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장 달려가고 싶었지만 우선은 여느 사람처럼 다람쥐 쳇바퀴 돌리듯 하는 일상을 반복하며 먹고 살아야 했다. 에디슨은 부화시킬 요량으로 계란을 품었지만 나는 일생의 버킷리스트를 가슴에 담은 채 하염없는 세월을 곰삭히고 있었다.
여행의 목적지는 남미다. 페루 리마에서 시작하여 볼리비아, 칠레에 이어 아르헨티나까지 시계 반대 방향으로 여행할 참이다. 공처럼 둥근 것이 지구이니까 우리나라의 대척점이라고 흔히 표현한다. 가만히 생각하니 적도를 넘어서서 지구의 남반구로 향하기는 이번이 처음이구나. 사정이 이렇다 보니 해외여행에서 늘 등장하는 시차나 비행시간이 가소로워진다. 내가 상상할 수 있는 시공간의 범주를 벗어나니, 위치에 대한 인식도 항공사에서 알려 준 스무 시간이 훨씬 넘는 비행시간도 아리송하다.
(16쪽, 「남미행 비행기: 까치독사」)
날씨는 짙게 흐렸지만 조금씩 고도를 높여 가자 전망이 트였다. 뒤돌아보면 건너편으로 말안장같이 생긴 산이 층층이 색을 달리한 채 누워 있다. 시루떡처럼 한 층은 갈색, 또 한 층은 감색 그리고 이어서 노란색, 회색 등 다양한 색이 층을 이루고 있다. 잔설이 남아 희끗희끗하게 하얀색으로 채색을 하고 이어진 능선은 눈으로 뒤덮여 있다. 눈이 걷히고 맑으면 햇빛을 받은 색색의 산이 더욱 선명해져 그야말로 무지개산이 될 터이다. 좀 더 찬란하게 빛나는 산 모양을 바라보고 싶은 욕구가 솟구치지만, 날씨도 여행의 일부이므로 나는 이쯤에서 만족하기로 했다.
정상에는 발 디딜 틈도 없이 많은 사람들이 둘러서 있다. 모두 일행과 함께 사진 촬영과 사방으로 둘러선 산군들의 다양한 경치를 구경하기에 여념이 없다. 고도계는 5천 미터를 훌쩍 넘겼다. 툭 트인 공간의 시원한 경치가 정말 일품이고 흔히 보아 온 지구의 모습이 아니라서 더욱 각별하다. 어디서 온 누구네 개인지 모르겠으나 검둥이 한 마리가 사람처럼 건너편 산을 바라보고 앉아 있다. 저 개는 무슨 생각을 저리 골똘히 하고 있는가. 제자리에서 한 바퀴 돌며 사방을 둘러본다. 그리고 천천히 하산하며 높이에 따라 다른 모습을 보이는 건너편 무지개산을 바라본다.
(107쪽, 「비니쿤카: 무지개를 찾다가 나를 보다」)
세상에, 이런 호수도 다 있구나. 물빛에 관한 나의 고정관념을 또다시 바꿔야 할 정황이다. 이 호수의 물색을 제대로 활자화시키기는 정말 어렵다. 기본적인 색깔은 연두 계통인데 보는 각도나 물의 깊이에 따라 모두 달랐다. 더구나 나는 파스텔톤의 색깔을 무척 좋아하는데, 난생 처음 고상하고 품위 있는 연두색을 만나게 되어 날아갈 듯한 기분이었다. 깊은 곳에서 연녹색을 띠는 물빛은 가장자리에서는 무색에 가까웠고, 무슨 광물질이 들어 있는지 하얀 포말이 일었다. 멀리 설산을 배경으로 붉은 바위 아래에 있는 연두색 호수, 신비 그 자체다. 과연 이 물빛은 에메랄드인가 아니면 페리도트인가. 내가 보기에는 그 어느 보석보다 아름다운 빛이다.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재촉하여 버스로 되돌아왔는데 오는 도중에도 미련이 남아 몇 번이나 뒤돌아보았는지 모른다. 호수는 그 세련된 빛을 자랑하며 내게 손짓한다.
(197쪽, 「피에드라스 로하스: 에메랄드 vs 페리도트」)
여행이 끝나는 날, 필연인 듯 만난 소년, 그의 눈빛이 내 눈으로 들어왔다. 소년에게서 내 어린 시절을 읽었다.
72일간의 여행이 끝났다. 어쩌면 이번 나의 남미 여행은 학연, 지연, 혈연 그리고 체면이나 권위 따위의 형식적이고 고착화된 관념에 대한 항거인지도 모른다. 그런 굴레에서 도망치고 싶었다. 아울러 콜럼버스, 마젤란, 훔볼트, 아문센, 마리아 라이헤만큼은 못 되더라도, 도전하지 않았던 나의 인생에 대해 도전하고 싶었다. 비행기는 여행의 마침표를 찍듯이 부에노스아이레스의 국제 공항을 날아올랐다. 여행이 끝나고 비행이 시작되었다. 눈을 감고 무의식의 세계를 넘나든다. 인생이란 무엇인가?
(362쪽, 「산텔모: 인생과 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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