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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이 흐르는 강물 앞에 서거든 1

철이 흐르는 강물 앞에 서거든 1

주연 | 가하 | 2019년 01월 30일   저자/출판사 더보기/감추기
리뷰 총점10.0 리뷰 1건 | 판매지수 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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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19년 01월 30일
쪽수, 무게, 크기 582쪽 | 722g | 148*200*35mm
ISBN13 9791130033594
ISBN10 11300335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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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1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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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나저나 여왕께서 이리 직접, 저희 잘리어를 방문하신 연유에 대해 여쭙고 싶은데.”

마침 그가 물어왔다.

“이렇듯 은밀하게 방문하실 정도면 중대한 이유겠지요.”
“그건…… 공석이 아닌 자리에서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상념을 털어버리고 에르완이 허리를 곧게 폈다. 샤른호르스트 2세에 대한 개인적 감상보단 잘리어에 방문한 본래 목적만을 상기하려 애썼다.

“이런, 저는 여인과 단둘이 사석을 갖지 않는데.”
“저는 여인이 아니라 국왕입니다.”
“…….”
“여자의 몸이지만, 국왕의 심장을 가지고 태어났습니다. 저는 아까부터 국왕으로서 앉아 있었는데 폐하께서는 남자로 앉아 계셨나 봅니다.”

상대의 입가에 맺혀 있던 미소가 일순 일그러지는 듯했다. 에르완은 개의치 않고 말을 이어갔다.

“이제 저와 이야기를 나눌 생각이 드십니까?”
“……이쪽으로 오시죠. 따라오지 마라, 후베르트.”

에르완은 앞장서서 어디론가 향하는 그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공기를 적시던 오케스트라의 음악이 점점 사그라졌다. 회장으로부터 멀어지고 예를 갖추는 심복들도 줄어들 즈음, 그늘에 가려 눈에 잘 띄지 않는 방이 나왔다. 두 사람의 발소리만이 공허한 복도를 울렸다.

“이 정도 자리쯤이면 되겠습니까?”

에르완이 주변을 돌아보았다. 아직 경계의 빛이 완연했다. 바스티안이 창가에 비스듬히 기대며 팔짱을 꼈다.

“이곳엔 아무도 오지 않습니다. 이제 그만 말씀하셔도…….”
“혹 로마노프 어를 하실 줄 아십니까?”
“예?”
“할 줄 아십니까?”

물음 자체가 로마노프 어였다. 에르완이 답을 구하는 눈으로 바스티안을 바라보았다. 그가 무언가 말을 하려다 도로 입을 닫았다. 잠시 후 열린 입에서는 여왕과 같은 언어가 흘러나왔다.

“물론입니다.”

로마노프는 무려 반세기 전에 지도에서 사라진 변방의 소국가다. 그들이 다스리는 두 나라뿐 아니라 부르군트로부터도 멀리 떨어져 있다. 특이하게도 로마노프는 소민족답지 않게 자기들만의 언어를 썼는데, 문법이 까다롭고 외국인에게도 가르쳐주려 하지 않아 배우기 쉽지 않았다. 적어도 이 대륙에서는 이제 그 언어를 아는 이는 다섯도 되지 않았다.

에르완은 로마노프 어로 대답이 돌아온 사실에 적잖이 놀랐다. 듣기로 샤른호르스트 2세는 제대로 된 교육을 받고 자라지 않았다. 그럴 기회가 없었다는 편에 가까웠다. 그런데 어떻게 사어(死語)에 능한가.

“자, 이제 지나가는 이가 있어 엿듣더라도 그 뜻을 알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현실의 목소리가 궁금증을 잘랐다. 습관적으로 남자의 눈을 좇았다. 대제의 눈 안에 은밀하게 새겨진 기색이 읽혔다. 흥미로움.

“이렇듯 비밀리에 방문하고, 저와 사석을 만들고, 아무도 없는 공간조차 믿지 못해 로마노프 어까지 써가면서 해야 할 말씀. 그것이 무엇입니까?”
“저는.”

잠깐 말을 끊고 호흡을 가다듬었다. 이 제안을 정말 해도 될까. 답지 않은 망설임이 발목을 잡았다. 제안해야 하는 이유, 거절당했을 때의 해결책, 다른 협상안. 수많은 생각이 제 길을 찾아 갈래갈래 퍼져나갔다. 그 끝은 항상 조국과 백성의 안녕에 닿아 있다.

왕은 그들을 지키기 위해 존재한다. 무모할지라도 해야만 한다.

에르완이 무거운 입술을 떼었다.

“저는 이 잘리어에, 저희 발루아 군대를 들여놓고 싶습니다.”

목소리가 적막을 꿰뚫었다. 마치 그녀의 귀에는 메아리로 울리는 것처럼 들렸다. 고개를 들었다. 바스티안은 아까와는 다른 방식으로 웃고 있었다.

“이건 꽤 급작스러운데요.”

본디 무감각했던 얼굴에 기이한 미소가 늘어졌다. 고결하게 뒤집어썼던 껍질이 한 꺼풀 들렸다. 눈빛이 순식간에 요요해졌다.

“전쟁 선포치고는 말입니다.”

한쪽 입꼬리가 비스듬해지는 미소가 위험천만하다. 날카롭게 갈린 칼날보다 냉정했다. 어쩌면 이자의 본모습이 살짝 드러났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돋아나는 적의.

“전쟁 선포를 이곳까지 행차하셔서 친히 알려주시다니.”
“…….”
“이거 참, 감사하다고 해야 할지.”

산등성에 내려앉는 노을처럼 목소리가 느리고 무겁다.

이쯤에서 오해를 풀기 위해 나서야 했지만 에르완은 입을 여는 대신 상대를 관찰했다. 반쯤 풀린 눈매와 빈틈 많은 어투, 그리고 비뚤게 기울어 있는 자세까지. 협상을 하려면 상대에 대해 알아야 하는데 전혀 아는 바가 없다. 출구 없는 미로 앞에서 입구만 바라보고 서 있는 것 같다.

“좋은 걸 가르쳐주셨으니 저도 유용한 정보를 하나 알려드리지요.”

창문을 등지고 선 바스티안의 자세가 삐딱해졌다.

“잘리어는 외국끼리의 전쟁에 참전하지 않은 역사가 오래인, 중립국입니다. 군대가 있다 하나 전쟁 경험이 전무하니 그 전력의 반도 발휘하지 못할 테지요. 잘리어의 모든 게 바뀔 것입니다. 광장에 모여 있던 철학자는 입을 다물 것이고 시인의 노래는 멈추겠지요. 여자고 남자고 노인이고 어린이고 가릴 것 없이 죽을 것이고…… 어쩌면 저는 식민지의 꼭두각시 왕이 될지도 모르지요. 그리되지 않기 위해 저항은 할 테지만, 판도를 바꿀 정도는 되지 않을 겁니다. 경험 없는 지휘관에 경험 없는 군사라. 그야말로 곡괭이로 바위를 치는 격이 아니겠습니까.”

그가 말을 끊고 슬쩍 웃었다.

“하지만 저는 말입니다, 잘리어는, 저희에게 속한 영토를 넘보려 든다면 그것이 곡괭이든, 테이블 위에 있는 와인잔이든 집어 들고 싸울 겁니다. 부러진 곡괭이로도 바위에 간 금을 찾아 부술 순 있으니까. 만일 패전한다 해도 저희가 잃을 병력의 반 이상은 물어뜯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
“제 뜻을 오해하셨습니다.”

에르완이 마침내 침묵을 깨었다.

“그렇다면 제가 오해하지 않도록 설명을 해주시겠습니까? 다만 충분하셔야 할 겁니다.”
“설명드리겠습니다.”
“그리고 전 관찰당하는 걸 그리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가 나긋나긋한 어조로 말했다. 에르완이 한숨과 함께 시선을 거두었다.
--- 본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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