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35년 여름 아직 22살의 대학생으로 북 세란을 여행하던 그는 그 섬의 최북단에 있는 길레라이어Gilleleje란 마을에 이르러 다음과 같은 일기를 썼다.
“나에게 참으로 없었던 것은 내가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에 대한 확실한 자각이었다. 내게 없었던 것은 결코 내가 무엇을 알아야 하느냐에 대한 이해가 아니다 - 어떤 행위에도 일정한 인식이 있어야 하므로 인식이 전혀 불필요하다는 것은 물론 아니다. 문제는 내 자신의 사명이 무엇인가를 이해하는 것이다. 곧, 하느님께서는 내가 무엇을 하기를 원하고 계신가를 아는 일이 중요한 것이다. 나에게 진리인 진리를 찾는 것, 내가 그것을 위하여 살고 또 죽기를 진심으로 원하는 이념Idee을 찾아내는 일이 필요한 것이다. 이른바 객관적인 진리를 찾아낸들 그것은 나에게 아무 소용도 없을 것이다. …… 내게 없었던 것은 참으로 인간다운 생활을 한다는 것이었다.
그동안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났고, 대전 후 유럽에 팽배한 위기의식과 더불어 등장한 하이데거와 야스퍼스 등에 의한 실존철학, K. 바르트, E. 브루너의 위기신학 또는 변증법적 신학, 니체, 마르크스, 그리고 이보다 조금 앞서서 R. M. 릴케, F. 카프카 등의 문학이 소개되면서 그들과 관련하여 키에르케고어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었다.
그 무렵, 한국에서도 일본의 직·간접적인 영향 아래 서양의 학문과 철학에 대한 관심이 일어나기 시작하여 많은 젊은이들이 해외유학을 떠났다. 그런데 유학지로 독일이나 프랑스 같은 유럽이나 미국을 찾은 사람은 극히 적었고 대다수는 일본을 찾았다. 그리하여 1930년대의 일본 유학생 중에서 신학, 문학, 철학을 전공한 몇몇 사람과 경성제대에서 서양철학을 전공한 몇 사람이 처음으로 키에르케고어를 읽은 한국 사람으로 짐작된다. 왜냐하면 일본에서는 1930년에 『이것이냐 저것이냐』의 발췌본이 번역 출판된 데 이어 1935년에는 『키에르케고어 선집』 전3권과 H. 회프딩의 연구서 『철학자로서의 키에르케고어』가 번역 소개되어 일종의 선풍을 일으키고 있었으며, 경성제대의 철학과에서는 독일관념론과 함께 하이데거나 야스퍼스 등의 실존철학이 강의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경성제대의 도서관에 키에르케고어나 회프딩의 독일어 역본이 소장되어 있었음은 물론이다.
그는 프랑스 혁명에서 볼 수 있었던, 그리고 비록 단초적이긴 하지만 평온한 덴마크에서도 볼 수 있는 경솔하고 혁명적인 정신을 싫어했다. 1837년 12월의 일기 기술에서 그는 그 당시 고조되어가던 자유주의 운동에 대하여 “군주제의 원리에 대한 증오는 오늘날 국민들이 네 파트의 솔로Solo를 원할 만큼 컸다”고 하는 가시 돋친 말로 꼬집고 있다.
그는 또한 자기 시대의 자유주의적인 왕정에 반대하는 정치가들에 대하여 역사 감각이 없으며 연속성을 중시하지 않는다고 비난하였다.
“정확하게 말해서 정치가들은 연속성을 무시하기 때문에 공공심이 타당되는 세 표지 중에서 둘만을 인정한다. 곧, 합의와 일반성만을(그리고 이것들조차도 매우 사소하고 자의적인 의미에서) 인정하고 세 번째 것, 곧 오래된 것은 완전히 무시한다.”
이러한 그의 일기 기술들은 우리에게 그가 분명히 군주제를 지지한 보수주의자였음을 알려준다. 그러나 우리는 그의 보수주의가 이른바 보수주의적 정치가의 그것이 아니라 문명의 본질적 바탕이 되는 도덕성을 유지·보존하려는 것이었음을 알게 된다.
키에르케고어에게 역설은 우선 사고?의 본질적인 성격, 곧 지성적 삶의 고유한 파토스로서 규정된다. 그리하여 그는 “역설은 사고의 열정이다”라고 말한다. 그리고 오직 위대한 영혼만이 정열에 자기를 내맡기듯이 오직 위대한 사상가만이 역설 앞에 자기를 내놓는 것이요, 역설이 없는 사상가란 마치 정열이 없는 애인, 곧 평범한 파트론과 같은 것이라고 한다. 이때 정열 그 자체는 규정하고 있지 않지만, 그러나 그에 의하면 “모든 정열의 극치는 항상 자기 자신의 파멸을 의욕하는 데 있다”8는 것이다. 그리하여 오성의 최고의 열정 또한 충돌하면 결국은 자기의 파멸이 될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 충돌을 의욕하는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여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 키에르케고어는 사고의 최고의 정열, 곧 사고의 최고의 역설을 다음과 같이 규정한다.
“사고의 최고의 역설은 자기가 스스로 사고할 수 없는 어떤 것을 발견하려고 하는 것이다.”
사실 우리는 그가 누렸던 안락한 환경과 생활조건, 그가 받은 교육, 그의 여러 저작 등에서 그의 개인주의적인 성향을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다. 또한 그는 주위에서 진행된 동시대의 사회적·정치적 운동에 직접 참여하지 않았으며 그의 공간된 저작에서도 이러한 문제들을 직접적인 주제로 다루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그는 그의 여러 저작에서 이러한 사회·정치적 변혁을 겨냥한 운동들을 비롯하여 대중, 저널리즘, 국교회 등에 대한 노골적인 혐오와 불만을 드러내고 있으며, 자기의 모든 저작 활동의 사상 전체는 사람은 어떻게 그리스도인이 되는가하는 문제에 있으므로5 이러한 종교적 문제는 정치하고는 하늘과 땅만큼이나 다른 것6이라고 잘라 말하고 있기까지 하다. 그러니 그가 영락없는 정치적 보수주의자, 왕실 옹호주의자이며, 다른 사람의 간섭을 싫어한 정신적 귀족주의자, 개인주의자 따위로 이해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된다. 그러나 여기에 지극히 평범한 물음이 생겨나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은 그렇게 생각하고 말기에는 그의 시대가, 그의 조국 덴마크는 물론 유럽 전체에 걸쳐 너무나도 엄청난 동란과 변혁을 겪고 있었던 시대였기 때문이다.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