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운아.”
“네, 공주님.”
“스승님 얼굴…… 기억나?”
“갑자기 그건 왜 물으십니까?”
“난 분명 아주 또렷이 기억한다고 생각했는데, 갑자기 스승님 얼굴이 흐릿해져 버렸어. 기억이 안 나. 네가 기억하는 스승님은 어떤 사람이었어?”
“단언컨대, 황성 안에 그분만큼 준수하게 생긴 사내는 없었습니다. 그분만큼 점잖은 사내도 없었고, 현명한 사내도 없었으며, 무엇보다…… 무예 실력이 가장 형편없었지요.”
흐흣,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혜온이 웃었다. 분명 웃었는데, 코끝이 아릿했다. 어김없이 눈가가 뜨거워지면서 눈물이 솟았다.
시운의 미간이 슬며시 일그러졌다. 창골에 다녀오던 그날부터 공주가 예사롭지 않았다.
어제만 해도 처음 본 사내의 얼굴을 만지려 하고, 이름을 꼬치꼬치 캐묻고, 그 사내 앞에서 눈물까지 보였다. 그 이유가 스승님과 관련된 일인 것 같아서, 시운은 혜온이 걱정됐다.
대체 그자에게서 무엇을 보셨기에. 이럴 줄 알았다면 그자의 얼굴을 자세히 봐 두는 건데.
“됐습니다. 더는 묻지 않겠습니다. 대신, 다음부터는 아주 사소한 일이라도 저나 이 상궁에게 꼭 말씀하셔야 합니다. 아시겠습니까?”
“그래, 알았어. ”
애쓰는 신하의 마음을 너무 잘 알아서 혜온은 금세 마음을 다잡았다.
“내가 가장 신뢰하는 나의 최측근 호위무사이자 무화단 수장 시운.”
갑자기 혜온이 이름을 길게 부르자 시운은 순간 당황했다. 1년에 서너 번 있을까 말까 한 일이었고, 이제 곧 공주가 중요한 말을 할 거란 뜻이었다.
또 무슨 말씀을 하려고 이러시나.
긴장감으로 어깨가 굳어 가는 시운을 보며 혜온이 피식 웃었다.
“긴장 풀고, 어제 외숙부님 댁 앞에서 벌어졌던 습격 사건에 대해서 보고 시작해.”
난 또. 하여튼 사람을 들었다 놓았다 하는 데는 따를 자가 없다니까.
혜온이 책상 위에 놓인 찻잔을 들어 차 한 모금을 삼키자, 시운이 굳은 어깨를 풀고 그 앞에 마주 앉았다.
“우선, 어제 자객들과 싸움이 길어지긴 했지만, 결국은 모두 진압했습니다. 생포한 자가 몇 있는데 모두 자결하는 바람에 배후를 밝히는 데에는 시간이 조금 걸릴 듯합니다. 가장 의심되는 자들은 살수 집단입니다. 무화단에서 파악한 근거지를 중심으로 그 뒤를 캐 보겠습니다. 그리고 처음 공격을 받았던 사람들은 귀연상단의 호위무사와 일꾼들이었습니다.”
“북대가 저자에서 객점을 운영하는 장사치라고 하던데, 그 객점이 귀연상단 본거지인 것이냐?”
“네, 일꾼들의 말에 의하면 상단이 커지면서 견제하는 세력들이 많아졌다고 합니다. 장사치들 간의 알력 싸움 같은 사소한 문제일 수도 있겠지만, 공주님이 공격받은 이상 조사는 철저히 하겠습니다.”
“그래, 알았다.”
단정하던 혜온의 입매가 한쪽으로 비긋이 올라섰다.
어찌 됐든 북대가에 있는 귀연상단을 찾아가면 대장이라는 그자를 만날 수 있다는 뜻이네? 간다는 소리도 없이 사라지더니만, 뛰어 봤자 황성 안이로구나.
괘씸하기가 이를 데가 없어. 기다리거라. 내가 곧 너를 찾아갈 테니.
혜온은 감쪽같이 사라져 버린 대장을 생각하며 주먹을 꽉 말아 쥐었다. 시운의 얼굴이 벌레 씹어 먹은 표정이 되었다.
“무슨 생각을 그리 골똘히 하십니까? 표정이 좀…….”
“내 표정이 뭐 어때서.”
“무언가를 노리고 계시지 않습니까. 기필코 잡아먹고 말겠다는, 그 비스무리한…….”
“시끄러. 보고 다 끝났으면 나가 봐.”
“중요한 게 하나 남았습니다.”
“또 뭔데?”
“공주님께서도 어제 보셨으니 아실 겁니다. 무예 실력이 빼어난 자가 둘 있었지요. 그중 하나가 공주님을 피신시킨 대장이라 불리는 자이고, 나머지 하나가 수호라는 녀석인데, 어제 그놈을 끌고 왔습니다.”
“딱히 잘못한 것도 없는데 뭐 하러 잡아 와?”
“그놈…… 창골 무녀 집에 다녀갔던 녀석입니다.”
“뭐?”
“수호 그놈을 족쳤는데, 대장도 그날 밤 창골 무녀 집에 갔었답니다. 혹시 그날 밤 태완진을 찌른 자가…….”
“그자가 맞는 것 같다. ……대장.”
‘공주님이라는 거 알고 있습니다. 저를 믿으십시오.’
혜온은 등 뒤에서 저를 끌어안으며 그자가 했던 말을 떠올려 보았다. 그리고 어젯밤 암자에서의 그의 목소리도 떠올려 보았다.
낮게 울리는 음성이 닮았다.
---「1권」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