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기에 실재했던 정치 세력으로서의 ‘중간파’는 기회주의적 노선과는 그 성격을 상당히 달리했다. 공정하게 평가하자면, 오히려 한국의 ‘중간파’ 세력은 정치적 신념에 입각한 일관된 특징을 견지했는데, 특히 그들이 최우선 과제로 설정한 남북의 통일 국가 건설이라는 아젠다에 관해서라면 더욱 그러했다. 여운형의 통찰을 참조해보면, “분열해 있는 것은 소위 지도자뿐”이고 민중의 의견은 오히려 공고히 “통일되어 있는” 편이었다(21쪽).
‘중간파’가 과소 재현된 문제는 실재했던 사실이라기보다는 일종의 구조적 ‘착시’ 현상에 가깝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착시 현상이 생겨난 이유는 무엇일까. 일차적으로는 해방기의 ‘중간파’가 대한민국 수립 이후 독자적 조직을 가진 현실 정치 세력으로 계속 성장하지 못했다는 점이 가장 클 것이다. 거기에 보태어, ‘중간파’라는 명칭이 은연중 풍기곤 하는 불가피한 뉘앙스, 즉 좌와 우의 대결 사이에 끼어 부유浮游하는 소수파라는 이미지 역시 적지 않은 요인으로 보인다(24쪽).
김규식과 김구가 중심이 된 1948년 4월의 남북협상 당시 이 협상을 지지하는 문화인 108명이 모여 성명서를 발표한 적이 있는데, 여기에는 다수의 전·현직 언론인들이 참여했다. 성명서에는 염상섭 외에도 설의식(《동아일보》 주간 겸 편집인), 배성룡(《세계일보》 이사 겸 주필), 오기영(언론비평가), 이갑섭(《조선일보》 조사부장 및 주필), 김기림(《현대일보》 편집국장), 정지용(《경향신문》 주필), 신영철(《신민일보》 발행인) 등의 이름이 보인다(27쪽).
‘해방’이란 어떤 면에서는 사실상 이 ‘노동자적-농민’이라는 방대한 빈곤 실업인구, 프랑스 철학자 랑시에르의 용어를 빌려 표현하자면 “몫 없이 배제된 자”들의 동시다발적 귀환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다(64쪽).
미군정은 200만 명이 훨씬 넘는 다수의 귀환-빈곤 대중이 조선공산당과 연계해서 조직화되거나 독자적으로 정치 세력화되는 사태를 몹시 우려했다. 미군정은 귀환자들을 지원하는 남한 시민사회의 자발적인 원호 루트들을 통제하고 여타 단체들을 불법화하는 가운데 지원 창구를 미군정 산하의 공식 단체로 단일화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91쪽).
한국전쟁은 포로 개인의 자유의사를 존중하여 이들이 자신의 국적을 직접 선택할 수 있게 한 이른바 ‘자원 송환Voluntary Repatriation 원칙’이 국제적 논쟁 끝에 도입된 최초의 전쟁이었다(101쪽).
내전으로 한국전쟁을 파악할 경우 전투를 담당하다 포획된 이들은 합법적인 전쟁 수행자로 승인되지 않으며, 이들은 ‘정통성’을 가진 자국 정부에 반하는 ‘반도叛徒’ 내지 ‘폭도’로 규정될 터였다(106쪽).
“우리를 석방하라! 우리를 반공전선으로 보내라!”라는 반공포로들의 일치된 구호에는 실상 생존을 위한 ‘자기 증명’을 초과하는 차원, 생명을 잃을지도 모르는 전장의 위험 속으로까지 스스로를 절박하게 내모는 ‘과잉’이나 ‘잉여’의 주체 구성 영역이 분명 존재하는 것이었다(124쪽).
한국은 아시아·아프리카의 29개국이 대거 회동하는 이 자리에 아예 초대를 받지 못한 몇몇 예외적인 나라들(북한, 타이완, 남아프리카 공화국, 이스라엘) 중 하나였다. 노골적인 정치적 편향성과 인종차별주의, 호전성 등이 아시아·아프리카 국가들로부터 환대를 받을 수 없는 여러 이유들이었다. …… 일본 역시 반둥회의에 초대되었다는 점을 환기한다면, 한국인들에게 이 회의는 굳이 언급하거나 기억하고 싶지 않은 과거였던 것으로 보인다(152쪽).
1960년대 《사상계》에 실린 북한 관련 담론을 주도했던 것은 기존 일 세대 월남 지식인 그룹에 더해 소위 새로운 유형의 ‘월남 귀순자’들이 합세한 형태였다. …… 전자의 경우는 《사상계》의 핵심 편집위원 그룹에 속해 있었던 이들로, 특히 김준엽이나 양호민 등이 대표적이다(190쪽).
북한의 엘리트 계층이었던 이 ‘월남 귀순자’ 집단은 일 세대 월남 지식인 그룹과 긴밀한 협업 관계 속에서 활동했을 뿐만 아니라, 이른바 북한통의 자격으로 1960년대 공론장에서 북한의 정치, 경제, 외교, 문화, 교육 그리고 연애와 가정생활 같은 일상 영역에 관해서까지 적극적으로 발언하게 된다(191쪽).
내외문제연구소는 독립된 사단법인으로 등록되어 있어 대외적으로는 민간연구소를 표방했지만, 실상은 공보부 조사국의 산하 단체에 가까운 기관이었다. 이 연구소의 주된 업무는 크게 두 가지였는데, 하나는 조사국에서 제공하는 북한 관련 최신 자료들을 객관적 ‘지식’의 이름으로 언론에 주기적으로 유포하는 일종의 미디어 창구 역할이었다(198쪽).
북한이 제도적 지식 생산의 대상으로 자리 잡는 데 가장 결정적인 공헌과 역할을 한 인물은 바로 김준엽이었다. 그는 평북 강계 태생의 서북 출신으로, 1960년을 전후하여 《사상계》 주간을 맡고 있었다. 더욱이 그가 소장으로 재직하던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가 …… 포드재단으로부터 28만 5천 달러라는, 1962년 당시로선 상상하기 힘든 거액의 원조자금을 받아 도약할 수 있었던 데도 그의 공헌이 역시 지대했다. …… 하버드대학 체류 시절을 통해 미국 내 동아시아학의 거물급 창설자들, 예컨대 중국학의 존 페어뱅크나 일본학의 에드윈 라이샤워 등과 두터운 인연을 쌓은 것이 효과적으로 작용했던 까닭이다(206쪽).
1963년 말 무렵부터 시작된 6·3 한일협정 반대 국면을 통과하는 가운데 《사상계》가 민족주의를 이야기하는 방식, 나아가 민족주의의 내용 역시 이전 시대와는 다르게 변모했고, 그 결과 《사상계》가 매체로서 지향하는 방향성 자체도 현저하게 달라지고 있었다. 그리고 이 변모는 군사정권이 표방하는 민족주의와의 경쟁과 분화 속에서 이루어졌다(275쪽).
민정 이양 선거 직후 《경향신문》에서 주최하는 〈대학생들의 모임〉에 참석한 10여 명의 서울 시내 주요 대학의 총학생회장들 역시 제3공화국의 ‘민족적 민주주의’에 적잖은 기대를 걸었던 점도 눈여겨볼 만한 대목이다(289쪽).
이제 문제는 일본이 아니라 그것을 받아들이는 우리의 ‘태도’ 문제로 논점이 뒤바뀔 수밖에 없게 된다. 가령, 협정 체결 이후 “공무원은 일본어에 대하여 주체 의식을 갖고 의연한 자세로 임해야 한다”든지 “간부급 공무원들이 일본인을 접할 때는 일본어가 아닌, 반드시 국제어나 통역을 통하라”는 요지의 공식 담화들이 쏟아졌던 것만 보아도 그러하다(324쪽).
《회색인》은 어쩌면 일어날지도 모를 일본에 의한 재식민화를 우려하는 수준이 아니었다. 오히려 재식민화가 당연히 전제하는 식민의 종식 상태 자체를 의심하는 텍스트였다. 달리 말해, 우리가 언제 식민지인이 아닌 적이 있었던가, 우리는 여전히 식민지가 아닌가라는 급진적인 회의로 자신의 질문을 끝까지 밀고 나간 경우이기 때문이다(326쪽).
북한과 비교해 경제적 열세가 아직 분명한 상황에서, ‘평화’-‘통일’의 개념적 결합은 통치 권력에게는 여전히 위태로운 것이었다. 실제로, 4·19의 혁명 공간에서 집권한 민주당은 ‘선건설 후통일’론을 고수했다(365쪽).
함석헌에 따르면, 7·4 공동성명은 통일 문제를 현실 정치, 직업 정치의 영역으로 전적으로 환원시키는 전형적인 ‘국가주의’적 사고에 의한 것이었다. 그가 말하는 ‘국가주의’란 “국가지상주의 혹은 정부지상주의”와 동일한 것이었는데, 함석헌 식 평화 이해에 의하면, 이 국가지상주의야말로 “평화의 진정한 방해 주범”이었다(376쪽).
인식의 변화라는 차원에서 뿐만 아니라 정책 차원에서도 함석헌은 평화통일을 위한 점진적 단계들을 제안한 바 있어 주목할 만하다. 1) 남북한 불가침조약을 맺고, 2) 군비 축소를 시행하며, 3) 평화를 국시로 삼자는 그의 이른바 3단계론은 미·소의 이데올로기 경쟁에서 비켜난 ‘중립노선’을 선택한다는 조건하에서 가능한 것이었다(379쪽).
---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