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루게릭 병이라고 확신해요.” “정말 알고 싶으신가요?”
“아니, 알고 싶지 않은 것 같아요.” 나는 자신 없이 대답한다. “오늘은 제 생일이고 파티를 여는 날이니까요.”
“오, 그렇군요! 쉰 살 생일선물로는 엄청납니다.” “그 말은 제가 루게릭 병에 걸렸단 뜻인가요?”
“그래요. 아니면 특이한 종류의 파킨슨 병일 수도 있고요.”
...... 나는 오늘 파티에서 반드시 해야 할 일 한 가지를 더 적는다.
아무에게도 오늘 일을 말하지 않기, 재미있게 즐기고 고통은 내일로 미뤄두기.
--- pp.43~44
예기치 않은 일이 생기지 않는 한 나는 루게릭 병 때문에 죽을 것이다. 내가 택할 길은 두 갈래뿐이다. 드러누워서 비통한 심정으로 죽음을 기다리거나 이 불행한 상황에서 가치있는 무엇인가를 만들어내는 것, 이 둘 중 하나를 택해야 한다. 진부하게 들릴지 모르겠으나 나는 긍정적으로 모든 것을 바라보기로 했다. 내가 갈 길은 두 번째 길인 것이다. 나는 지금 마주하고 있는 이 순간을 살아야 한다. 내게 밝은 미래란 없다. 그러나 밝은 현재는 있지 않은가. 어린아이들은 이렇게 오직 현재만을 살아간다. 나중에 오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러므로 나는 어린아이처럼 웃는다. 주체할 수 없을 만큼......
그동안 나는 성인으로서의 내 삶이 종국에는 괜찮을 거라고 생각해왔다. 우선 앞에 닥친 일들을 해결해놓으면 결국 내 삶 전체가 괜찮아질 거라고,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이런 식의 생각을 더 이상은 할 수 없게 되었다. 이상한 것은 요즘, 내가 불치병을 앓고 있는 지금에 와서 아주 기쁜 순간을 만끽한다는 것이다. 예전에는 느껴본 적이 없는 그런 기쁨을. 지금까지 내게 있어서 행복은 한결같은 그 무엇이 아니었다. 그러나 이제는 행복이 변하지 않는 무엇으로 되어가고 있다. 그것이 내가 웃는 이유다. 그리고 이런 변화가 연수마비와 관계가 있다면, 그렇다면 그것은 루게릭 병이 내게 안겨준 축복일 것이다.
--- pp.97~98
“엄마, 일 초에 한 번씩 사는 거야.” 구스타프가 살며시 속삭인다.
“뭐라고 했니?” “일 초에 한 번씩 산다고.” “어디서 그런 말을 들었어?”
“아무 데서도 안 들었는데? 지금 그냥 생각해낸 거지.” 구스타프는 계속 말을 이어간다.
“그러니까 엄만 앞으로 백만 번, 천만 번 더 살게 되는 셈이야.”
“그래, 일 초에 한 번씩, 모든 순간이 삶이지.......” 내가 아들의 말을 따라 되뇌인다.
--- pp.118~119
폰투스는 우리끼리 눈을 깜박이며 나눌 수 있는 말을 만들어보고 싶어한다.
“엄마, 눈을 세 번 깜박이면 ‘사랑해’란 뜻이야. 알았죠?”
폰투스는 눈을 세 번 깜박인다. 나도 폰투스를 쳐다보며 눈을 세 번 깜박여준다.
그런데 깜박이는 내 눈꺼풀 사이로 흘러내리는 눈물을 주체할 수가 없다.
“엄마, 두 번 깜박 하는 건 ‘응’이란 뜻이고, 한 번 길게 깜박 하면 ‘아니야’란 뜻이야.”
폰투스가 앞으로 연습을 무척 많이 하게 될 거라고 말해서 나는 눈을 두 번 깜박여주었다.
--- p.1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