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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어

악어

: 바람이 깎은 달 + 악어 + 샤이 레이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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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18년 12월 10일
쪽수, 무게, 크기 296쪽 | 298g | 128*188*20mm
ISBN13 9791196462611
ISBN10 1196462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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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1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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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전긍긍하는 내가 한심했다. 철저히 혼자 내팽겨진 느낌이었다. 가족의 해체는 이렇게 진행되는 것인가. 나는 원인을 더듬었고 내가 뭘 잘못했는지 따져보았다. 모든 게 내 탓인 듯도 하고 아닌 듯도 했다. 내 탓이 아니라면 억울한 마음이 생길 법도 한데 오히려 나를 괴롭히는 건 슬픔에 가까웠다. 그 슬픔은 공포와 몹시도 닮아 있었다. 뉴스에 자주 나오는 독거노인의 최후가 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혼자 지내다 추레하게 맞이하는 죽음. 피할 수도 없는…. 그것은 분명 유폐였다. 한때 유배지였던 제주, 나는 문득 섬에 갇혀버린 느낌이 들었다. 그림 한 점이 머릿속을 표백했다. 세한도를 보며 나는 제주에서 귀양살이하던 추사의 고독을 생각했었다.

“어멍을 원망하지 않는댄 허멍, 가이가 죽 그릇에 눈물을 뚝뚝 떨구더라고. 내 숟가락질이 기냥 느려지는디…. 죽을 다 먹이고 나면 보내야 할 자식이라. 가이 얼굴을 꼼꼼히 눈에 새겨 넣었어. 가이도 눌러 붙은 냄비 바닥을 천천히 긁더라고. 아주 처언천히. 숟가락 지나간 자리를 긁고 또 긁고…. 그 소리가 내 가슴 속을 후비고 또 후비고….
그러고는 일주일 뒤 딸신디(딸한테) 전화를 받았어. 지네(자기) 동생이 고향집에 다녀간 다음날 뒷산에 올라가 목을 맸댄 허는….
엄마 이젠 올라오지 마. 그러고는 전화가 뚝허고 끊어지는디, 그냥 꿈이랜 허믄 좋을 건디….”
숙소로 돌아온 아내가 밤새 흐느꼈다. 삼십 년이나 지난 이야기라며 나는 아내의 등을 쓰다듬었지만 내게도 잠은 오지 않았다.
“그 집을 떠나면 아들이 영영 못 찾아올 것 같대요.”
---「바람이 깎은 달」중에서

“도시의 물건을 부족민들 앞에 함부로 꺼내 보이지 마세요.”
말투야 부드러웠지만 뼈가 있었다. 나는 움찔했다. 그가 아편 운운하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자기도 몹시 조심스럽게 사용한다고 했다. 문명의 찌꺼기들은 인화성과 파급력이 강해 어떤 폭발을 일으킬지 모른다는 것이었다. 나는 그가 추장에게 위스키를 전달하면서 무슨 생각을 하는지 궁금했다. 그가 아랫마을로 가져간 설탕과 소금 등이 어떻게 분배되는지도 나의 관심사였다. 아편이라…, 모든 마약이란 잘 쓰면 보약이고 잘못 쓰면 독이 된다. 이곳에 들여온 문명의 배설물을 누가 어떤 용도로 사용케 할 것인가. 나는 강을 내려다보며 양측의 수뇌부를 이용할 꼼수를 뾰족하게 다듬었다.

걱정은 상상력을 가진 인간의 본능이다. 걱정 많은 대중은 호전적인 지도자 밑에 모여들고 지도자는 다시 불안과 증오를 조성한다. 증오가 없으면 공포도 없다. 불안한 자들은 상대를 믿지 못하므로 무장을 하고 상대의 몰락을 원한다. 그러므로 평화는 군비 경쟁 앞에서 무력하다. 장기간의 교류로 이익을 공유하며 서로를 믿게 할 수 없다면, 힘으로 균형을 맞춰 서로를 두려워하게 만들자. 전자가 진짜 평화라면 후자는 짝퉁이며 전쟁의 유보에 불과하다. 장고의 끝이 결심을 재촉했다. 나는 짝퉁을 선택했다. 무기의 진화에 맞춰 새로운 비즈니스 전략을 세워나갔다.
---「악어」중에서

미모사였다. 고향집 탱자나무 담장 아래 해가 내려오는 곳, 그곳에도 이 꽃이 피어 있었다. 건드리기만 하면 놀라서 움츠러들며 제 관절을 꺾어버리던 생명체. 아버지는 휴일이면 앞마당의 꽃밭에서 시간을 보내곤 했었다. 내가 미모사를 만지작거릴 때면 아버지의 목소리가 등 뒤에서 들렸다. 너무 건드리면 죽을지도 모른다. 나는 손끝을 거둬들이기를 반복하며 인내심을 길러야 했다. 까르르, 수지의 웃음소리가 등 뒤에서 들렸다. 우리는 ‘샤이 레이디’라고 불러요. 숨기고 싶은 비밀이 있나 봐요, 부끄럼 타는 숙녀처럼. 미모사는 이파리를 접다가 한 번 더 건드리면 아예 가지를 스스로 꺾어 내렸다. 놀라운 적응력이었다. 초식동물의 촉감을 느끼면 시들어 죽은 척하는 생존 전략일 것이다. 그것은 삶에 대한 질긴 의지였고 소극적 도피를 가장한 적극적 추구였다. 움츠러드는 미모사에서 나는 아버지를 보았다. 스스로 이파리를 접고 가지를 꺾은 채 산속 깊이 숨어버린 아버지. 눈앞에 펼쳐진 연분홍의 정원이 숨은그림찾기의 실마리처럼 홀연하고도 뾰족하게 다가왔다.

마주 선 아버지의 얼굴에 볕 한 조각이 어룽거렸다. 산다는 게 참 그렇더구나. 전쟁 이야기를 하는 것 같진 않았다. 아버지가 월남 참전 용사도 아니어서 그럴듯한 무용담이 나올 리도 없고. 이놈들이 얼마나 빠르게 자라는지 아니? 아버지가 대나무를 만지며 숨을 길게 뽑았다. 나이 들면 이런 게 소중해져, 이 마디 말이다. 굵은 몸통 하나를 감싼 두 손을 위쪽으로 쓸어 올리며 아버지가 말을 이었다. 이게 없으면 바람에 부러지거든. 살면서 추억으로 마디를 만들어놓지 않으면 인간관계도 부러져. 친구든 부부든.
---「샤이 레이디」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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