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9/11/15 조창완(chogaci@hitel.net)
94년 중국 문화계의 대부격인 '왕몽'이 하나의 화두는 던진다. '과거 50년대, 60년대, 70년대 같은 시기에 우리는 휴머니즘(Humanism, 인문정신)을 충만하게 가지고 있었는가?.... '금전중심의 실리주의가 도덕의 상실을 초래하고 사회 기풍을 타락시킨 원인이 된 것인가?(앞 뒤 순서 무시)'라고. 이 말을 던진 왕몽은 80년대 중국 문화부장(한국의 문화부장관 이상의 권한)을 지낸 지식인 겸 정치인이 던진 말이어서 많은 논란을 일으킨 것일까. 아니면 테크노그라트들이 득세하기 시작한 이후 서서히 권좌에서 물러나기 시작한 인문 지식인-정치인들의 위기감이 나온 것일까? 이도 아니면 텔레비전-영화-오락에 일반인들의 시선을 빼앗긴 문학 등 인문 분야의 위기감이 우회적으로 도출된 것일까. 어떻든 89년 천안문사태의 책임을 지고 물러난 전력이 있던 왕몽의 이 말은 신좌파 경향의 왕빈빈과의 논쟁(二王之爭)으로 얼마간 중국 학계를 달구었다.
그 몇 년후 성실한 중국학 연구자 백원담이 이 논쟁을 인문학논쟁이니, 공자 논쟁이니 시끄러운 한국으로 옮겨봤다. 물론 지금까지 반응은 썰렁하다. 공자를 놓고 살리니 죽이니 할 때는 학자들도 제법 글을 쓰더니, 정작 전범이 될만한 텍스트가 나와도 일언반구하나 없는 한국 인문학계의 부실함이여.
다시 문제의 근원 왕몽에게 가보자. 그는 계획경제의 허구를 주장하는 것을 기반으로 시장경제에서만이 인문정신을 찾기 쉬워진다는 주장을 편다. 그는 인문정신에 대한 유일한 평가기준을 설정하지 말고, 인문-비인문 나누는 흑백논리에 빠지지 말고, 인문정신을 배타적으로 규정하지 말 것을 주장한다. 그가 단적으로 내세우는 인물이 '왕삭'이다. 왕몽은 노신은 노신 하나일 때, 노신이지 노신 같은 이가 50명이면 끔찍하다는 식의 논법을 편다. 그러면서 '건달문학'(몇 사람의 이야기로 추론하면 김홍신의 '인간시장'같은 책인 것 같다)으로 일반인들에게 크게 어필하던 왕삭을 무시하지 말라고 말한다. 또한 유럽사상을 토대로 하는 젊은 이들의 정신을 호되게 비판한다. 그러면서 시장경제를 바탕으로 한 등 따숩게 한후 인문정신도 있지 않냐는 논리를 편다.
왕몽의 글에 가장 전위적으로 비판하는 이가 왕빈빈이다. 왕빈빈은 배를 불리는 것이 인문정신 왈왈하는 것보다 낫다는 왕몽의 견해를 맞서며 정신적 아노미현상이 가져온 일본의 옴진리교 사건을 든다. 물질의 팽창으로 인한 '영혼의 공동화'를 지적하고, 중국에서 이런 일을 막기 위해 인문정신을 세울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왕빈빈이 말하는 인문정신이란 '허무맹랑하고 만질 수 없는 깊고 미묘한 것이 아니라, 구체적이고 아주 실재적인 것으로 인문지식인이라면 누구나 당연히 갖고 있어야 할 심경이고, 이들 지식 계층의 정신적 특징'이라고 정의한다.(162p) 이런 측면에서 왕빈빈은 왕몽이 옹호한 왕삭의 냉소가 아닌 문혁기에 장지신의 정신을 말한다. 장즈신은 반당, 반혁명적인 말을 과감하게 하며, 광기의 시대를 비판하다가 감옥생활을 한 인물이다. 왕삭이 아닌 장즈신의 저항정신만이 광기의 역사에서 사람들을 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두사람의 견해에 데리다 연구가 진효명과 장이무 등의 글이 첨가해진다. 진효명은 두사람이 이끈 인문논쟁이 결코 상위의 가치가 아니라 다른 인문적 가치와 수평적으로 다루어질 것을 강조한다. 장이무 역시 인문정신을 다른 담론과 상호보완, 교류해야 한다는 입장을 편다.
왕몽 등의 견해가 개인의 생각을 중심으로 한 주장식이었다면 앞에 옮겨진 글들은 상해 등에서 이루어진 이 논쟁에 대한 토론을 담고 있다. 왕빈빈이 참여한 첫 번째 논쟁은 비판정신이 무엇인가에 대한 논의가 깊다. 중국 역사에서 지식인들이 통치계급의 공개적 혹은 잠재적 합작자가 버려 인문정신 또한 바로 이때 파열되어 버렸던 것이라는 '비진종'의 논의와 유사한 구조로 이어지는 이 논쟁에서는 절조있는 지식인들의 항쟁정신을 높이 산다. 절조있는 비판정신이란 앞에서 논한 장즈신의 저항정신 등 문자옥(글로 인한 정신적 피해) 듣기를 두려워하는 자세에 대한 전반적인 비판이다.
물론 이런 비평은 '주역'에서 '인문을 관찰하여 천하를 변화시킨다'를 적극적으로 해석해 인문정신으로 변화를 주도하는 세력으로 성장을 논하는 방향으로 간다. 이런 입장은 '주학근'이 '기술적 지식인은 과학적 책임을 완성할 수 있을 뿐 당면 현실사회에 대한 관심은 감당할 수 없다'는 전제 등을 바탕으로 한다.
이론비평에서 현장비평으로 연결되는 이 논쟁은 단순히 사상에 대한 논쟁에 그치지 않고, 비평이나 문학 등에서 나타나는 인문정신 결핍을 검색한다. 가장 빈번하게 등장하는 이가 논쟁의 바탕이 된 왕삭이다. '장굉'은 왕삭의 문학이 조롱이지 풍자는 아니라며 냉철하게 피판한다. 이밖에도 마원, 격비, 여화 등 중국현대문인에 대한 이들의 짧은 촌평도 독자를 반갑게 한다. 영화에서는 장이모가 중심에 등장해 관심을 끈다. 홍등, 붉은 수수밭에서 장이모가 보여주는 정신에 대한 평가는 전반적으로 그가 기교에서는 인문정신에 충실하지만, 작가적 비판의식이 부족하다고 본다. 장이모에 대한 중국 내부의 평가를 접하기 어려운 우리들에게는 즐거운 반추일 것 같다. 국내에서는 경남대 유장근 교수가 이런 해석에 적극적이다.(관심이 있다면 검색엔진에서 유교수의 이름으로 찾으면 된다) 특히 돈을 목적으로 한 상품문학의 흥기를 비판한다. 최의명은 '노신이 말한 속임과 기만이 어떻게 이처럼 오랫동안 더욱 새롭게 나타나는지 정말 노를 일입니다'고 개탄한다.
책은 비슷한 내용의 중복성이 강하지만 각기 특색을 갖고 있다. 구성에서는 순차적으로 왕몽과 왕빈빈의 글부터 서두에서 놓았으면 읽기가 쉽지 않았을까 싶다. 토론의 수준은 생각이상으로 높지 않다. 우선 발언권의 한계도 있을 것이며, 스스로가 인정하듯 중국 인문학의 침체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논의 자체가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은 사실이다. 논쟁 자체도 기피되는 한국의 인문학이나 유교논쟁에 비해 이정도의 성과물을 내놓을 수 있다는 것도 부럽다. 개인적으로 조선일보에서 진행되던 인문학 논쟁을 자세히 봤는데, 우리의 토론 수준은 지극히 낮다. 최소한 논술의 자유는 보장된 한국 인문인들이 한번쯤 부끄러운 자세로 읽어볼만한 책이 아닌가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