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형이상학적인 것이 가득 찬 문제들, 권위, 부정의, 테러의 문제들로부터 배우기를 계속함으로써 후퇴와 재조정을 감행한다. 이와 같은 주제들은 철학적인 것에 대한 어떤 봉쇄 정책이건 깨뜨려 열며, 비판이 움직이는 범위를 넓히도록, 인식의 대안적 유형들을 찾아보도록 우리를 초청한다. --- p.29
이 책에서 나는 어린시절의 연패와 어린시절이 품고 있는 절멸의 성질에 관해 자세하게 심사한다. 많은 고찰이 내게 동기를 부여했는데, 그중 몇몇은 이어질 페이지들에서 추측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 연구에 동기를 부여한 한 가지 요인은 분명히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미국은 으레 스스로를 유아 취급하면서, 화창함과 놀이공원의 멋들어짐을 치장하고, ‘프로라이프’라는 뒤틀린 이데올로기 및 그와 관련된 죽음 거부 조직 활동을 통해 가학적 충동의 안팎을 곧잘 뒤집어 놓는다. 당신은 그 충동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 이 나라에서는 우리가 어린시절에 대해 읽어 내기를 요구하고, 또한 좋은 녀석들, 퀴어들, 트랜스들, 외톨이들 속에조차 어린시절이 흘려 놓은 ‘가족 가치’라는 일련의 전의체계에 대해 읽어 내기를 요구한다. --- p.76
내가 시작하려는 질문 무더기는, 여기서는 간단히 하겠지만, 니체식 에너지를 동력으로 삼는다. 아주 어린시절을 사로잡은 권위의 지배권(혹은 어린시절이 권위에 매달린 방식)은, 그것이 좋은 평가를 받았든 형편없이 내쫓겼든 간에, 구조를 형성했든 쇠약하게 만들었든 혹은 둘 다이든 간에, 무엇이 되었을까? 탈정치적 세계처럼 보이는 곳 가운데서, 다시 말해 우리가 정치적인 것의 본질적 유한성과 직면한 곳에서 우리는 어떤 식으로 권위를 차지하고 있을까? 우리에게는 권위가 필요한가, 아니면 권위는 질문을 던지는 의도적 무정부 상태를 통해 제거될 수 있나? 권위 행사가 폭군정을 모면하게 해 줄 수 있다는 것은 과연 사실일까? 혹은 반대로 권위의 특유한 활동력이 폭군정의 구속력을 마련하는가? --- p.87
코제브가 명확히 한 바와 같이, 권위는 힘 혹은 시행의 전략들과는 전적으로 아무 관련이 없다. 다시 말해 권위는 강압적 단언이라는 하부현상마저도 피해 간다. 법적 유형의 괴롭힘을 거부할뿐더러 권력이 자의적으로 한 방 날리는 일을 경멸하기에 그렇다. 실제로 권위는 본질상 모든 점에서 힘의 자리를 대신하고 능가하며, 일종의 주권적 초연함을 가진 채 힘으로부터 떨어져 나온다. [그런데] 나는 이런 시각과 논쟁하기를 원해 본다. ‘힘’이 철학적으로 전유되기 어렵다고, 즉 (철학적 사유와 오래 관련 있던 ‘폭력’과는 달리) 개념이나 주제로 정확히 파악되기 힘들다고 판명되었던 한에서뿐만 아니라, 우리가 또 다른 결정적 부족함과 대면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 p.133-134
민주주의 스스로가, 정치의 결정을 빠져나가는 계산 불가능한 것을 위한 ? 헤아림이 불가능하도록 환희·시·즐거움이 들어와 있는 좁은 만을 위한, 또한 창조성의 광범위한 수용을 위한 ? 비형상적 열림이라고 단언할 수 있다고 상상해 보자. 이러한 것들은 상궤를 벗어난 이해불능의 과도함이 만들어 낸 물결로서, 대개의 경우 이 물결은 과소평가라는 수단을 통해 정치의 길 곁으로 떨어져 나갔던 성질을 포함하거나 또는 그리로 떨어져 나갔던 실천에 귀속된다. 이런 물결은 과소평가되거나 아니면 무가치하게 되었다. (…) 자, 이와 같은 민주주의는 ? 니체의 속력이, 그리고 시상의 경제성 없는 급등이 발사한 것이며, 음악이 실존을 찢고 들어갈 적에 이용하는 포기가 끌어가는 것이자 과소평가된 채로 남은 것들의 범람을 부르는 것이다. 이런 민주주의가 단호하게 동일시를 거부한다는 점을, 부성의 점착성과 가치평가 패턴이 갖는 강압적 견인력을 거부한다는 점을 이해하도록 하자. --- p.266-267
프란츠 카프카는 자기의 아무것도 아님을 올라타 다루었고, 실존의 부스러기를 받아들였으며, 유연히 흐르는 선을 조각과 맞바꾸었다. 그는 가정 내의 지지율 하락을 감수했으며 크기의 감축을 받아들였기에, 실패에 수여하는 세계 수준의 계관을 최초로 획득한 사람이 되었다. 카프카는 우리에게 어떻게 질 것인지, 어떻게 헤아릴지를 가르친다. 잃는 일이 당연한 것임을 어떻게 하면 셈해 둘지를 가르치는 것이다. 그는 숨은 보상이나 살아나갈 초월적인 구멍, 혹은 마지막 순간의 반전을 기대하지 않는 법을 가르친다. --- p.337
여기서는 지금까지 수많은 것을 관건으로 삼아 왔다. ‘훌륭한 루저’라는 이념을 이해하고 그 궁지에서 벗어날 약간의 부력을 만들어 내기 위해서였다. ? 훌륭한 루저는 기본적 위치를 차지한 채로 모호한 것들과 맹점을 걷어 내지 않는 자이며, 순종적 분방함이라는 번거로운 계약 보고서에 내재된 난감한 상황을 제거하지 않는 자다. 우리는 항복의 자세, 즉 타자에 대한 복종의 구문론에서 시작했다. (…) 그것은 선뜻 악수를 청할 적에 발생할 법한 복종이다. 아니면 윤리적 경의에서 비롯된 ‘당신 먼저’를 실행하는 복종이다. --- p.382-383
장악, 이것은 온갖 위장을 하고 돌아다니며, (…) 어른이 된 어린아이에게도 알지 못할 것으로 남아 있곤 한다. 어떤 것이 그녀를, 심지어 그녀가 주목할 만한 ‘성공’ 사례를 갖고 세계와 만날 적에도 거꾸러뜨린다. 보이지 않되 끈질긴 장악의 완전한 지배 아래서 어른 어린아이는 퇴행하여 미성년이 된다. --- p. 415-416
리오타르가 몰고 가면서 논변의 기초로 삼는 아포리아가 있다. ? 어른이 정제한 서사, 불안정한 기억의 솟구침을 통하지 않고서 우리가 어린시절의 테러에 접근할 길은 없다는 아포리아다. 이것은 매번 새롭게 트라우마로 인한 떨림을 일으키며, 이 떨림은 “어린시절의 민감성을 성인기의 언사로 옮길 수 없는 저 번역 불가능성이 야기하는 것이다”.
--- p.46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