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금을 받지 않겠습니다. 전 여행가가 될 수 없어요.”
“아무나 그런 여행을 하는 것도, 그런 여행기를 쓰는 것도 아니다. 지금까지 여행가 중 그만큼 멀리 가 본 이가 없단다. 그이의 발걸음이 황금 섬까지 이르렀단 말도 있지…….”
“황금 섬이 정말로 있답니까? 거긴 금이 바람을 타고 날아다니고, 강을 따라 흘러서 그저 건지기만 하면 된다면서요?”
내가 놀라 물었다. 노인은 대답 대신 하던 말을 계속했다.
“그만한 여행가가 되지 못한다고 여행가가 되지 못할 건 아니다. 늦잠을 자나 방에 갔다 네가 우는 모습을 봤다. 아무나 그 여행기의 진가를 알아보는 게 아니야. 많은 여행가들이 자기도 그가 갔던 곳에 간다면 그만한 걸 못 쓰겠느냐 하지. 널 받기 잘했구나. 내 눈이 틀리지 않은 게야. 아직은 서가를 지켜도 되나 보다. 넌 이제 진정 여행을 떠날 때가 되었어.”
전날 한숨도 이루지 못했는데 피곤하지 않았다. 동시에 꿈속을 걷는 듯 멍했다. 나는 이 여행기를 필사한 사람처럼 글씨를 곱게 쓰고자 했다. 전에는 왜 글자를 반듯하게 써야 하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알아볼 수만 있으면 되지 뭘 그리 까다롭게 구나 싶었다. 이 여행기를 읽고 나서야 고운 글씨 속에서 여행기가 더 빛남을 깨우쳤다. 이 여행가의 필체는 어떨지 궁금했지만 차마 보여 달라 청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서가 가장 깊은 곳에 간직한 여행기 중 하나이리라. 여행가의 이름은 엘야르히무였다. 엘야르히무, 엘야르히무……. 수없이 그 이름을 되뇌었다. --- p.60
“제가 정말 여행가가 될 수 있을까요?”
“여행기나 쓰고 말을 하여라.”
“저답다는 게 무언지 모르겠습니다. 몇 달간 고민하며 떠돌았으나 답을 찾지 못했고, 종이를 앞에 두면 머리가 아득하고 가슴이 답답해 숨을 쉴 수가 없습니다.”
“그럼 너답다는 걸 몇 달 안에 찾을 수 있으리라 여겼느냐?”
“네?”
“여행가라면 누구든 평생 그 질문을 품고 살아야 하느니라.
매번 종이를 앞에 두고 고뇌해야 해. 첫걸음은 떼었구나.”
노인은 더 이상 투정을 듣지 않겠다는 듯 자기 볼일을 보았다. 도리 없이 방으로 돌아와 종이를 펼쳤다. 흰 종이가 그믐밤에 마주한 절벽처럼 막막했다. 떠돌아다니며 온갖 고난을 겪었다. 한밤중에 한 발만 잘못 디뎌도 천 길 낭떠러지로 떨어질 위태로운 길을 걸은 적도 있었고, 갑자기 비가 쏟아져 강물이 넘쳐 물에 빠져 이제 죽는구나 싶은 날도 있었다. 절벽을 따라 걸을 땐 더듬더듬 발을 디뎠다. 물에 빠졌을 땐 뭐든지 붙들고 매달려 살아남았다. 하지만 텅 빈 종이 앞에서는 붙잡을 것도, 매달릴 것도, 발을 디딜 곳도 없었다.
고난의 연속이었다고 해도 길이 싫었던 적은 없었다. 언제나 다음에 도착할 마을을 설레며 기다렸다. 이렇게 고통스럽고 힘든 길은 내 길이 아니었다. --- p.76~77
나는 피식 웃음을 흘리고 바닥에 대자로 누웠다.
“야힘, 여행가는 서로 돕는 거라 하셨죠?”
“그랬지.”
“저도 마음 편히 머물게요. 왜 이리 잘하나 계속 불안했거든요.”
“좀이 쑤시지 않나? 발이 근질근질하지?”
“이러고 어찌 사세요?”
“어쩌겠나…….”
야힘이 부드럽게 웃었다. 나는 야힘 앞에서 수많은 말실수를 했다. 야힘은 매번 탓하지 않고 넘어갔다. 하지만 이 말만은 절대 하지 말아야 했다. --- p.136
내가 야힘만큼 나이가 들면 저만큼 여행기를 쓸 수 있을까? 그가 검은 사막에 다녀온 나이에 나는 서가에서 첫 여행기도 마치지 못하고 낑낑댔다.
나는 게을렀는가. 난 대충 여행했나. 나도 최선을 다해 내 방식을 찾으며 여행한 것 같은데. 애초에 그 방식이, 내가 너무 하찮아 여기서 노력한다고 발버둥 쳐 봐야 아무 소용없는 걸까. 작은 그릇에 아무리 눌러 담은들 큰 그릇에 적당히 담은 만 할까. 혹 내가 야힘 나이에 서가에 갔다면, 그럼 달라졌을까?
오래전 엘야르히무의 여행기를 읽고 나는 안 될 거라 너무 쉽게 좌절했나. 더 치열하게, 최선을 다해 썼다면, 기죽지 말고 야힘을 목표로 삼았다면, 더 먼 곳을 탐색할 용기를 냈다면 어땠을까. 지금이라도 그래야 할까. 난 아직 젊다. 내가 그럴 수 있을까? 뱁새가 황새 따라가다 가랑이만 찢어지려나. 그때 엘야르히무의 여행기를 읽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그럼 앞서 포기하지 않고 지금보다는 나은 여행가가 됐을까? --- p.171
“보이지 않으니 보이지 않는 녹색이네.”
“보이지 않는데 거기 있는지 어떻게 안단 말이오?”
“바람이 눈에 보이지 않아 없다 할 셈인가?”
“나뭇가지가 흔들리고 머리카락이 휘날리지 않소.”
야힘은 토론하고 싶지 않았다. 그는 괜한 질문을 했다 후회했다. 이제 와 믿는 척 굴어 봐야 신뢰만 잃을 것이다. 노파는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쉬었다.
“그럼 물이 녹색으로 보여서 그렇다고 하면, 믿겠나?”
“내가 살아온 세상의 규칙으로 그대의 말을 판단하지 않기위해 애쓰…….”
“그자들이 바로 그랬지! 자기들 세상의 규칙대로 우릴 판단하며 수많은 이유를 들어 우리를 짐승이라고 했네. 그중 첫 번째가 우리가 제대로 된 옷을 입지 않고 흙바닥에서 잔다는 거였네. 우릴 억지로 자기들 세상으로 끌고 가 음식과 옷을 주며 우릴 돌본다고 했어. --- p.267
다른 이와 너를 비교하지 말아라. 위대해지거나 길이 남을 여행기를 써야 한다며 네 발걸음을 무겁게 하지도 마라. 영주의 정원에서 정원사가 공들여 가꾸는 데이지도, 돌보는 이 없어도 알아 피고 지는 채송화도 모두 한 송이 꽃이다.
사람이 늙듯 산도 언젠가 깎이고, 강물도 흐름을 바꾼다. 여행가는 그 찰나를 종이에 담는 자일 뿐. 어떻게 써도 풀꽃 하나보다 초라할지니. 바람결에 흩날리는 풀씨처럼, 강을 따라 떠도는 낙엽처럼 그리 걸어라.
--- p.3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