이 작품집 전편에 관통하고 있다.
유일한 장편 '아서 고든 핌 이야기'를 제외한 포의 소설들이 네 권 분량으로 전부 묶일 이번 전집을 통해 널리 알려진 공포 추리 문학 작품들 뿐만 아니라 다양한 장르의 문학적 실험과 상상력을 시도한 단편 소설의 귀재로서 포의 진면목을 만나 볼 수 있을 것이다.
아직 출간되지 않은 3권 <미스터리>나, 4권 <공포>을 통해 포의 비교적 알려진 작품들을 다시 만나는 기쁨도 아울러 맛보게 될 것이다. '고자질 하는 심장'이나 '윌리엄 윌슨', '도둑맞은 편지', '모르그가의 살인' 같은 명편들이 묶일 3, 4권이 자못 기다려진다. 그 외에 또 어떤 작품들이 우리를 찾아오고 있을까?
포는 아직 우리를 향해 오고 있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