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나 K, 안나 M, 안나 H, 안나 U, 그리고 A, V, R, 복수(複數)의 안나.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해명하지도 않는다. 나는 그 소설을 쓰기 위해 어떤 여자를 미행했다. 그리고 그 소설은 안나, 너를 생각하며 쓴 소설이다. 안나. 미행은 명백한 혐오이다. 한 명의 사람을 그가 가진 외모의 아름다움과 관능으로 간주하는 것 역시 명백한 혐오이다, 안나. 그런 의미에서 안나. 나는 너를 혐오하고 있다.
언젠가 우리에게 젠더라는 개념 자체를 폐기하는 날이 오겠지. 섹스는 진작 사라질 거야. ‘젠더 없음’, ‘젠더 아님’이라는 뜻의 에이젠더 역시 하나의 젠더로서 존재하는 이상 온전하지 않아. 그것은 존재하지 않음으로써 존재하지 않지. 각자의 젠더를 구분하지 않고 오직 사람만 남기는 것, 서로의 젠더를 구분하지 않고 오직 사랑만 남기는 것. 언젠가 올 거야. ---「박경주 / 안나」중에서
로이는 바다보다 낮은 곳에서 온 사람이었다. 그 나라는 물의 역사가 깊었다. 한때 그 나라 사람들은 바다에게 지배당했다. 제대로 된 댐도 없던 시절이라 홍수가 매년 사람들을 덮쳤고 그들은 아주 쉽게 죽었다. 바다에 대한 증오심을 심장 깊숙이 숨긴 채 그들은 신에게 자비를 구했다. 어린아이들을 바다의 제물로 바쳤다. 아이들의 피로 바닷물이 검게 물드는 끔찍한 재앙의 시대였다. 물이 휘몰아치는 시대였다
로이는 연오를 온전히 받아들이지 않았고 다르게 받아들이지도 않았고 바다 위의 달빛처럼 흐르도록 내버려두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연오는 후회했다. 그에게 연수의 죽음을 그토록 쉽게 말해버린 것을. 어색해지지 않을 수 없는 그 죽음의 분위기. 연오는 정말로 그게 싫었다. 잔인한 자연의 법칙들은 항상 너무 심각했다. 연오는 그녀의 마음이 불안함으로 울렁이는 것도 싫었다. 그녀는 다리에 코끼리 문신을 크기 별로 새겨 넣은 로이의 여동생을 상상했다. ---「김주원 / 에메랄드」중에서
“어떻게 알아들어요? 할아버지는 한 번도 그러신 적이 없어요!”
리모의 말에 스마트 TV가 코웃음을 쳤습니다.
“난 달라. 유학파거든. 나를 만든 박사님은 나보고 사람들의 말을 잘 알아
들으라고 온갖 지식을 알려줬어. 너 같은 무식하고 촌스러운 애가 나랑 콤
비가 된다고? 어이가 없다 정말. 전에 있던 그 구닥다리 TV에게나 딱 어울
리네.”
리모는 화가 났습니다. 자기를 욕해서가 아니라, 할아버지를 욕해서였습니다. ---「김현우 / 리모와 티브 할아버지」중에서
“안녕? 너희는 누구야?”
주원이가 교과서 외의 책을 가방에 넣은 건 이번이 처음이었으니 우산이 이렇게 물을 만도 했죠. 그러나 책들은 책에 적힌 내용 말고는 아무것도 모른답니다. 책을 만든 사람들 대부분은 자기 생각을 알리려고만 하거든요.
“남을 알기 전에 자신을 알라.”
『초등학생을 위한 명언 150가지』가 말했어요.
“3단 우산이잖아.”
『3학년? 책가방 동화』가 말했죠.
“우산? 나뭇잎을 말하는 거야?”
『프레드릭』이 말했어요.
“뿡!(몰라!)”
『아니, 방귀 뿡나무』도 말했답니다.
우산은 책들이 대답해주는 게 너무 기뻐 신이 났어요.
“주원이의 가방 속에 온 걸 환영해. 너희가 오래오래 이곳에 있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바깥 이야기도 좀 들려줬으면 좋겠어. 너희는 어떤 비를 제일 좋아하니? 너희가 있던 곳에서는 언제, 어떤 때 비가 내렸어?”
그런데, 이 말이 문제였던 거예요. 책들은 그런 질문에 대답하고 싶지 않았어요. 빗물은 책들이 가장 무서워하는 것이거든요 ---「김현우 / 비가 내리면」중에서
S#3. HO 엔터테인먼트 회의실, 낮.
HO엔터테인먼트의 한 회의실. 희진과 상사가 회의를 하고 있다. 희진은 잔뜩 군기가 들어 있는 모습. 회의실 한켠에 있는 프로젝터에는 ‘청춘뮤지션’의 앨범 커버 시안이 띄워져 있다.
상사 이번 ‘청춘뮤지션’ 앨범 참여 스태프들 목록 어딨어?
희진 ( 종이 더미를 내밀며 ) 여기 있습니다.
상사 연락은 다 된 거지? 대중들이 하도 청춘뮤지션에 거는 기대가 커서 단단히 준비해야 돼.
희진 엔지니어한테는 다 연락 돌렸구요. 지난번 말씀하셨던 3번 트랙 작사가님하고는 ( 시계를 보며 ) 한 시간 후로 미팅 잡았습니다.
상사 3번 트랙이면 한정규 작사가 맞지? 우리 그 트랙 가사 수정하기로 하지 않았나?
희진 네. 맞아요.
상사 희진 씨 그 사람 처음 보는 건가?
희진 네.
상사 한정규 엄청 까다롭다. 살살 비위 맞추면서 미팅 진행해.
희진 까다롭다구요?
상사 그럼. 자기 가사에 조사 하나도 못 바꾸게 하기로 유명해.
희진 아티스트가 요구해도요?
상사 응. 그래서 저번에 나인뮤직 앨범 엎어진 거잖아. 그때 경리가 발음 어렵다고 눈물’로’를 눈물’이’로 바꾸자고 했다고.
S#30. 정규의 작업실 거실, 밤.
정규의 작업실로 찾아온 상민.
상민, 정규의 어지럽혀진 책상을 보고
상민 새로운 거 들어가?
묻는 상민에게 자신의 작사 노트를 펼쳐서 보여주는 정규.
정규 이거 봐봐.
상민 뭔데?
정규 그거 누구 글씨인 줄 알아?
Insert. 작사 노트 마지막 페이지 가장자리에 ‘사랑은 첫 순간을 기억하는
게 아니라 매일 새로운 사랑에 빠지는 것이다.’ 라는 메모.
상민 글쎄? 여자 글씨체 같은데?
정규 희진이 글씨야.
상민 여기 위에 쓰여 있는 청춘뮤지션 2집 가사, 이건 뭐야?
정규 희진이가 썼던 거 그대로 가사 만들었어.
상민 (놀리는 듯) 한정규. 완전 로멘티스트다?
정규 희진이가 알면 깜짝 놀라겠지? 저번에 작사 노트 보여준 적 있는데, 언제 몰래 써놨더라고.
정규, 부끄러운 듯 웃는다.
정규 희진이가 더 로맨티스트지. 매일 사랑에 빠진다라니...얼마나 멋진 말이야.
S#52. 식당, 저녁.
밥을 먹으러 식당에 온 정규와 희진.
정규 어떻게 가사를 쓰는지, 높은 음에선 어떤 가사가 음을 내기 쉬운지, 한 구간에 몇 개의 단어가 들어가는 게 적당한지 넌 모르잖아.
희진 그래서 지금 너 잘났다는 거야?
정규 가사가 너무 어려워서도 안 되고, 친절해서도 안 돼.
희진 나한테도 그렇게 말해줘. 네 가사처럼 좀 조심스럽게.
정규, 화가 난 듯 자리에서 일어난다.
정규 그러면 나 아무 말도 못 뱉어. 너한테 하는 말까지 하나하나 다 생각하고 뱉으면...나 아무 말도 못 해.
희진 넌 네 가사가 사람들 귀에 들리길 바라면서 정작 네 귀는 닫고 있는 거 몰라?
정규 다음에 얘기해. 말해봤자 서로한테 상처만 준다.
희진 다음? 아니. 네 말대로 서로 상처만 주니까 우리 이제 그만 하자.
---「호은혜 / 우리라고 다를까」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