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유학의 근간을 이룬 문장(37p)
전통적으로 시는 정치 현실과 매우 밀접한 연관을 갖는 존재로 개인적 감흥을 표현하는 수단일 뿐만 아니라 치도(治道)를 위한 유용한 도구로 인식되었다.
“시 삼백 편을 외우면서도 정치를 맡아 제대로 해내지 못하고, 사방에 사신으로 나가 혼자 해결하지 못한다면, 비록 시를 많이 외운다 한들 어디에 쓰겠는가?” - 『논어』 「자로」
1-2 문장으로 나라를 경륜하다(56p)
“우리나라가 명나라를 섬긴 후로 표전(表箋)의 글은 대부분 이숭인(李崇仁)의 손으로 지어졌다. 공민왕(恭愍王)이 시호를 얻고, 상왕(上王)이 부조(父祖)의 봉작(封爵)을 이어받은 것 모두 이숭인이 지은 문장의 힘이었다. 해마다 보내는 세공(歲貢)에 금·은·말·베를 면제받은 것도 역시 이숭인의 (문장의) 힘이었으며, 황제께서 여러 번 문장의 아름다움을 칭찬하면서 우리나라에 인물이 있다고 한 것도 역시 이숭인의 (문장의) 공(功)이었다.” - 『고려사절요』 34권 공양왕 원년(1389)
1-2 문장으로 나라를 경륜하다(68p)
옛사람의 말에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 것이 셋 있으니, 덕(德)을 세우는 것과 공(功)을 세우는 것과 말(言)을 세우는 것이다.” 했다. ... 덕을 세우는 것을 학(學)이라 하고 말을 세우는 것을 문(文)이라 하는데, 말이 문장을 이루면 이 또한 사문(斯文)에 공이 있는 것이니, 덕과 공과 말은 셋이 서로 연관되어 하나일 뿐이다. - 서거정(徐居正), 「태허정집서」
1-3. 외교의 일등공신, 문장(95p)
문장이 비록 경학에 비하면 못하지만, 문장은 실로 문신의 날개가 되니 말단이라고 할 수만은 없습니다. 문장을 하지 않은 현인(賢人)은 없기 때문에 나라의 문치(文治)는 반드시 문장에 힘입어 일어났던 것입니다. ... 중국에서 우리나라를 예의의 나라라고 하는 것은 오로지 문장 때문입니다. - 김안로(金安老) 『중종실록』 중종 28년(1533) 4월 13일
1-3. 외교의 일등공신, 문장(103p)
사신은 논한다. 문(文)과 질(質)이 빈빈(彬彬)해야 군자라 한다. 문이 우세한 것은 본디 질이 우세한 것만 못하다. 그러나 문과 질이 다 망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문을 보존하여(存文) 질을 붙게 하는(寓質) 것이 나을 것이다. - 『중종실록』 중종 37년(1542) 11월 1일
2-1 임진왜란을 극복하다.(118-119p)
전근대 혹은 근대는 물론 현대 사회 모두 대규모의 상비군(常備軍)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막대한 경제적 지출과 인적 징발이 필요하다. 한반도는 중국이라는 최고의 강대국과 인접한 지정학적 이유로 인해 오랜 시간을 거치며 ‘외교’라는 수단을 통해 최소한의 사회적 비용으로 국가 방위전략을 마련했다. ... 조선은 국초부터 외교를 통한 국가 안보에 관심이 많았고, 당연히 외교에 무엇보다 예민하고 신속하게 응대할 수 있는 다양한 방안 마련에 고심했다. 전쟁 기간 중 명의 장수들을 접반(接伴)하거나 전략적 문제를 협의하는 과정에서 문한 활동은 전투에서의 군사적 활동에 못지않은 중요한 일로 간주했다. 조선의 문인 중 문한에 뛰어난 인물들의 문장력이 전쟁 기간 중 빛을 발하게 되는 근본적인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2-1 임진왜란을 극복하다.(121p)
선조는 곡진하면서도 간결하고 속되지 않은 글을 구사하는 이정구가 정응태의 무고를 해결할 수 있는 최고의 적임자라고 확신했다. 이미 자신의 곁에서 여러 차례 문장력과 중국어 실력을 선보였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예측할 수 없는 돌발상황이 벌어질 수 있는 사행과 변무의 과정에서 이정구의 풍부한 지혜와 계책 역시 무엇보다 큰 장점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2-3 문형에 오르다(167p)
이식은 선조대에 명나라 사신 웅화를 접반한 이정구의 예를 거론하며 중국의 예법과 조선의 예법을 적절히 조화시킬 것을 주장했다. 사신을 맞이하는 일 중에서 각별히 신중해야 하는 것이 다양한 의례적 절차 문제였는데, 이식은 웅화를 접반한 이정구를 모범적인 전례로 거론하며 잘못된 일들을 바로잡고자 했다.
2-4 병자호란과 외교활동(178p)
국왕 인조가 강화의 자리에 직접 참여하는 문제를 두고 협상 테이블에서 장유가 강력하게 반대하자 유해가 주장을 굽혔다. 유해는 이 일을 두고 이후에도 줄곧 조선이 외교 현장에서 체통 있는 모습을 지켰다고 이야기했다. 조선 시대 외교의 현장에서 전례(典禮)의 문제는 국가적 자존심이 걸린 중요한 문제였고, 그러한 일을 해결하기 위해 문장력을 지닌 인재가 필요했음을 알 수 있다.
2-4 병자호란과 외교활동(189p)
한 시대의 문풍(文風: 글을 숭상하는 풍습)과 선비들의 취향이 문형에 의해 좌우된다는 서명응(徐命膺)의 지적처럼 문형은 한 나라의 문한을 총괄하는 막중한 임무를 부여받은 직책이었다. 특히 명·청 교체기의 위기에 처해 있던 조선으로서는 가능한 모든 수단을 동원해 외교에 치중해야 했고, 당시의 문형 선발은 국가의 존망과 직결된 문제로써 최고의 극선(極選: 매우 정밀하게 잘 골라 뽑음)일 수밖에 없었다.
3-2 영원한 문장의 가치(236p)
“동파(소식)는 호걸(豪傑)의 선비이다. 개보(介甫: 왕안석)가 정권을 잡고 있을 때 한 패거리가 되려 하지 않은 것은 평소의 행동을 고수함이요, 속수(涑水:사마광)가 (조정에) 들어가 정승이 되었을 때에도 부화뇌동하지 않았으니, 이만하면 ‘화이부동(和而不同)’한 사람이 아니겠는가. 단지 정문(程門: 정이의 제자들)에 죄를 얻은 까닭에 회암(晦庵: 주희)이 힘써 공격했던 것인데, 세상의 유학자들이 마침내 남에게 뒤질세라 배척을 하고 나섰으니, 이는 지나치다고 할 것이다.” - 신흠(申欽) 『상촌고』 권57 「구정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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