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 내가 별로래. 나 정도면 괜찮다고 생각했는데……. 내가 나를 너무 높게 사고 있었나 봐.”
“무슨 소리예요. 대리님 외모와 학벌, 성격. 그 정도면 정말 결혼 정보 회사에 내놔도 1등급일걸요?”
아무리 칭찬해도 몇 년 동안 바닥으로 떨어진 자신감이 살아나지 않았다.
“모솔에게 사귀자고 해도 난 아마 차일 거야…….”
“아주 땅을 파라. 땅을 파!”
박은희 과장이 하염없는 자기 비하를 듣다못해 곰곰이 생각하다 눈을 반짝였다.
“그래! 진짜 평소에 ‘이 남자는 정말 아니다. 내가 아깝다.’라고 생각했던 사람을 만나봐. 그리고 그 남자한테도 차이면 그냥 혼자 살아!”
“과장님!”
농담인지 진담인지 알 수 없는 그녀를 향해 다시 한 번 눈을 흘겼다.
“아니, 그래도 그렇게 해서라도 연애를 하면 바닥까지 떨어진 자신감이 좀 회복되지 않을까 해서 해본 말인데. 뭘 또 그렇게 봐…….”
그런가?
말도 안 되는 소리긴 했지만, 괜스레 설득력이 있어 보였다.
근데 그런 사람은 또 어디서 구한단 말인가. 정말 아닌 남자라…….
“근데 그런 사람이…….”
“아!”
김 대리가 손뼉을 치며 눈을 동그랗게 뜨고 슬그머니 입술을 끌어올렸다.
“한 대리님, 문 과장! 문석한 과장님 어때요?”
아! 정말 해도 해도 너무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야! 너 정말 뚫린 입이라고 자꾸 막 지껄일래?”
“거봐요. 딱이라니까요!”
시원은 모래를 씹은 듯한 표정으로 다시 피클 하나를 입안에 넣고 아작아작 씹기 시작했다.
“와, 문 과장이라. 대박…….”
박은희 과장은 아예 입을 가리고 키득키득 웃기 시작했다.
“한 대리랑 문 과장이랑 사귀면 정말 대박 사건. 연애하는 동안 말은 하려나?”
“아, 됐어요! 왜 자꾸 그 남자를 갖다 붙여요. 안 그래도 뒤에서 온종일 사람 짜증 나게 만드는데. 아니, 입은 뒀다가 어디 쓰려고? 모든 업무를 아주 메신저로 할 거야? 조물주가 주셨으면 좀 사용을 해야 할 거 아니야? 입에 거미줄 치겠어. 아주!”
그동안 쌓인 게 많던지 얼굴까지 붉히며 열변을 토하는 그녀를 두 사람은 가만히 바라보았다.
“김 대리, 아무래도 문 과장은 안 되겠다.”
“그렇죠? 저 정도로 싫어하는지는 몰랐네요. 과장님, 다 드셨죠? 가요, 우리.”
아직 분이 덜 풀렸는지 연거푸 냉수를 들이켜며 열변을 토하는 시원을 뒤로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둘 다, 다시는 그런 말 꺼내지 말아요!!”
시원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재빠르게 걸음을 옮기는 두 사람을 쫓아 회사로 향했다.
***
‘아, 괜히 열을 냈더니 머리가 다 아프네.’
자리로 돌아가니 꼴도 보기 싫은 그의 뒤통수가 눈에 들어왔다.
‘확 그냥!’
주먹을 머리 위로 들고 그를 향해 내려치는 시늉을 하는 순간.
빙글.
갑작스럽게 자신을 향해 돌아오는 그의 얼굴.
“하아∽. 먹었더니 졸리네. 과장님, 식사하셨어요?”
두 손을 번쩍 들어 기지개를 켜며 어색한 말투로 그에게 말을 걸었다.
“네.”
다시금 자리로 돌아가는 그의 고개를 보고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다.
‘깜짝이야.’
자리에 앉자마자 겨우 가라앉혔던 열불이 다시금 슬금슬금 올라왔다.
마침, 반짝이는 메신저.
[제가 자료 다시 손봤으니 확인해 보세요. 다음부터 이런 식으로 할 거면 제출하지 마세요.]
‘제기랄.’
그가 보낸 파일을 열어보았다.
할 말이 없었다. 흠잡을 곳이라고는 정말 눈 씻고 찾아봐도 없었다.
아마도 이러니 팀장도 직원들도 그에게 아무 말 못 하는 게 아닐까 싶다.
[네. 감사합니다.]
짜증이 번져 있는 손가락으로 타자를 두드리고 살며시 뒤를 돌아 그의 모니터를 바라보았다.
답장을 보자마자 바로 X 표시를 눌러 버리고 일에 몰두하는 그.
역시 재수 없다.
찬찬히 그의 뒷모습을 살펴보았다.
젊은 임원이 많은 만큼 다른 회사와 다르게 회사 내 직원들의 복장은 자유로운 편이었다.
그 자유로움을 그는 잘못 사용했다.
분명 늘어나지 않았지만, 늘어나 보이는 저 후줄근한 티셔츠.
항상 색상만 바뀌는 같은 디자인. 유추하자면 색깔별로 가진 것이 분명했다.
콧등 위로 얹어진 유행에 전혀 맞지 않는 검은색 뿔테안경.
브랜드를 알 수 없는 정체불명의 운동화. 그리고 그 안으로 살짝 보이는 새하얀 양말.
패션 테러리스트라는 건 바로 그를 두고 하는 말이 아니냐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내가 아무리 비참하게 차여서 자존심이 땅끝까지 떨어졌어도 이건 아니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모니터로 시선을 돌렸다.
***
“한 대리, 지난번에 부탁했던 서류 받아왔어?”
팀장의 목소리에 시원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팀장의 자리로 향했다.
“서류요?”
“지난번 총무팀.”
“아!”
“아?”
날카롭게 날아드는 시선에 시원이 재빨리 미소를 지었다.
“지금 막 끝났다고 받으러 오라고 했어요! 다녀오겠습니다.”
도망치듯 사무실을 빠져나와 승강기로 향했다.
“휴우, 깜빡할 뻔했네. 한시원, 정신 좀 차리자.”
정말 이별의 후유증 때문일까.
시도 때도 없이 정신을 놓아버리는 탓에 요즘 팀장의 눈초리가 여간 따가운 게 아니다.
문 과장은 말할 것도 없고.
승강기에 먼저 올라탄 사람들 사이에 서서 멍하니 승강기 화면을 바라보던 시원이 점심시간에 나누었던 대화를 떠올렸다.
“이 남자는 정말 아니다. 내가 아깝다고 라고 생각했던 사람 만나봐. 그리고 그 남자한테도 차이면 그때는 혼자 살아.”
어이가 없어 웃음이 나오면서도 또 심각해진다.
진짜 그래야 하나 싶기도 하고.
문석한 과장이라…….
심각하게 몰두한 듯 눈을 천천히 깜빡였다.
“어머, 나 지금 무슨 생각하는 거야.”
시원의 작지 않은 혼잣말에 승강기에 함께 탄 직원들의 시선이 시원에게 몰렸다.
순식간에 몰린 시선에 시원의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하아…….”
조용히 한숨을 내쉬고 승강기에서 재빨리 내려 사무실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어머, 이게 뭐야.”
복도 한쪽에 가득 쌓인 상자들을 바라보고 걸음을 멈추었다.
“아, 이거 지금 재무팀 사무실 공사한다고 해서 서류 다 꺼내놓은 거야.”
시원의 말을 들은 직원이 친절하게 설명을 하고 가던 걸음을 옮겼다.
저 멀리 복도 끝까지 한쪽을 가득 메우고 있는 상자들.
복도는 겨우 한 사람이 지나갈 만한 공간만 남아 있었다.
“이렇게 해두면 불편해서 어떻게 다녀. 안 그래도 좁은데.”
평소에도 유난히 다른 층에 비하면 좁은 복도라 지나가다 어깨를 부딪치는 것이 다반사였기에 시원은 미간을 찌푸린 채 걸음을 옮겼다.
시작된 걸음이 복도의 중간쯤 되었을 때였다.
정면을 응시한 채 열심히 걷던 시원이 걸음을 멈추었다.
역시나 걸어오던 상대도 걸음을 멈추고 시원을 바라보았다.
“이런…… 난감해라…….”
문석한 과장이었다.
“뭐도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더니…….”
작은 목소리로 읊조리던 시원이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며 고민에 빠진 찰나였다.
“엄마야!”
뭐가 이렇게 빨라.
어느새 시원의 바로 코앞에 바짝 다가와 자신을 내려다보는 문 과장의 모습에 화들짝 놀란 시원이 비틀거렸다.
툭.
비틀거리는 시원의 어깨가 하필 아슬아슬하게 쌓아 놓은 상자를 건드렸다.
‘어, 어……. 뭐야…….’
갑작스럽게 자신을 향해 팔을 쭉 뻗는 문 과장의 행동에 눈을 질끈 감았다.
탁, 소리와 함께 고요해진 복도.
슬그머니 눈을 떴다.
“조심.”
머리 위에서 아슬아슬하게 비틀거리는 상자를 한 손으로 잡고 자신을 내려다보는 문 과장의 모습에 어색하게 미소를 지었다.
“아……. 가, 감사합니다.”
문 과장이 두 팔을 뻗어 상자를 정리하는 사이에 반걸음 정도 거리를 벌렸다.
잠시 그를 바라보며 고민하던 시원이 벽에 등을 바싹 붙였다.
“지나가세요. 문 과장님.”
“네, 그럼.”
시원처럼 잠시 고민하던 문 과장이 그 말과 함께 천천히 몸을 돌렸다.
‘히익! 왜 얼굴이 이쪽이야!! 벽! 벽을 보라고!’
상자 쪽으로 등을 돌리고 자신의 앞을 지나가려는 문 과장의 모습에 시원이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 숨을 멈췄다.
얼굴을 벽에 딱 붙이고 빨리 그가 지나가기를 기다렸다.
가늘게 뜬 눈으로 그의 가슴이 아슬아슬하게 자신의 앞을 스쳐 지나가는 것이 보이자 멈추었던 숨을 내쉬었다.
아니, 내쉬려고 했다.
“한시원 대리.”
숨결마저 닿을 것만 같은 거리에서 딱 멈추어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문 과장을 천천히 올려다보았다.
입안 가득 담았던 숨을 꿀꺽 삼켰다.
‘뭐, 뭐야…….’
나 부른 거 맞아? 혹시 잘못 들은 걸까.
그러기에 너무 선명했던 목소리.
‘뭐야. 이 야릇한 자세에서 왜 불러?’
당황한 고개를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여전히 얼굴을 벽에 붙인 채 자신 앞에 멈춰선 문 과장을 가는 눈으로 흘겨보았다.
문 과장의 한쪽 팔이 움직이는가 싶더니 그의 손이 시원의 귀를 옆을 아슬아슬하게 스쳤다.
‘히익!’
스쳐 간 손이 벽을 짚었다.
‘설마…… 이거…… 지금 벽쿵이야? 하지 마. 하지 마. 그런 거 아무나 하는 거 아니야.’
그 얼마나 동경했던 벽쿵이던가.
드라마 속 멋진 남자주인공들의 벽쿵에 항상 마음이 심하게 흔들렸었는데. 이건 아니잖아.
한 번쯤 경험하고 싶었던 벽쿵을 손수 보여주는 문 과장의 동작에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한 대리님?”
“……. 네에?”
대답과 함께 숨이 막혀 죽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조용히 숨을 내쉬고 들이마셨다.
‘어…….’
숨을 참고 있어 몰랐던 향긋한 향기가 코끝을 타고 온몸에 번졌다.
방금 샤워라도 하고 나온 듯 상쾌하고 좋은 향기.
평소에 상상했던 향기와는 너무 이질적인 향기에 가늘게 뜬눈이 점점 크기를 키웠다.
‘뭐야, 이거 문 과장님 냄새야? 왜 이렇게 좋아?’
아주 살짝 고개를 돌려 자신을 바라보는 그를 바라보았다.
놀란 듯 커다랗게 뜬 눈을 바라본 문 과장이 고개를 살며시 갸웃거렸다.
“왜 그렇게 봅니까?”
“아, 아니…….”
잠깐 이게 아니잖아.
“아니! 문 과장님이야말로 왜 지금 이런 야릇…… 아니, 불편한 자세로 서 계신 거죠?”
“할 말 있어서요.”
---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