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을 맞아 찾은 고향마을에는 봄의 향연이 펼쳐지고 있었다. 마을 뒷동산의 소나무 사이로 진달래와 개나리들이 화려한 자태를 뽐내고 있고 저 멀리 산허리에는 배꽃이 소금을 뿌려놓은 듯 하얗게 빛나고 있다. 마을을 두 동강 내면서 곧게 뻗어 있던 철로가 걷힌 자리에는 최근에 심은 벚꽃이 꽃망울을 터뜨렸고, 그 뒤로 우뚝 솟은 느티나무가 가녀린 연둣빛 잎사귀를 막 피우고 있다. 느티나무는 마을의 수호신으로서 수령이 3~4백 년은 된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젠 더 자라지도, 늙지도 않은 채 한결같은 모습으로 마을을 지키고 서 있다.

봄이 되어서 피는 꽃들은 개화 시기가 서로 다르다. 가장 먼저 피는 매화는 보통 2월 하순이나 3월 중순에 개화하고, 그 뒤를 이어 진달래, 벚꽃, 복사꽃, 배꽃, 철쭉 등의 순서로 핀다. 이들 꽃이 지고 나면 나뭇가지에서 새순이 돋기 시작하는데 이 무렵은 대개 5월 초순에 해당한다. 그런데 올봄에는 온갖 종류의 꽃이, 심지어 나뭇잎까지도 동시에 피었다. 이상고온과 지구온난화가 그 원인이지 싶다. 우리나라의 기후가 점차 아열대 기후로 바뀌고 있다는 지적이 괜한 소리는 아닌 것 같다.

요란한 디젤 기관차의 엔진 소리와 기차 바퀴가 레일 위를 구를 때 나던 날카로운 금속성 소음은 이젠 더 들리지 않는다. 이들이 사라진 마을은 온통 적막과 고독이 씨줄과 날줄처럼 엮여 있다. 가끔 들려오는 까치의 울음소리가 평화로운 시골 마을의 정적을 깨뜨린다. 나는 해가 서산으로 기울어질 무렵 동네로 들어섰다. 한 농가 옆의 텃밭에서는 두 여인이 봄철을 맞아 분주히 텃밭을 가꾸고 있다. 90의 나이를 목전에 둔 할머니와 50대의 딸이 때맞춰 내린 봄비에 고추와 오이 모종을 심고 있는 풍경이 펼쳐진다. 할머니가 곱게 빗어 넘긴 머리카락에는 검은색이라고는 티끌만큼도 없고, 주름진 얼굴에는 파란만장했던 그녀의 인생이 빠짐없이 기록되어 있음을 느낀다.

우리 어머니들의 삶이 그러하듯 할머니도 가난한 농촌으로 시집와서 어려운 시집살이를 했다. 그녀에게는 아들 둘, 딸 둘의 자녀가 있다. 인생살이가 평지로 계속 이어졌으면 좋으련만 그렇지 못한가 보다. 어려운 농촌 살이도 할머니의 복에 겨웠는지 그녀의 남편은 집을 나가 딴 여자와 살림을 차렸다. 할머니는 홀몸으로 4남매를 키워 시집 장가 다 보내고 말년에 안정된 생활을 누리는가 했더니 어느 날 교통사고를 당해 중상을 입고 말았다. 그 후유증으로 할머니는 지금도 한쪽 발목이 90도 가까이 꺾인 채로 유아용 보행기에 의지하여 힘든 걸음걸이를 해야 한다.

세월은 흘러 그녀의 남편은 세상을 떠났고, 인생의 가시밭길을 걸어온 할머니는 그 누구도 원망하지 않고, 자신에게 주어진 삶을 숙명처럼 받아들이며 살았다. 자신의 인생을 파멸로 이끈 알렉에 대한 테스의 복수심도, 네흘루도프에게 버림받고 삶의 나락으로 떨어진 카투샤의 절망감 같은 모습을 그녀의 얼굴에는 찾아볼 수 없었다.

고향 집으로 향하던 승용차가 할머니의 텃밭을 지나칠 무렵 파란 색깔의 상추가 눈에 들어왔다. 이 상추는 유달리 추웠던 지난겨울 동안 조그만 비닐하우스 속에서 근근이 생명을 유지하다가 최근 내린 봄비로 싱싱하고 먹음직스럽게 자랐다. 상추를 보자 오늘 저녁 메뉴로 상추쌈이 활동사진처럼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아울러 이 할머니의 남은 인생이 그리 길지 않으리라는 생각에 나는 차를 급히 세우고 할머니에게 다가갔다.
“아지매, 상추가 참 잘 자랐네요.”
백발이 성성한 할머니이지만 나에게는 아직도 아지매다. 어머니가 살아 계실 때 “형님” 하면서 항상 살갑게 대하던 이 할머니를 난 언제나 아지매로 불렀다.
“이제 오냐? 잘 왔다.”
“상추 한 움큼만 주세요. 오늘 저녁에 먹게!”
“그래? 얼마든지 뜯어 가거라.”
나는 빽빽이 자란 상추 포기를 비집고 상춧잎 여남의 장을 땄다. 상추가 어찌나 싱싱하던지 조금만 당기거나 굽혀도 잎이 찢어지고 줄기가 부러져 버린다. 작업이 끝난 후 지갑 속에서 신사임당의 초상화가 그려진 지폐 한 장을 끄집어내어 ‘아지매“에게 건넸다.
“아지매, 여기 상춧값요.”
아지매는 놀란 눈으로 나를 쳐다보더니 흙 묻은 손으로 나의 손목을 툭 치면서 손사래를 친다.
“왜 이래, 상춧잎 몇 장을 가지고”
나는 하는 수 없이 옆에서 어색한 미소를 짓고 있는 딸에게 다가가 엄마 드리라고 하면서 그녀의 작업복 호주머니에 지폐를 구겨 넣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엉거주춤한 행동이 그녀의 순박함을 나타내 주고 있었다. 그녀는 몸이 불편한 어머니를 위해 친정을 방문하여 일손을 돕던 중이었다.
고향 집에 온 나는 뜯어온 상추를 깨끗이 씻은 다음 플라스틱 소쿠리에 담아 물기를 뺐다. 이 상추 한 장이 5천 원 가까이 먹혔으니 세상에서 제일 비싼 상추임이 틀림없다. 이런 비싼 상추로는 밥이나 고기를 싸 먹으면 안 되고, 반대로 고기에 상추를 싸서 먹어야 이치에 맞을 것 같다. 그것도 1 다음에 + 부호가 다섯 개 정도 붙은 특등 한우고기로 말이다. 오늘 산 상추가 시중 가격보다 비싸게 먹혔다는 건 중요치 않다. 내가 지급한 대가에 비해 만족도나 효용(utility)이 크면 그 거래는 손해 본 것이 아니기에 나는 행복한 잠을 청할 수 있었다.

다음 날 아침, 대숲에서 지저귀는 새소리에 잠을 깼다. 싱그러운 봄을 맞이하기 위해 현관문을 밀고 나서는데 문 앞에 커다란 비닐봉지 하나가 놓여 있었다. 봉지 속에는 굵고 때깔 좋은 양파가 가득 들어 있다. 어제 받은 상춧값이 부담스러워 이른 아침 아지매가 불편한 몸을 이끌고 조용히 갖다 놓은 것임이 틀림없다.

어느 제과 회사의 초코파이 포장지에 커다랗게 ‘情‘이라고 쓰인 것을 본 적이 있다. 힘들게 살아가는 사람에게 조그마한 이 파이 하나를 건네는 광고 영상을 TV에서 본 적도 있다. 이들이 주고받는 것은 단순한 과자 한 봉지가 아니라, 눈에 보이지도 않고 돈으로 환산할 수도 없는 그 情인지도 모른다. 사막과 같이 메마르고 황량한 이 행성에서 세상은 그래도 살아갈 가치가 있다는 희망을 품게 하는 것은 이와 같은 인간의 따뜻한 마음 때문이 아닐까? 나는 성선설(性善說)과 성악설(性惡說)이라는 인간의 본성에 관한 두 대립하는 이론 중에서 아직 전자를 믿고 싶은 이유도 여기에 있다.

갑자기 파란 위쪽으로 한 대의 비행기가 나타나더니 내 머리 위에서 선회하기 시작했다. 2차 세계대전 중에 출동하여 실종된 생텍쥐페리의 비행기인 듯했다. 같이 타고 있던 ‘어린 왕자’가 깔깔 웃으면서 나에게 소리쳤다.

‘사막이 아름다운 건 그곳 어딘가에 우물이 숨어있기 때문이야.’

<b>여송(與松) 박춘래(朴春來)는 참 멋진 사람이다.<br/> 여러 분야에 걸쳐 아는 것도 많고 깊이도 있다.<br/> 인간적으로 소탈하고, 편안함도 참 좋다.</b><br/><br/> 정작 여송과의 학창시절엔 그에 대해 잘 몰랐다. 세월이 훌쩍 지난 뒤 고등학교 동기 모임(晋四五)을 통해 그를 조금씩 알게 되고, 갈수록 시골 출신으로서의 동질감을 느끼게 되었다. 그의 고향(문산) 집을 방문했을 때 맛본 매운탕 요리 솜씨는 예사롭지 않았다. 김치도 직접 담근다는 사실에 놀라고, 쌀독 내 벌레 방지 노하우를 우리에게 알려 주었을 땐 경이로운 마음이 들어 그를 좋아하지 않을 수 없었다. <br/><br/> 그 후 카카오톡으로 접한 그가 쓴 “어머니, 챙이가 다 닳았어요.”는 부모님의 향수를 불러일으키며 잃어버린 추억을 찾아서 시간여행을 떠나는 느낌이었다. 내겐 큰 감동이었고, 책으로 출간되면 많은 이들에게 공감이 될 것이라 여겨졌다. 얼마 전 진사오 가을 소풍 길에서 새 챙이를 구할 수 없어 애를 먹었다는 말에 시골 아낙네의 수준을 능가할 그의 챙이질 모습이 아른거렸다. 여성들의 고유영역까지도 섭렵한 그는 해박한 농사지식과 노하우로 잘 무장된 농사꾼이며, 퇴직을 앞둔 우리가 배울 것이 많은 참 대단하고 멋진 인생을 살고 있다. <br/><br/> 요즘 같은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봄이 왔건만 봄 같지 않음)의 시절에 여송은 우리에게 봄을 오게 하고 희망을 가져다주는 좋은 친구다. 작가로서 쓴 그의 꾸밈없는 좋은 글은 마음의 고향을 잃은 독자들에게 큰 감동과 기쁨을 주고, 잃어버린 추억을 찾아 줄 것으로 기대된다. <br/><br/> 우리 진사오의 보석 같은 존재, 여송 박춘래의 출간을 축하하며 큰 박수를 보낸다.<br/><br/>2018년 가을의 끝에서<br/>진사오 멤버 강 영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