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해자 _시인
2018년 초가을에서 겨울까지 노작홍사용문학관 문예강좌 프로그램을 하면서 저는 특별히 무엇을 가르치려 하지 않았습니다. 문학을 좋아하거나, 자기성찰과 성장의 매개로 삼는 독자거나, 이미 습작이 꽤 진행 중인데 보여줄 마음가짐은 안 되어 있는 분들이 오실 거라 믿었으니 이미 시인이거나 작가라 믿으면서 수평적 관계를 맺었습니다. 저는 다만 각자가 이미 자기 안에 품고 있는 것들을 용기 있게 드러낼 수 있게 하는 하나의 계기이자 안내자가 되고 싶었다고나 할까요. 그래서 강좌 제목도 ‘서로의 거울에 비추어 보는 글쓰기’로 정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이게 글감이 될 수 있나’ 혹은 ‘이런 것도 시가 될 수 있을까’ 고민하는 분들과 현장에서 직접 글을 써보고, 그간 써온 작품을 가져와 서로 피드백을 주고받고 그것을 거울삼아 다시 퇴고해보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작품을 공유하는 순환의 과정을 거치면서 강의는 점점 더 작품 합평 위주가 되었고, ‘공유로서의 문학판’이 되었습니다. 변할 여지가 없는 확고부동한 이론이나 글이 아니라, 매만지고 다듬으며 완성해가는 과정의 나눔 말입니다. 점점 화기애애한 분위기에서 두려움 없이 작품을 내놓으면서 ‘재미가 낳는 배움으로써의 글쓰기’가 되었습니다. ‘재미’ ‘흥미’ ‘성취감’은 문학세계에 입문할 수 있는 중요한 덕목으로 생각하기에, 글을 써오신 분들에게 보너스로 별자리를 봐주기도 했습니다. 웃음과 공감이 가득 채우는 장 속에서 듣는 자가 쓰는 자이고 쓰는 자가 듣는 자인 만남은 나와 타자의 삶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친교이자 나눔이 되었습니다. 비난과 이론일 뿐인 잣대 대신 서로가 거울이 되어 반응하면서 비판 혹은 조언의 기능도 덩달아 가능하게 되었다 말할 수 있겠지요. 강좌를 준비하면서 조금은 체계적인 이론과 다양한 시의 맛도 보여주자 생각하며, 최근에 쓴 시평 에세이 『시의 눈, 벌레의 눈』도 선물로 드렸습니다. 자기만의 경향 및 개성으로 시적 성취를 이룬 시인 몇 분의 작품세계를 살피면서 각자가 시를 쓰는 데 도움이 되는 실전 팁이 되는 거울로 활용하기도 했습니다만, 점점 작품 제출 양이 많아지면서 요약해서 설명하는 것으로 그쳐야 했습니다만, 필요하면 혼자서도 습득 가능한 부분이라 믿기에 걱정은 않습니다.
여름옷 입고 시작한 첫 강의가 털옷 입고 종강파티를 맞이하기까지 아쉬움이 없지는 않습니다. 나눠 준 것보다 못 나눈 것이 더 많이 느껴지는 채로 헤어졌지만, 다양성과 다원성을 받아들이고 교환하고 체험하면서, 삶과 글의 밀접한 관계에 대해 고민하고 체감한 각자의 창작 동기와 창작열을 믿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행복한 글쓰기’를 지향한다 해도, 쓰고 그것을 세상에 알리는 일은 힘들고 괴로우며, 때로 내가 가진 다른 것을 희생해야 가능한 일입니다. 즐거운 순간도 없지 않지만, 뭔가를 깊이 들여다보고 그것을 문자언어로 써 내려가며 구성하여 하나의 꿈틀거리는 생명체를 탄생시킨다는 건 기본적으로 두렵고 어려운 일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진정으로 자기가 낳은 자식인 창조품이 나와 더불어 남까지 이롭게 할 수 있다는 것을 삶 속에서 세 번 네 번 경험하고 검증해 간다면, 기쁨과 행복의 꽃들도 간혹 피어 있는 문학의 길을 길게 걸어갈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벗이자 문학 동지 여러분, 정진하시길 빌며 건투를 빕니다.
2018년 12월 10일 광덕에서 ---「문집 출간에 부쳐」중에서
김중일 _시인
지난가을이 시작될 무렵 우리는 시를 가운데 두고 매주 토요일에 모여 앉았습니다. 그 사이 가을은 점점 짙어졌습니다. 수강생들도 낙엽처럼 하나둘 떨어져 나갔습니다.(농담입니다.) 어쩔 수 없는 것입니다. 살인적인 폭염 뒤에 온 하늘이 높고 투명한 가을이자 토요일이었으니까요. 지난가을 토요일을 늘 함께했던 회원들과 시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저마다 살아오고 살아가는 세상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과 다를 바 없음을 다시 알게 되는 시간이었습니다. 이 수업은 본격적인 시 창작 기법을 연습하기 위한 수업이 아닙니다. 왜 우리가 여전히 시를 읽고 또 쓰려 하는지에 대한 창작 동인을 찾기 위한 시간이었습니다. 얼마 전 정년퇴직을 하신 선생님부터 취업 준비생까지, 최근 입문하신 분부터 이미 수년간 습작해온 분까지 시를 접하고 고민했던 시간의 길이는 달랐습니다. 그래서 저마다 이 수업을 통해 얻어 가고자 했던 것이 애초에 조금은 달랐을 수도 있겠습니다. 그래서 이번 수업은 시를 어떻게 하면 잘 쓸지에 대한 수업일 수 없었습니다. 시를 일 년을 썼던, 십 년을 썼던 공통적으로 필요한 것은 써야 하는 이유를 찾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난가을 바로 그 얘기를 해왔습니다.
먼저 시라는 장르가 우리 사는 일상의 디테일을 어떻게 미적 언어로 담고 있는지 좋은 시를 추천하고 읽고 이야기했습니다. 시인이 펼쳐 보이는 언어 이전에, 그 언어가 발화될 수 있었던 시인의 내면을 들여다보고자 했습니다. 그 과정을 통해 자연스럽게 수강생 각자가 시를 읽고 쓰고자 하는 스스로의 내면을 살핌으로 해서, 처음 입문하시는 분은 물론이고 오랜 시간 시를 접한 분에게도 계속 시에 대한 흥미를 북돋을 시간이 되길 바랐습니다. 특히 오랜 시간 습작을 해왔으나 원하는 만큼의 성과가 없고, 자신이 언제부터 그리고 왜 시를 좋아하게 되었는지조차 희미해져버린 분들에게 의미 있는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또 공동체 속의 여러 이슈에 대해 함께 대화하고, 관련한 내용을 담고 있는 좋은 시를 읽고 이야기했습니다. 우리는 우선 세상 속 개별자로서의 ‘나’에 대해서 이야기했습니다. 동시에 세상을 움직이는 거대한 사건도 결국 세상에 살고 있는 어떤 개별자인 ‘나’에서 촉발된다는 점을 짚었습니다. 그럼 점에서 시 속에서의 ‘나’라는 화자는 아무리 개인사적인 이야기를 하고 있더라도 ‘우리’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우리는 문득 ‘나’가 본질적인가 ‘우리’가 더 본질적인가,라는 질문을 던졌습니다. 그것은 마치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의 물음 같은 것입니다. 사람은 혼자 태어나고 또 살아갈 수 없습니다. 개별적인 ‘나’의 합이 ‘우리’라기보다는, 차라리 ‘우리’는 ‘나’의 또 다른 이름일 것입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나누며 시를 읽었습니다. 시인의 내면이 투명하게 들여다보이는 시에서부터 개성적인 방법론을 보여준 시까지 읽고 읽었습니다. 무엇보다 우리들의 시를 함께 읽었습니다. 기록적인 폭염을 견디는 동안 그토록 기다렸던 그 가을이 다 저물도록 말입니다. 그 가을이자 주말을 시를 읽고 쓰기 위해 보냈으니, 이제 우리가 시인이 아닐 이유가 하나도 없습니다.
---「지난가을 우리가 나눈 이야기에 대한 교과서적인 총정리」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