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재경 씨, 이제 그 사람 얼굴이 보이나요?”
최면사가 다급함을 숨기며 물었다.
“키가 커요. 180은 훌쩍 넘는 것 같아요. 어깨가 넓고 단단한 체구예요. 검정색 캡 모자를 썼고, 검정색 긴팔 티셔츠에 블랙진을 입었어요.”
기억이 일시정지하며 놈과 맞닥뜨린 상황이 캡처되는 것처럼 하나씩 재경의 눈에 들어왔다. 201호 현관 옆 반쯤 열린 수도계량함, 202호 문짝에 붙은 풍림교회 마크, 누군가 바닥에 뱉어놓은 분홍색 풍선껌, 계단참에 묶어놓은 어린이용 스포렉스 자전거, 어디선가 풍겨오는 감자 탄 냄새.…
“안 보여요. 다른 건 전부 사진처럼 또렷한데 놈의 얼굴만 시커매요.” 재경의 말에 최면사가 답했다.
“모든 게 재경 씨 마음에 달렸어요. 용의자를 두려워하는 마음을 이겨냈을 때 얼굴이 선명하게 보일 거예요. 두려움이 사라진 순수한 증오는 어떤 감정보다 순결하고 강하니까요.” --- p.17~19
“6차 사건 때랑 같대요. 머리카락 한 올, 비듬 한 톨 안 나왔답니다. 부검 결과는 내일 나오는데 목에 난 액흔으로 봐선 질식사로 추정된대요. 입에서 한 뭉텅이 나온 종이는 한자 사전이고요.”
일명 수험생 연쇄살인사건은 매번 같은 패턴이었다. 범인은 가난하지만 근성과 야망으로 똘똘 뭉친 수험생들만 골라 뒤에서 끈으로 목을 졸라 살해하고, 입 안에는 책이나 사전을 찢어 물려놓고 사라졌다. 주로 보안이 취약한 고시촌이나 원룸촌 등지에서 벌어졌다. 범인은 지문 한 점, 머리카락 한 올 남기지 않는 용의주도한 놈이었다. 9년 전, 인석의 죽음도 유사했다. 차이점이라면 그는 이미 경찰대에 합격해 수험생이 아니라는 것뿐이었다. --- p.21~22
“멈췄어, 선배. 나 놈들 찾은 것 같아.”
복도를 달리던 두현이 걸음을 멈추었다. 통화가 끊어지며 민재경이라는 이름 석 자와 전화번호가 액정 위에서 서서히 어두워졌다. 두현이 망연자실하게 핸드폰을 바라보던 그때 다시 액정이 밝아지며 타신한테서 전화가 걸려왔다. 두현은 재경이 맨몸으로 범죄 조직을 쫓게 내버려둔 타신이 원망스러웠다. 보채듯 울리는 전화벨을 외면한 채, 두현은 상황실을 향해 걸음을 재촉했다. 재경이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고 낮은 포복 자세로 바위 뒤에 몸을 숨겼다. 어둑한 산속에서 어둠보다 더 짙은 그림자들이 어른거리고 있었다. 흉기를 든 세 명의 사내와 흙바닥에 주저앉은 두 명의 남녀. 셋은 금융사기단 일당이고 둘은 이종현의 부모였다. --- p.92~93
다섯 번째 도전이었고, 그가 사법고시에 불합격한 횟수와도 같았다. 이종현이 몸을 축 늘어뜨리자 의자 헤드에 말려 있던 노끈도 스르륵 그의 등 위로 떨어졌다. 연일 30도를 넘는 기온 탓에 시취는 곧 작은 원룸에 퍼졌다.…
장 형사가 전화기로 손을 가져간 그 순간, 전화벨이 울렸다. 장 형사가 걸려던 손으로 전화를 받았다.
“장석진입니다. 네, 덕서동…… 새빛고시원…… 407호요. 네, 바로 가겠습니다.”
통화를 하는 장 형사의 표정에 먹구름이 내려앉았다. 재경을 비롯한 팀원들이 장 형사의 통화가 끝나기만을 마음 졸이며 기다렸다.
“경위님, 이번엔 진짜 7차 사건이 터진 것 같습니다.”
전화를 끊은 장 형사가 비장한 표정으로 수첩을 들고 일어섰다. 놈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 p.117
타신이 무대를 가린 붉은 장막을 바라보며 씁쓸하게 웃었다. 재경은 그의 말에 반박할 수 없었다. 두현에 대한 믿음이 확고하다면, 굳이 타신의 말을 곱씹으며 불안해할 이유가 없었다. 경찰이 된 후, 그녀는 줄곧 두현을 의지해왔다. 마치 죽은 인석의 일부인 양 그에게 스스럼없이 행동하고 두현 역시 그런 재경을 성가셔 하지 않았다. 손 뻗으면 닿는 자리엔 항상 두현이 있어 든든했으니까. 어째서 그녀는 지금껏 한 번도 두현이 자신을 여자로 바라볼 수 있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는지 한심하게 느껴졌다. --- p.236
두현의 말에 대원들이 맥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짐을 챙겼다. 씁쓸하게 사무실을 나온 재경은 다시 최면사를 찾아가기로 마음먹었다. 매번 그곳을 찾을 때마다 재경은 고통스러웠다. 인석과의 마지막 밤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는 것이, 소용돌이치는 검은 그림자를 마주해야 한다는 것이 두려웠다. 하지만 이번에 최면사를 찾아온 건 범인이 아니라, 단서가 될 만한 인석의 방을 살펴보기 위해서였다. 범인은 물증이 될 만한 지문이나 DNA를 남기지 않았지만, 그의 심리가 반영된 어떤 표지가 남아 있을 가능성이 컸다.
--- p.250~25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