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 발길이 드문 삼청동 거리의 평일 오후. ‘카페, 사랑 향기’라고 적힌 목재 현판이 정갈하게 걸린 카페 앞에서, 한 남녀가 카페 이름과는 어울리지 않게 살벌한 기싸움을 벌이고 있다. 영화 홍보사의 ‘대리’라는 직함을 달고 있는 여자 유지희와 톱스타 서강의 ‘매니저’라는 신분을 소유하고 있는 남자 오희건이다.
여자는 제법 고집스러워 보이는 눈으로 날카롭게 질문을 한다.
“쏙쏙 잘도 골라놓으셨네. 왜 빼라는 거예요?”
왜 때문인 거니, 정말. ‘수다와 무비’라는 영화 정보 프로그램 팀과 함께 영화 ‘미혹’의 남자 주인공인 서강의 인터뷰가 곧 들어갈 예정이었다. 그사이 서강의 매니저가 홍보사 담당 마케터인 지희를 황급히 불러낸 것이다. 그리고 어제 손수 컨펌 내린 질문에서 몇 가지를 빼달라며 생떼 비슷한 요청을 하고 있었다.
방송 제작진 측에 오케이 사인까지 보낸 마당에 번복이라니. 면목 없다는 말로 끝날 일은 아니다. 마케터로서의 이미지 실추도 용납 안 되고, 무엇보다 삭제를 요청한 질문들이 홍보 포인트가 되는 핵심 질문이었다.
첫사랑이 언제였냐, 첫 키스는 언제였냐, 이상형은 무엇이냐, 난데없는 이상형 월드컵 등등은 그녀가 봐도 구차스러웠지만, 의례적으로 묻는 질문이기도 했고 ‘스타’라는 인간들은 요리조리 머리 굴려 잘도 피해 가니까. 일단은 구질구질한 질문이라도 스타 서강의 위치에서 답이 나온다면 주목을 끌 수 있었다.
매니저 오 실장은 한결 누그러진 얼굴로 뒷머리를 쓱쓱 훑어 내렸다.
“그게 강 형이 답하기 곤란하시다고…….”
강 형? 얼굴로는 서강보다 형님이면서 나이로는 아우였던 모양이다.
“곤란한 게 아니라 싫다고 하셨겠죠.”
성격이 무난한 편은 아니라고, 아니, 유난스러운 편이라고 소문나신 분이니.
“아…… 저, 아무튼 빼주셨으면…….”
“이것도 빼라 저것도 빼라, 그럼 뭘 질문할까요?”
“영화에 관해서만.”
“아― 따분하게 줄거리 읊어주고, 캐릭터 설명해 주고 끝? 방송 아―주 알차고 재미없겠네요. 천하의 톱스타 서강의 편집 굴욕사를 여기서 목격할 수도 있겠는데요.”
여기서도 저기서도 볼 수 있는 똑같은 말 리플레이, 즉 ‘앵무새 타령’은 다 잘라낼 텐데, 뭐가 남겠는가.
뒷머리를 쓱쓱 쓸어내리던 오 실장의 손길이 ‘퍽퍽’으로 바뀌었다. 다소 거칠다 싶게.
“하…… 그럼 대리님이 설득해 보세요. 나도 강 형이 쉽지 않다구요.”
오죽하면 본인이 케어하는 배우가 쉽지 않다고 할까. 그 성격 오죽하면. 지희의 눈에는 벌써 삐딱한 편견의 콩깍지가 씌었다. 유난 떠는 배우들을 지겹도록 봐온 탓이다.
“내가 나서면, 실장님…… 난감해지지 않아요?”
매니저를 버젓이 세워두고 배우에게, 심지어 톱스타에게 직접 컴플레인이라니. 간이 퉁퉁 부었다고 소문난 그녀도 주춤하게 된다. 오 실장은 성인처럼 초월한 듯, 도인처럼 달관한 듯 포기 선언이다.
“지금도 두 분 사이에서 매우 난감합니다. 어차피 강 형한테 한 소리 들었고, 지금 유 대리님께 한 방 먹었고. 이제 두 사람이 직접 한판하시죠. 난 결론만 따를 테니까.”
꼬리 빼기는. 지희는 소리 없는 한숨을 공중에 불어내고 카페 안으로 발을 옮겼다. 이미 방송팀은 네 대의 카메라와 세 대의 조명을 세팅하기 시작했다. 참, 일사불란도 하게.
매니저와 치렀던 치졸하고 한편 치열한 전쟁을 알고는 있는 건지, 서강은 구석진 자리에서 한가로운 커피 타임을 즐기고 있었다. 그저 커피 한 모금 들이켰을 뿐인데 이곳을 순식간에 CF 현장으로 텔레포트 시키는 남자다. CF 한 편당 몸값이 10억을 훌쩍 넘긴다는 기사를 언제쯤 본 것 같은데. 저 분위기와 아우라가 현재 10억짜리 가치로 매겨지는 셈이다.
지희는 매우 고가의 남자인 서강에게 다가가며 불현듯 생각했다. 아니, 생각이 의지와 상관없이 제멋대로 올라왔다.
‘진짜…… 잘생겼다.’
영화 ‘잡고 싶다’에서 강력계 형사 역할로 드러냈던 야성적인 남성미도 얼굴에 담겨 있었고, 한때 독립 영화 ‘마담’에서 동성애자 역할로 분했을 때, 여자보다 더 예쁘다는 찬사를 받았던 그 아름다움도 존재한다. 소위 남자다우면서 아름답다는 것. 서강의 얼굴에 두 가지가 공존하며 묘한 분위기를 풍긴다. 저 곱고 아름다운 한 마리의 수컷이 카메라를 씹어 먹는 거다.
뿐이랴. 아역배우 출신이면서 모델 출신 배우들을 기죽이게 하는 키와 몸매는 또 어떻고. 그들에게 무릎 끓고 사죄해야 할 수준이다. 그로 인해 노골적으로 잘생긴 남자를 선호하는 ‘얼빠’ 유지희는 다가갈수록 마음이 약해지는 걸 느꼈다.
영화 홍보 일을 시작하면서 손에 꼽히는 대한민국 톱스타들을 멀리서든 가까이에서든 한 번씩 스쳐 봤다. 이젠 어느 정도 경지에 올라서 ‘톱급 배우? 헹, 뭐 어쩌라고’ 하며 콧방귀를 날리고 하산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그동안 거쳐 가고, 스쳐 가고, 지나갔던 톱스타들은 무늬만 ‘톱스타’였을까? 저 사람은 또 다른 경지에 있는 걸까? 하산은커녕 더 높은 경지를 바라보며 오금이 저린다. 서강이라는 톱스타의 아우라에 압도, 아니, 압사당할 것 같다. 하지만 그녀가 오른 경지도 단순하지만은 않다. 온 정신을 집중해 재빨리 득도에 오른다. 혈전을 치르기도 전에 기에 눌릴 순 없으니까. 투쟁해서 이겨야 하니까.
질문을 도마에 오른 횟감 생선처럼 난도질해 버리면, 방송팀한테 그녀는 다 잡은 다금바리를 놓친 대역 죄인이 되지 않겠는가. 이 작품은 어제 서강에게 컨펌도 받지 않고 컨펌받았다고 뻥친 그 꼬리 내뺀 매니저가 만든 것이고, 별거 아닌 질문으로 사람 피곤하게 하는 이 남자, 서강이 그린 것인데.
“서강 씨.”
거만이 덕지덕지 붙어 있는 다리를 꼬아 의자에 앉아 있는 서강을 내려다보며 이름을 불렀다. 앉아 있었지만, 이 남자의 기본 키가 우월했던 탓에 눈높이가 멀진 않았다. 그녀가 살짝 고갤 낮추면 눈이 보였다. 신묘하고 오묘한 남자의 깊은 눈이.
“네.”
담백하고 단조로운 서강의 답변. 지희는 단맛이 폴폴 풍길 것 같은 눈웃음을 얼굴에 장착한다. ‘나 지금 무지 곤란한데, 한 번만 봐주면 안 될까’라고 적힌 짠내 나는 눈빛을 그 위에 얹고.
“현장에서 갑자기 질문을 빼라고 요청하시면, 지금 곧 인터뷰를 진행해야 할 방송팀은 적잖이 당황할 것 같아요. 제 입장도 조금 난처하구요. 여기 이 질문들…… 정말 다 삭제하는 방법밖에 없을까요?”
지희는 ‘돼지꼬리 땡땡’으로 가득 찬 질문지를 내밀어 보였다. 시끌벅적한 가운데 그녀의 말소리는 다행히 현장의 사람들에게까지 번지지 않았다. 서강의 눈은 코앞에 들이닥친 질문지 대신 지희의 어깨 넘어 멀찍이 서 있는 매니저를 향했다. ‘이 정도 일도 제 선에 해결 못 해서 사람 피곤하게 만드냐’라는 질책이 고스란히 박혔다. 깊은 산중의 공기처럼 깨끗하게 울리는 저음이 비로소 서강의 입술을 통해 나왔다.
“죄송하지만 그랬으면 합니다.”
산중 동굴 속처럼 공명하는 듯도 했다.
“아…… 많이 곤란하신 질문들인가요? 그럼, 이 부분 통째 들어내기보다 한두…… 세 가지 정도만 제외하는 걸로 정리하면 어떨까요? 정말 불편하신 질문요.”
많이 봐줬다. ‘한두 가지’에서 급히 ‘한두 세 가지’로 선회했다. 불편한 질문보다 서강의 불편한 시선이 문제였던 탓이다.
챙챙. 서강의 눈에서 또 자신의 눈에서 칼이 나와 부딪히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고요하지만 살벌한 눈싸움이었다. 서강의 입술은 톱스타 특유의 가증한 미소를 물고 있었지만 눈에는 가식이 없었다. 짜증이 읽힐 만큼 솔직했다. 카메라 밖에선 연기가 안 되는 걸까. 아님 이것도 연기일까.
“죄송하지만. 빼주셨으면, 하는데요.”
타협의 여지도 없이, 같은 말만 반복하는 가증스러운 앵무새 입. 이런 탓에 제 눈에 쓰인 삐딱한 콩깍지는 벗겨지지가 않는다. 그나마 ‘제 매니저와 상의하시죠’가 아니어서 다행인 건가.
“이유를 여쭤보면 실례가 될까요? 저도 제작진 측에 핑계 댈 만한…… 합당한 이유가 있어야죠. 명목 같은 거.”
“사생활입니다.”
---「1장 나랑 잘래요?」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