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차피 사고 분석 나오면 네가 입 아프게 무죄라고 말하지 않아도 무죄라고 나와.” “전 무죄라고 안 했는데요?” “뭐?” “무슨 죄인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무죄라는 건데요?” 머리 큰 체크무늬 조사관의 입이 굳게 다물어졌다. 남자의 시선이 컴퓨터 안에 새겨진 숫자를 읽고 있다. 십팔 세, 임석, 맹랑한 새끼네. 조사관에게서는 담배를 끊을 무렵 아버지에게 나던 은단 향이 피어올랐다. 그의 손이 신경질적으로 셔츠 주머니를 더듬는 것은 담배를 끊은 지 얼마 되지 않았다는 증거였다. “제가 운전한 거 맞아요? 블랙박스에 그렇게 찍혀 있어요?” {중략} “네가 양촌에서 운전하는 걸 본 사람이 있고 구성구는 네가 횡설수설하며 논두렁에 처박힌 차를 끌어 올리려다가 사람을 치고 의식을 잃었다는데 넌 기억이 없고. 그래서 묻는 거야. 이 모든 게 약과 는 상관이 없나.” 섬광처럼 짧은 기억 하나가 튀어 올랐다. 운전대가 달려들어 내 코를 물어뜯던 기억을 끝으로 모든 것이 암전이었다. “그냥 기절한 것처럼 의식이 끊겨 있었어요.” --- p.96
보이는 게 다라고 믿는 건 순진한 게 아니라 머리가 나쁜 일 텐데. 테니스에서 가장 비싼 몸값은 라켓이 아닌 결승 코트임을 녀석들은 알지 못하는구나. 그 코트 안에 들기 위해 김밥으로 끼니를 때우며 전국 유소년 대회를 뛰어다녀야 하고 땡볕에 살갗이 까지도록 훈련을 하는 지옥 같은 날을 보내야 함을. 그것이 행간을 읽을 수 없는 녀석이 모르는 내 세계다. 성공과 실패가 철 수세미처럼 똘똘 뭉친 이 세계를 취객의 주머니나 털고 본드나 빨던 녀석이 뭘 안다고. “씨팔! 얘기 좀 하자니까 모가지에 깁스했네. 혓바닥도 반 토막이고.” “난 가진 거 좆도 없어.” 그 말에 해골이 킥킥대며 다가와 내 어깨에 손을 올렸다. 툭툭 어깨를 치며 나를 보는 녀석의 눈빛이 날카로웠다. 해골이 나이가 많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존대를 하지 않은 건 빌어먹을 근성 때문이다. “너 신문에도 나오는 유명한 선수라며? 뭐 호주인지 어딘지 간다고 대문짝만 하게 나오고 그랬다던데.” 대답을 듣기 위해 해골의 얼굴이 바투 다가왔다. 새카맣게 마른 그 입술은 내 테니스 인생이 끝났다는 말을 들을 때까지 물러서지 않을 듯했다. “별로 상쾌한 얘기가 아닌가 보네. 알았어, 그만 짐 풀고 편히 있어. 어차피 유진인가 그 여자애 죽으면 네 인생은 호주가 아니라 똥통으로 직행일 테니까.” 해골의 손이 내 뺨에 닿았다. 뺨에서 잠시 멈췄던 그 손은 벽에 붙은 또 다른 나방파리를 손바닥으로 짓이겨 죽였다. 보란 듯이, 겁을 먹으라고. --- p.130
“그래서 그 10년 때문에 머리가 어깨에 가 붙어 앉은 거냐? 구대철이 정말 테니스를 못 하게 할까 봐? 너 등신이야? 호구 새끼야? 그 말을 듣고 그 새끼 코뼈 하나 안 부러뜨려 놓고 그대로 내보내? 그런 양아치 다리병신 만들어 놓을 배짱도 없이 이 지옥을 버티고 있는 거냐고!” “…….” “말을 해, 새끼야! 그도 다시는 테니스로 장사 못 하게 해준다고.” 어금니를 깨물었지만 눈시울이 붉어졌다. 힘을 준 손가락 마디마디가 끊어질 듯 위태로웠다. (중략) 감당할 수 없는 감정들이 한순간에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임 변은 틈을 주지 않고 나를 다그쳤다. “테니스 인생이 끝인지 아닌지를 정하는 건 구대철이 아니라 너야. 그 인간이 아니라 너라고! 10년? 개수작 말라고 해.” “내가 코트에서 어떤 놈인지는 모르잖아요.” “이 전쟁터에서 네가 어떤 놈인지는 잘 알아. 그 전쟁터에서도 마찬가지일 테고.” (중략) “그래서 내가 코트에서 마린 실리치처럼 성공할 수 있다고 믿어요? 정말 믿어요?” “……석아.” 임 변은 처음으로 내 이름을 불렀다. 단 한 번도 이름을 부르지 않음으로 제대로 선 긋기를 하고 있던 금기를 깨버리며 말했다. “너, 지금 감별소 안에서 제일 요주의 인물이야. 아이들, 선생님들, 원장까지 모두 너만 보는 것 같다. 너는 이 검은 바닥에서 야광 물고기 같은 놈이야. 사람들을 홀리는 놈이라고.” 임 변은 가방에서 근육통에 쓰는 로션을 꺼내 내 앞에 내놓았다. “의무실에 기증해 둘 테니까 시간 날 때마다 가서 발라. 변호사 생활 짬밥에 여기가 처음이겠어? 뻐근한 데 바르면 통증은 좀 덜할 거다. 힘들다고 얘기해도 그 안에서 벌어지는 일을 대신해 줄 사람은 없어.” 내가 온몸을 두들겨 맞는다는 걸 아는지 고맙게도 450밀리미터 대용량이다. 그 근육통 로션을 기부하는 게 처음도 아닐 것이라 짐작되었다.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도 덤비지 말고 한 놈을 죽이든 두 놈을 죽이든 천천히 밟고 올라가. 빨리 해결한다고 총알 한 발로 뭔가를 끝내는 카우보이가 되지는 마라. 카우보이가 되면 저도 총알 한 발 로 인생이 끝나 버리니까. 그리고 감별소에서 죽으면 골치 아파진다.” 임 변은 잔인하게도 그 마지막 당부를 잊지 않았다. --- p.321
자만과 어설픈 객기로 가득 찬 열여섯 살은 코트를 뛰지 않고 오직 기술로 게임을 이기는 방법만 가르치는 속물인 그의 충고를 귀담아듣지 않았다. 돈 냄새만 좇는 배불뚝이 코치가 서브 머신처럼 제자리에 서서 공을 던져 줄 때마다 잇새로 경멸을 내뱉었다. 내 실력으로도 충분히 이길 수 있는 이름 없는 상대였기에 대꾸할 가치도 없는 정보였다. 하지만 왼 발목이 좋지 않다던 그 녀석은 나를 코너에서 코너로 몰아붙이며 진을 빼려 하고 있었다. 뛸 수 없는 자신의 약점을 숨기기 위해 오히려 내 힘을 빼려는 의도였다. 한 세트만 넘어가면 내가 녀석을 이기리란 것을 잘 알았다. 하지만 문제는 이기고도 내가 입을 피해였다. 체력이 산골짜기 해처럼 빠르게 떨어지고 있었다. 녀석에게 힘을 소진한 채 결승으로 가게 되면 준결승을 가뿐히 이기고 올라온 상대 선수를 당해 낼 재간이 없으리라는 걸 무거운 몸이 말하고 있었다. 그 몸이 움직이는 동안 생각은 들어설 자리가 없다. 모든 본능이 명령을 내리고 몸은 본능을 따라 움직일 뿐이다. 나는 왼으로 공을 몰아넣었다. 녀석이 내 왼 서비스 라인에 서 있으면 중앙 라인 바깥으로 공을 흘렸고 오른에 있으면 왼 바깥 라인으로 꺾어 버렸다. 폴트 없이 서브 공 네 개만으로 한 게임을 마무리하는 순간 녀석의 얼굴에 처절함과 분노가 뿜어져 나왔다. 녀석이 외치고 싶은 그 단어가 내 입안에도 피비린내를 풍기며 고여 있다. 그래, 염병할 스포츠 정신! 왜 달릴 수 없는 다리를 물어뜯었냐고 발목을 다친 가젤이 억울함을 호소했다. 그러나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질문이 아니다. 내가 줄 수 있는 답은 녀석이 가젤이란 사실이고 정글 같은 이 세계의 포식자는 이미 결정되어 있다는 것뿐이다. 경기가 끝나고 네트 너머로 건넨 녀석의 손이 땀으로 흥건했다. 축축한 손을 맞잡는 그 순간, 어쩌면 프레임 속 사자처럼 보였던 그들도 실은 배고픔을 숨긴 하이에나가 아니었을까. 긴 앞다리를 욱여넣고 군침 도는 썩은 고기를 외면하며 위엄을 지켜야 하는 처절한 삶을 살고 있는,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