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하며
우리가 행복한 삶을 살기를 원하셨던 예수님은 우리에게 참 행복에 이르는 다양한 방법을 알려주셨습니다. 특히 신약성경의 첫 번째 책인 마태오복음서는 예수님의 많은 공생애 가르침 중에 여덟 가지 행복 이야기를 가장 첫 번째 자리에 놓았습니다. 마태오는 팔복을 신앙의 벽돌을 쌓아가야 할 주춧돌로 생각했기 때문이겠지요.
문제는 ‘수님이 제시하는 행복의 비법과 우리가 원하는 행복 사이에 커다란 간격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마음의 가난, 슬픔, 온유, 의로움, 자비’는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소비사회에 전혀 어울리지 않을 뿐 아니라 우리의 갈망과도 맞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방법대로 살았다가는 하루아침에 길거리에 나앉기 십상입니다.
이천 년이라는 너무나 큰 시간적 ? 문화적 차이 때문에 예수님의 말씀이 오늘 우리에게 적용될 수 없는 것일까요? 아니면 하루가 다르게 변하는 소비사회의 특성을 예수님이 몰랐기 때문에 그렇게 말씀하신 걸까요?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천 년 전 사람들에게도 최고의 가치는 행복이었습니다. 시대는 달라도 행복을 추구하는 사람들의 마음은 변치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시대는 역사 이후 어느 때보다 가장 풍요로운 시대임에도 우울증을 앓는 사람들이 가장 많고 자살률 또한 최고입니다. 예전엔 꿈도 꾸지 못한 큰 집과 편리한 물건들과 멋진 자동차를 소유하고 있지만, 우리 마음은 외롭고 공허합니다.
오늘 예수님은 내게 “지금 행복하니?” 하시며, 오늘의 내 성취와 내가 소유한 물건으로 얼마나 행복하냐고 묻고 있습니다. 행복으로 들어가는 비밀의 문을 열 수 있는 열쇠는 무엇일까요? 지금 내가 찾고자 애쓰는 소유와 성취가 행복을 보장하는 것이라면, 왜 많은 것을 가진 사람들이 절망하고 자살하는 것일까요? 이제 참 행복에 이르기 위해 우리에게 새로운 눈과 마음이 필요한 때입니다.
오늘도 더 많이, 더 빨리 그리고 더 예쁘게와 풍요로움을 추구해 보지만 만족은 없고, 지구는 과도하게 남용되며 신음하고 있습니다. 오늘 소비사회는 가난한 사람과 힘없는 자연에 대한 착취와 억압 위에 세워진 폭력적인 문화입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하느님께 더 많은 누림과 풍요를 위해 기도하고 있습니다.
결핍상태를 의미하는 가난은 불편과 고통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가난이란 물질적 결핍에 지나지 않는 것이 아니라 가난을 통해 하느님의 부를 누리는 신비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스도의 풍요를 깨닫게 되면 예수님 대신 다른 것을 채우지 않는 소박한 삶을 즐거워하게 됩니다. 그러기에 톨스토이는 “세상은 ‘가난’이란 단어를 ‘불행’과 동의어로 만들었지만, 사실 그것은 ‘행복’의 원천이다.”라고 했습니다.
소박한 삶의 기쁨을 아는 사람은 예수님이 주는 어떤 선물이 아니라 그분 안에 머무는 진정한 기쁨을 맛볼 줄 압니다. 소박한 삶은 새 인생의 시작을 의미합니다. 소박함은 하느님을 향한 갈망의 씨앗이 자라는 터전이 되기 때문입니다.
여기 참 행복의 길을 찾는 여행을 시작하려 합니다. 나와 우리 모두가 행복하고, 내가 살아가는 터전인 지구도 행복해지는 방법이 바로 이 길에 있습니다. 소유에 병든 우리 마음을 치유하고, 신음하는 지구를 치유하는 묘약이 여기 있습니다. ---서문 중에서
감사는 날마다 부르는 찬가
아침에 일어나면서 가슴이 설레는 것을 행복이라고 부릅니다. 가슴이 설레지 않아도 기대감으로 충만하지 않아도 평화롭게 눈을 뜰 수 있는 것도 행복입니다. 행복은 하느님이 모든 피조물에게 주신 가장 큰 선물일 것입니다. 세상을 만들고 그 안을 채우시며 하느님은 그 안에 사는 모든 피조물에게 넘치는 복을 주셨습니다.
“자식을 낳고 번성하여라.” 번성은 두 손 가득 무언가를 움켜쥐는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번성은 자신에게 주어진 충만함을 느끼고 맛보고 간직하고 감사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날이 갈수록 세상 살기가 더욱 힘들어집니다. 하느님을 믿는다고 고백하지만 삶은 더욱 고달프고 힘겨움의 연속입니다. 언제 이 어둠의 터널이 끝날지 두렵기만 합니다. 그러나 절망의 어둠 속에서 하바쿡 예언자는 절망을 뛰어넘는 희망을 노래합니다.
무화과나무는 꽃을 피우지 못하고
포도나무에는 열매가 없을지라도
올리브 나무에는 딸 것이 없고
밭은 먹을 것을 내지 못할지라도
우리에서는 양 떼가 없어지고
외양간에는 소 떼가 없을지라도
나는 주님 안에서 즐거워하고
내 구원의 하느님 안에서 기뻐하리라.(하바 3,17-18)
예언자는 하느님 덕에 과수원에 열매가 가득하고, 외양간에 소와 양이 득실거리는 풍요로움 때문에 기뻐한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고백은 “은행 통장에 잔고가 없으며, 오늘 매출이 전혀 오르지 않고, 대출금은 고사하고 이자만 점점 쌓여가도 나는 하느님으로 인하여 기뻐합니다.”라는 것입니다.
예언자는 하느님을 진실하게 믿고 있는데도 삶의 모든 것이 텅 빈 절망스런 순간의 연속일지라도, 절망하지 않고 고통의 시간에서 나를 구원하실 하느님으로 인해 기뻐한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미국 일리노이 주의 레이크 포레스트 대학 영문학 교수요, 작가로 주목받던 필립 시먼스는 서른다섯 살에 루게릭병에 걸려 5년이라는 시한부 인생을 선고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아침에 침대에서 나올 수 있는 날은 하루하루가 나에게는 축복입니다. 우리가 팔다리를 움직여 세상일을 할 수 있는 날은 그 하루하루가 축복입니다. 팔다리가 위축되고 말을 못하게 되어도, 여전히 우리는 축복받은 존재입니다. 이 심장이 뛰는 한 나는 축복받은 존재입니다.”라며 원망하기보다 자기 삶을 받아들이고 감사했습니다.
소유에 의해 사는 사람은 늘 누군가를 탓하며 자신은 희생자라고 생각하는 습관 속에 살아갑니다. 자신의 가치를 소유하는 것에 두면 우리는 작은 변화나 상실에도 쉽게 좌절하고 절망할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 안에 자신의 가치를 두는 사람은 우리가 기대하지 않았던 어떤 변화나 어떤 상실에도 자신을 희생자로 만들지 않습니다. 세상은 우리를 실망시킬 수 있지만, 그 사실 때문에 우리를 절망으로 이끌지는 못합니다.
하늘에 해가 있을 땐 누구나 감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캄캄한 어둠 속에서 길이 보이지 않을 때도 감사하는 이는 드뭅니다. 순풍이 불 때는 누구나 감사합니다. 그러나 폭풍과 파도가 출렁이며 목숨이 경각에 달려 있을 때 감사하기란 어렵습니다. 감사는 삶의 모든 순간에 그를 인정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감사하는 사람에게는 세상 모든 것이 협력하여 선을 이루기 때문입니다.
말처럼 쉽지 않은 감사의 삶, 그러나 선택하지 않으면 너무나 빈곤한 우리네 인생이 참 아이러니합니다. 눈에 보이는 좋은 것을 선택하기는 쉬운데 눈에 보이지 않는 좋은 것을 알아보고 선택하는 것은 혜안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혜안은 연륜으로 경험과 끊임없는 자기성찰을 통해 얻어지는 고귀한 보물입니다.
그러므로 감사의 삶이란 앵무새처럼 입으로만 옹알거리는 삶이 아니라 몸으로 마음으로 의지로 풍겨 나와야 할 엄청나게 깊고 풍요로운 삶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풍족한 처지든 비천한 처지든 기쁠 때든 슬플 때든 항상 감사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내적 충만한 삶입니다.
오늘 우리도 어떤 상황에서든 자신의 바람처럼 되지 않더라도 늘 감사 노래를 불러야 합니다.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