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권
루다는 속도를 더욱 높였다. 제일 선두에서 뒤돌아 있는 검은 머리의 어떤 사내가 보였다.
뒤돌아 있기에 얼굴은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루다는 알 수 있었다.
사귄 햇수가 몇 년인데. 내가 너 하나 못 알아볼까 봐. 저 뒷모습, 확실했다.
몇 번이나 보고 안았던 그 모습이었다.
루다가 땅을 박차고 달려가며 소리쳤다.
“최형우!”
꼭 찾아서 데리고 돌아가야 할 남자 친구의 이름을.
하지만 남자에게서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도대체 왜?
내 이름이 불렸을 때 그것이 진짜 이름이라면 보통 반사적으로 반응하고는 한다. 하지만 형우는 반응하지 않았다. 도대체 왜?
이유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조금씩 불안해져 왔다.
우선 남자 친구를 뒤돌게 만들어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 남은 것은 한 가지 방법밖에 없었다.
정말 부르기 싫지만 불러야 하는 이름. 그가 절대 반응할 리 없는 이름.
“루드비히!”
그가 반응하면 안 되는데. 형우는 루드비히라는 이름보다 최형우라는 이름이 훨씬 익숙할 텐데.
하지만 루다의 예상은 철저하게 빗나갔다.
루드비히라고 불린 남자가 뒤를 돌아봤다. 그와 동시에, 루다는 볼 수 있었다.
이목구비가, 머리가, 키가, 체형이, 모든 것들이 그녀의 남자 친구였다. 부정할 수 없는 최형우였다.
‘자기야!’ 평소처럼 부르려는 순간, 돌아보는 그의 눈과 루다의 눈이 마주쳤다.
그녀는 입을 다물었다.
형우가 맞는데, 뭔가 달라. 그 싸한 느낌을 무어라 설명해야 할지 몰랐다.
우선 멈추자.
루다는 다리에 힘을 줬다. 멈춰야 하는데, 이미 형우에게 안기기 위해 힘껏 달려온 제 다리는 말을 듣지 않았다.
루다는 그 속도 그대로 남자 친구인 형우에게 돌진하고 있었다.
속도를 줄여야 하는데, 속도가 줄여지지 않았다.
에이, 몰라. 설마 남자 친구인데 죽이기야 하겠어.
“자기야!”
루다는 그리움을 가득 담아 소리쳤다.
이제 형우가 팔을 벌려 나를 안아 주고 ‘무슨 일이야?’라고 말하기만 하면 된다.
그러면 양 진영이 역사 이래로 평화통일이 되는 거고, 우리는 다시 돌아갈 방도를 찾아 집으로 돌아가면 되는 거다.
이 얼마나 평화로운 방법이란 말인가!
하지만 공교롭게도 그런 평화로운 해결 방법은 일어나지 않았다.
“피암마의 칼날.”
저음이지만 공간을 가득 메울 정도로 커다란 울림이었다.
--- 본문 중에서
2권
루다가 이를 악물었다.
“정신 차려!”
루다가 그대로 앞으로 쏟아져 나갔다.
“정신 차리라고! 최형우!”
성질이 났다. 이 바보야, 정신 차려! 이대로 우리끼리 싸우면 안 돼!
이제는 스킬을 사용할 수 없게 된 남자 친구가 대검을 휘둘렀다. 하지만 그 공격의 궤적이 루다의 근처에 와서 우뚝 멈췄다.
자연스럽던 움직임이 이상할 정도로 삐걱대고 있었다. 거침없이 공격하던 그의 미간에 주름이 갔다.
아까도 이런 표정을 지은 적이 있었다. 루다가 그의 이름을 불렀을 때. 세뇌에 싸우고 있는 게 분명했다.
세뇌를 깨지 못한 모양인지 이내 다시 정신을 차리고는 대검을 들고 그대로 루다를 향해 돌진했다. 하지만 그 역시 루다의 코앞에서 대검을 멈출 뿐이었다.
찌푸렸던 그의 눈썹이 다시 평온해졌다. 그대로 루다를 향해 공격이 쇄도했다. 전부 평타였지만 만렙의 속도와 공격력은 절대 무시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헤이스트!”
그대로 뒤로 피해 버린 루다의 움직임에 반동으로 그의 몸이 앞으로 쏠렸다. 그 찰나를 놓칠 루다가 아니었다.
“헤이스트!”
그대로 앞으로 쏘아져 나간 루다가 남자 친구의 다리에 발을 걸었다. 중심을 잡지 못하고 기우뚱 쓰러진 남자 친구의 몸 위로 루다 역시 중심을 잃고 넘어졌다.
얼른 정신을 차리고 제 아래에서 일어나려고 발버둥 치는 몸을 꾹 눌렀다. 이렇게 힘으로 제압할 수는 없었다.
루다가 곧바로 외쳤다.
“루나틱 홀딩!”
밝은 빛과 함께 그의 움직임이 봉쇄됐다. 고작 몇 초지만 그동안 정신을 차리게 하고 싶었다.
“최형우! 자기야! 루드비히!”
아까 그가 반응했던 이름들을 연달아 불렀다. 하지만 그사이에 벌써 면역이라도 됐는지 초점 없는 그의 눈동자는 루다의 말을 들을 생각이 없어 보였다.
“최형우! 집으로 돌아가야지! 정신 차려!”
꿈틀, 아까와는 다른 미세한 반응이 왔다.
집에 가자는 말 때문에 그런가?
지금도 그렇고 아까도 그렇고 루다는 알 수 있었다. 그가 세뇌에서 빠져나오려고 발버둥 치는 순간은 전부 루다에게서 자극이 올 때였다. 그녀가 그의 이름을 불렀을 때, 직접 폭력을 가하려고 할 때.
고마운 건지, 안쓰러운 건지, 무엇인지 알 수 없는 감정이 소용돌이쳤다.
연인의 목소리, 연인의 절박함에 반응한다니. 그만큼 저를 사랑하고 있다고 생각해서 기뻐해야 했지만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었다.
그런 것들이 자극이 된다고? 그래서 세뇌와 싸운다고? 그렇다면 사랑하는 연인으로서 제일 크게 자극을 줄 수 있는 게 하나 있었다.
루다가 형우의 위에 앉은 채로 그대로 고개를 숙였다. 마지막 도박이나 마찬가지였다. 입술과 입술이 포개졌다.
‘제발, 정신 차려!’
루다가 속으로 기원했다.
가만히 자리 잡았던 그의 동공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흔들리던 형우의 동공이 이내 멈췄다. 초점 없던 눈동자에 빛이 돌기 시작했다.
깜빡, 눈이 감겼다 떠졌다. 아직 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멍한 표정이었다. 하지만 이내 그의 표정이 굳기 시작했다. 기억이 돌아오기 시작한 게 틀림없었다.
“루다야……?”
마침내 형우의 입에서 루다의 이름이 튀어나왔다. 루다의 얼굴에 환한 표정이 떠올랐다.
---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