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소설은 방대하다. 하나의 흥미로운 포인트를 잡아 살을 붙여 한 편의 영화로 만들기에 적당한 정도의 분량으로 만들어진 작품이 주류를 이루는 요즘의 시장 상황을 고려해 보면 이 작품은 특이하다. 이 방대함은 소설의 세계관에서 비롯한다.
- 이 소설은 다양한 시대를 배경으로 한다. 현재, 가까운 미래, 11~13 세기, 16~17 세기에 걸쳐 진행되는 사건들.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에 의해 연결된다.
- 이 소설은 다양한 분야의 지식을 언급하고 있다. 철학, 종교, 역사 및 인문학, 사회과학 관련 부분에 더해 과학에 대한 개념 이해를 요구한다. 일반적이지 않은 용어가 나오는 경우 각주를 통해 설명을 제공했다.
하나의 소설/영화라기보다는 몇 편의 연결된 에피소드로 구성되어 있는 미국 드라마의 한 시즌 정도의 느낌을 가지고 이 이야기를 대하는 것이 독자에게 적절한 수준의 기대감이라 하겠다. 이 책의 심오한 세계관은 다양한 이야기를 가능하게 하는 비옥한 토양이며, 그 결과물인 이 이야기는 소설로서의 재미에 더해 우리 앞에 도래한 변화무쌍할 미래 세상에서의 생존에 대해 생각해 보게 한다.
---「일러두기」중에서
“철학자가 이런 폭력조직의 창시자였다는 말인가요?”
“그렇다네. 폭력은 그들의 수단이지만 그들이 추구하는 바는 철학적일 수 있지 않겠는가?”
“그렇긴 하지요.”
“그런 조직이 하나둘이겠나. 역사에는 그런 이들 투성이라네.”
[중략]
두란 신부가 오믈렛이 적당히 먹기 좋은 온도로 식은 듯 하자 포크로 잘라 먹기 시작하며 말했다.
“역사는 그런 이들 투성이이고, 예전의 왕이나 고위 성직자들은 사실 대개 다 그런 부류라고 해도 틀릴 것이 없네. 폭력 조직의 우두머리이고 나름의 철학을 가지고 있고 말일세.”
“그렇게 본다면 그렇군요. 하지만 그들을 학자라고 하지는 않지요. 저는 그런 측면에서 말한 것이에요.”
“그렇군. 자신이 가진 철학을 행동으로 옮기는 자인가 공부 삼아 하는 자인가 그 차이라는 얘긴가?”
“뭐, 그런 셈이죠.” --- p.162
재빨리 칼을 회수한 마이클이 막사의 입구로 뛰어들어갔다. 그의 목표는 이 지역의 십자군 지휘관으로 이 진영의 최고 책임자였다. 마이클이 지휘관을 노리는 사이 그의 등 뒤를 지켜 줄 것은 같이 들어간 동료였다. 그사이 뒤따라오던 두 사람이 경비병의 자리를 대신하고 입구를 봉쇄하였다. 마이클이 뛰어들어가자 여기저기서 뒹굴어 자고 있던 병사들이 깨어나기 시작했다. 마이클은 그들을 무시하고 막사 안쪽의 지휘관 침상으로 달려들었다. 막 잠에서 깨어난 지휘관은 마이클의 템플라 십자가를 보며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다가 이내 정신을 차린 듯 그의 검을 집어 들며 일어나려 했다. 그러나 이미 마이클의 검이 그의 심장을 꿰뚫고 있었다. 깨어난 병사 중 재빠른 자들이 마이클의 옆구리를 노리며 달려드는 것이 곁눈질로 보였으나, 마이클은 그들을 무시하고 그의 검이 정확히 심장을 파고든 것을 느낌으로 확인하며 …… --- p.235
O는 가브리엘의 말이 그대로 받아들여지지 않았으나 그에게서 더 많은 이야기를 듣기는 틀렸다는 생각이 들어 착잡하였다. 무엇인가 더 많은 것이 있다고 기대했다가 실망한 것일 수도 있었다. 이 감정이 무엇인가 정리해 보려고 하고 있는데 가브리엘이 말을 이어 갔다.
“O, 기적의 힘으로 무장한 전사들이 교회 내에서 활동하고 있다는 것은 비밀이네. 자네가 본 것을 다른 이에게 절대로 이야기해서는 안 될 것이네. 자네가 그 부분을 지키겠다고 약속을 해야만 나도 자네의 안전을 보장할 수가 있네.”
“비밀을 지키도록 하겠습니다.”
O는 아직 스스로 믿음이 가지 않는 이야기를 남에게 할 생각이 없었으므로 비밀을 지키겠다고 순순히 약속했다. 마씨모가 떠나 버린 지금 가브리엘만이 그를 암살자들에게서 지켜 줄 수 있는 방패막이가 될 수 있을 것이었다.
“비밀로 하는 이유는 여러 가지이나, 가장 큰 이유는, 많은 이들이 그러한 힘이 지키고자 하는 가치에 주목하기보다는 그 힘 자체에 매료되기 때문이네. 그것은 우리가 바라는 바가 아닐세. 자네도 서품을 받은 사제이니 내가 하는 말이 무엇인지 이해할 수 있을 것이네. 교리에 천사를 숭배하지 말라고 되어 있는 것과 같은 선상의 이유라고 이해할 수 있을 것이네.”
“그럴 수 있겠지요, 이해합니다. 언제나 가브리엘 님이 특별한 분인 것 같다는 생각은 하고 있었지만 기적의 힘으로 무장하고 있는 성인이셨는지는 몰랐습니다. 저를 잘 이끌어 주시기 부탁드립니다.”
“성인이라, 그것은 살아 있는 이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호칭이고, 자네 같은 가톨릭 사제가 속인들이 사용하듯 그렇게 말하면 안 되겠지. 나는 그저 교회의 일을 돕는 사람일세. 자네의 안전에 대해서는 걱정하지 말고 자네에게 주어진 임무를 성실히 수행하고 있도록 하게.” --- p.291~292
르네는 성당 안으로 들어갔다. 들어가자 바로 성당의 한 가운데 위치한 구조물이 눈에 띄었다. 특이하게도 성당 내부에 또 하나의 건물이 있었다. 그러나 이 성당은 사실 그 건물 때문에 지어진 것이니, 그 사정을 알고 본다면 이상할 것이 없었다. 하얀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이층 높이가 넘어 보이는 네모 반듯한 건물이었다. 실제 산타 카사는 그 건물 안에 있다고 하였다. 대리석 벽은 성스러운 집을 보호하기 위해 집 주변에 둘러쳐져 있었고, 각종 부조로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었다. 문을 통해 들어가면 나자렛에서 옮겨 온 건물의 안 쪽으로 들어갈 수 있게 되어 있었다. 원래의 집은 나자렛에서 흔히 쓰이는 건축 소재인 평범한 사암으로 만든 작은 돌 집이었다. 8.5m x 3.8m의 작은 공간으로, 벽의 아래쪽 3~4m 정도는 나자렛에서 가져온 벽이고, 위쪽의 벽돌들은 이곳에서 더해진 듯 다른 모습이었다. 한 쪽 면에는 이 역시 후에 더해진 것으로 아기 예수를 안고 있는 성모상을 모셔 놓은 작은 예배당 공간이 있었다. 나자렛에서 가져왔다는 부분은 바깥의 화려한 장식에 비해서 너무나도 소박하고, 전체 면적은 매우 협소한 공간이었다. 이 작은 공간 내에서 성모 마리아가 태어나고, 자라고, 천사 가브리엘의 방문을 받고, 어린 예수를 키웠다는 생각을 하니 경건한 느낌이 들어 기도하고 싶은 마음이 절로 솟아났다. 성스러운 집의 소박하다 못해 초라함은 성당 내의 많은 아름다운 장식물과 그림에 대비하여 더욱 강렬하게 다가왔다. 잠시 묵상에 잠겼던 르네는 이런 성스러운 곳과 방문자들 간에 어떤 연관이 있는 것일까 ……
--- p.359~36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