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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을 감으면

눈을 감으면

진서리 | 동아 | 2018년 11월 29일   저자/출판사 더보기/감추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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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18년 11월 29일
쪽수, 무게, 크기 384쪽 | 466g | 147*210*30mm
ISBN13 9791163021094
ISBN10 11630210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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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1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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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 제1의 귀족가의 수장, 쉬안 공작을 수식하는 말은 무수히도 많았다.
완벽한, 냉철한, 철혈의, 단호한, 교활한, 현명한, 속을 알 수 없는, 뱀 같은-
온갖 수식어가 쉬안 공작 앞에 붙었지만, 그 누구도 그를 ‘순진하다’거나 ‘순수하다’고 표현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쉬안 공작에게도 순진하고 순수했던 시절이 분명 있었다. 어린 날, 아주 어린 날. 다시 돌아갈 수 없는 그 시간의 쉬안 공작은, 아니 샤샤는, 분명 어리고도 어렸고, 순진하고도 순진했으며, 순수하고도 순수했다.
그리고 애석하게도, 샤샤는 사랑에 목마른 여린 아이였다.
샤샤가 처음으로 사랑을 갈구했던 대상은 유모였다. 하지만 샤샤가 유모에게 깊이 의지하기 시작하자 샤샤의 아버지는 유모에게 돈을 두둑이 쥐여 주며 낙향시켜 버렸다.
그러자 샤샤는 아버지의 사랑을 갈구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버지는 샤샤에게 큰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이미 아버지의 관심은 샤샤의 형, 카를에게 모두 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샤샤와 카를이 둘 다 아파서 자리에 누웠던 날에도 아버지는 카를의 침대 곁만을 지켰다. 샤샤에게 주어진 것은 건강 조심하라는 짤막한 충고 한마디뿐이었다.
아버지가 샤샤와 카를에게 보이는 관심의 차이는 명확했다. 카를이 무언가를 바라면, 아버지가 바로 카를에게 가져다주었다. 샤샤가 무언가를 바라면, 집사가 한참 후에나 가져다주었다. 카를이 아버지와 시간을 보내고 싶다고 하면, 아버지는 무슨 일정이 있더라도 취소하고 집에 있었다. 샤샤가 아버지와 시간을 보내고 싶다고 하면, 아버지는 어리광 부리지 말라 혼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아버지는 카를을 ‘카를’이라 불렀지만, 샤샤 자신에게는 ‘샤를로테 드 쉬안’이라 불렀다. 너무나도 명백한 차이였다. 그래서 샤샤는 금세 아버지에게 사랑받는 것을 포기했다.
샤샤가 그다음으로 사랑을 갈구했던 대상은 그의 형, 카를이었다. 이전 두 사람과는 달리 카를은 샤샤의 욕구를 충족시켜 주었다.
‘사랑하는 나의 동생.’
카를은 기꺼이 샤샤를 사랑해 주었다. 샤샤도 카를을 사랑했다. 카를이 샤샤를 사랑하는 만큼, 어쩌면 그보다 더. 오직 카를만이 사랑에 목말랐던 샤샤를 구원해 주었기에.
하지만 카를의 구원은 완벽하지 않았다.
‘카를은 오래 살지 못할 거야.’
누군가 샤샤에게 직접 얘기해 준 적은 없었다. 샤샤도 언제부터 자신이 카를의 건강 상태를 알게 되었는지 기억할 수 없었다. 어쩌면 갓난아기 시절에 쉬안 공작이 한탄하는 소리를 들었을 수도 있고, 주치의가 공작에게 보고하는 소리를 들었던 걸지도, 집사와 수석 시녀가 같이 걱정하는 소리를 들었던 것일 수도 있다. 어떻게 알았는지는 기억할 수 없지만, 한번 알게 되자 샤샤는 늘 카를의 건강을 염려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카를은 오래 살지 못할 거야.’
잠을 청하려 눈을 감으면 어둠을 틈타 방으로 들어오는 바람이 샤샤에게 속삭였다.
마구간에서 말에게 여물을 줄 적이면 발끝으로 이어진 그림자가 샤샤에게 속삭였다.
시종들과 숨바꼭질을 할 적이면 성의 벽돌들이 샤샤에게 속삭였다.
그 소리를 듣기 싫어 두 손으로 귀를 막아도 그 속삭임은 멈추지 않았다.
샤샤는 뼈저리도록 통감하고 있었다. 그의 가장 완벽하고 사랑스러운 형이 오래 살지 못할 거라는 사실을. 많은 것을 포기하고 살아가야 할 것이라는 사실을. 샤샤는 카를이 포기하며 살아가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샤샤는 형이 할 수 없는 것들을 어떤 방식으로든 이루어 주려고 했다.

* * *

카를은 수많은 것들을 소망했다. 저잣거리에 나가서 연극을 보고 싶다는 유의 그런 소박한 소망들은 샤샤가 기꺼이 옆에서 도왔다. 하지만 이루지 못할 소원들 역시 많았다. 그 소원들 하나하나가 너무나도 안타까워 카를이 이루지 못한 소망은 곧 샤샤의 소망이 되었다.
‘북쪽 끝에 있는 녹지 않는 얼음산에 가 보고 싶어.’
‘바다 건너에도 나라가 있대. 한번 가 보고 싶어.’
‘너른 들판에서 밤새도록 하늘을 바라보고 싶어. 별들이 천천히 움직이는 걸 보면서 말이야.’
‘여름이면 서부 국경 근처에서 이따금씩 별이 떨어진다면서? 얼마나 슬프고 아름다울까?’
‘-하고 싶어!’
카를은 늘 새로운 소망을 가졌다. 카를이 열다섯 살이었던 어느 날, 카를은 또다시 새로운 소망을 가졌다. 카를에게도, 샤샤에게도 치명적인 소망을.
카를의 열다섯 살 생일이 얼마 지나지 않았을 무렵, 카를은 처음 보는 사람과 함께 공작저에 들어왔다. 카를과 비슷한 나이대로 보이는 그녀는 놀랍도록 강렬한 존재감을 가지고 있었다. 강렬한 금빛 머리칼은 용암처럼 굽이쳐 흘러내리고, 붉은 눈은 타오르는 불을 품은 것처럼 빛났다. 샤샤는 이내 그녀가 누군지 알아보았다.
바이에른 공작가의 올리비에.
샤샤는 아직 사교계에 데뷔도 하지 않았지만 그녀에 대해서라면 질리도록 들어 왔다. 바이에른 공작가는 쉬안 공작가 다음가는 세도가였고 그녀는 바이에른 공작가의 유일한 자식이었으니까.
“바이에른 공작가의 올리비에라 하오. 공은?”
과연 오만하다고 소문난 바이에른 공작가답게 그녀는 도도하게 붉은 눈을 내리깔며 물었다. 샤샤는 그 모습이 퍽이나 마음에 들지 않았다.
“초면에 이름까지 부를 일이야 있겠습니까. 그저 쉬안 공자라 불러 주시지요.”
--- 본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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