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여정을 개척해나가는 동안 지난 수많은 여정들의 자취를 더듬으며 시공간을 넘나들다 보면, 금강산으로 가는 여정은 새로운 시각에서 북한과 주변 지역을 바라보는 한 방법이 될 것이다. 이념 너머에는 조개를 줍거나 개와 산책하는 일과 같이 면면히 이어지는 사람들의 삶이 자리 잡고 있다. 정치적 현실 너머에는 수백 년에 걸친 과거와 현재가 자리 잡고 있다. 과거의 심연을 향해 눈을 뜸으로써 우리는 현재의 고통과 분단을 넘어 이 지역을 위한 미래가 어떤 모습일지 그 윤곽이나마 볼 수 있을지 모른다. 나는 금강산으로 가는 여정을, 역사를 순례하는 여정을 계획하기 시작했다. ---「압록강 노동절의 풍경」중에서
안중근은 러시아인에게 체포되어 일본인의 손에 넘겨졌다가 1910년 3월 26일 포트 아서(뤼순)에서 처형당했다. 그날은 켐프와 맥두걸이 중국에서 압록강을 건너 조선으로 들어가기 바로 며칠 전이었다. 여행하는 동안 이 극적인 사건의 전말을 지켜본 켐프는 안중근이 “굉장히 차분하게 사형선고를 받아들였다”고 전하고 있다. “그는 당시 시를 쓰는 데 몰두해 있었으므로 당국은 그가 시를 탈고할 시간을 갖도록 사형을 열흘이나 연기해주었다! ---「여정을 시작하며: 하얼빈과 후난을 향해」중에서
1910년 켐프가 선양을 방문했을 무렵 청나라는 타성과 부정부패가 만연했고, 외세에 굴복해 최후의 붕괴 상태에 있었다. 켐프가 선양에서 첫날 방문했던 묘역의 성벽들은, 바로 5년 전 주변 풍경을 전장으로 바꾸어놓았던 러시아와 일본 군대들이 남겨놓은 총탄으로 벌집이 되어 있었다. 누르하치와 홍타이지의 황궁은 보물로 가득 찼지만, 귀한 도자기들은 “유리관에 넣어져 끝없이 쌓여 있었고, 아마도 수십 년 동안은 개봉되지 않은 상태로 남아 있었다.” ---「만주의 유령: 창춘과 선양」중에서
이 도시의 먼 과거는 빛바랜 금속에 박힌 보석처럼 도시의 칙칙한 산업단지 한가운데에 들어 있는데, 그 가운데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것은 13층 백색 석탑이다. 12세기 여진족의 금나라 시대에 지은 이 석탑은 오늘날에는 더 이상 흰색이 아니라 칙칙한 회색이 되어버린 채 여전히 랴오양 중앙 공원 위로 우뚝 서 있다. 허물어져가는 육각 석탑의 오목하게 파인 각 면에는 부처가 고요히 앉아 수백 년 동안 시선을 고정시킨 채 밖을 내다보고 있다. 탑의 기단 주위로는 신자들이 작은 부처상과 향을 꽂을 수 있는 꿀색 도자기 향로를 놓아두었다. ---「성스러운 산: 랴오양과 첸산」중에서
압록강을 건너는 다리는 켐프가 방문한 다음 해인 1911년에 사실상 개통되었다. 이로써 한반도 남단인 부산에서 프랑스의 항구도시 칼레까지 쭉 운행되는 철도망의 마지막 연결고리가 완성되었다. 오늘날, 이 다리는 압록강 ‘단교斷橋’로 알려져 있다. 한국전쟁 동안 미군의 폭격으로 산산이 부서져, 중국 쪽에서 강 중앙으로 들어가는 절반만 살아남아 뚝 끊겨버렸던 것이다. 이 다리는 단둥을 찾은 관광객들이 북한을 내다볼 수 있는 뛰어난 전망대가 되었다. ---「국경지대: 선양에서 단둥까지」중에서
오스트레일리아를 떠나기 전, 그곳 친구와 일본의 친구들에게 북한을 방문할 계획이라고 했더니 부러움(“늘 거기에 가보고 싶었어”)에서 이해할 수 없음(“북한에? 뭣 하러?”), 노골적인 비난(“그건 단지 선전 여행이 될 거야. 북한 정권을 지지하는 데 도움을 주고 있잖아. 그들은 그곳 삶이 어떤지에 대해 완전히 허상을 보여줄 거야”)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반응을 보였다. 그 가운데서도 여러 차례 들어왔던 이 마지막 말 때문에 나는 여행의 윤리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보게 되었다. 즐기는 여행이나 깨달음을 찾아 나서는 순례에 윤리적 경계가 있을까? 물론 여행가들은 옷을 입거나 가방을 매는 것처럼 자신들만의 윤리를 지니고 있다. 해서는 안 될 일들이 분명히 있기는 하지만, 찾아가서는 안 될 곳이나 언급해서는 안 될 사람이 있단 말인가? ---「다리를 건너: 신의주와 그 너머로」중에서
주체사상이라는 커다란 암초 주위로 동북아시아 역사의 시간이 흘러간다. 중국 중심의 세계에서 일본 중심의 세계로 서서히 바뀌었다가, 이제 다시 중국 중심으로 되돌아가는 변화가 그러하다. 현재의 관점에서 지난 세기를 살펴보면, 현재의 전망들이 때로는 놀라워 보인다. 한국에 그토록 긴 역사적 그늘을 드리운 일본의 식민 지배는 공식적으로는 사람의 반생에 해당하는 35년이나 지속되었다. 그러나 사실상 한국에 대한 일본의 지배는 거의 두 배나 더 지속되었다. 한반도의 분단은 거의 사람의 일생에 해당하는 60년 동안이나 지속되고 있고, 북한의 붕괴가 임박했다고 지난 20여 년 동안 줄기차게 예측했지만 북한 체제는 여전히 완강히 버티고 있다. 심지어 지금조차도, 변화가 임박했다는 징후가 보이고 있지만 북한의 종말을 예측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시간의 흐름 뒤바꾸기」중에서
일본인들이 건설한 급수장이 있었던 대동강의 능라도에는, 북한의 놀라운 아리랑 매스게임이 펼쳐지는 능라도 5·1경기장이 들어서 있다. 그러나 모란봉은 켐프가 방문했던 당시처럼 여전히 인기 있는 나들이 장소이다. 반면에 북한의 지배 권력인 노동당 설립을 기념하기 위해 건설한 기념관은 미심쩍게도 식민지시대의 건물을 차지하고 있었는데, 도쿄의 다이어트 빌딩과 그 분신인 만주국의 사라진 수도 신징의 주의회 건물과 흡사해 보였다. 그리고 적어도 최근까지 북한 인민군 전몰기념비는 일본 식민지 정부가 1894년 평양 전투에서 전사한 자국 병사들을 기념한 바로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영광스러운 전사자들’의 국적과 정략은 바뀌었지만, 그들을 추모하는 의식은 여전히 비슷한 데가 많다. ---「새로운 예루살렘: 평양」중에서
그 장벽이 어떻게 붕괴될 것인가는 여전히 예측할 수 없지만 북한의 붕괴는 전 세계에 엄청난 파장을 불러올 것이다. 무력 충돌로 장벽이 붕괴된다면 전 세계에 벗어날 수 없는 재앙이 될 것이다. 남한이 대규모로 북한을 흡수할 경우에는 중국을 대단히 놀라게 만들어 동북아의 두 이웃나라 사이에, 또 중국과 미국 사이에 커다란 갈등을 불러일으킬 것이다. 반대로, 요즘 들어 자신감 넘치는 중국의 지원을 등에 업고 북한에서 정권 교체가 이루어진다면 중국에 대한 전 세계의 우려가 커질 것이다. 1910년 켐프가 이 38선을 원만히 넘어갔을 때에 그랬던 것처럼 동북아시아는 그 미래가 갈등이나 화합 어느 방향으로도 기울 수 있는 분수령에 서 있다. 한쪽 세력이 지배하게 될지, 여러 세력이 협력하게 될지 기로에 서 있다. 어느 쪽으로 기울어질지는 이 휴전선에서 결정될 것이다. ---「분단의 슬픈 현실: 개성, 도라산, 그리고 휴전선」중에서
켐프는 왕비의 무덤을 스케치했는데, 당시 무덤은 성문 너머 언덕의 한적한 지점(도시 개발로 이전되기 전의 자리)에 자리 잡고는 건너편의 울창한 산골짜기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켐프는 슬픔에 가득 차 왕비의 잔혹한 죽음에 대해 썼고, 심지어 1910년 8월 한일병합이 정식으로 발표되기 전에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자신들은 조선을 병합하지 않았다고 우기는 일본의 말을 듣는 것은 어리석은 짓 같다. 실질적으로 말해서, 그들은 가장 악랄한 방법으로 모든 것을 지배했기 때문이다. (…) 조선말을 배우려는 일본인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오해의 소지가 늘 있었으므로 예속 상태는 한층 가혹해졌다.” ---「시해당한 왕비의 궁전에서: 서울」중에서
“남쪽으로 갈수록 대지는 점차 푸르러지고 과일나무는 연한 꽃을 드러내고 있다. 버드나무에는 연둣빛 물이 오르고 산비탈에 핀 분홍 진달래는 달빛에 은은히 빛나고 있다.” 한반도 남쪽으로 내려가며 켐프가 보았던 풍경의 점진적인 변화는 이제 정확하게 두 개로 나뉘었다. 산들의 외형, 들판의 색조, 심지어 자연 그 자체마저도 38선을 기준으로 첨예하게 양분되는 것 같다. 이제 막 지나왔던 북한의 풍경과 대척점에 있는 이 남쪽의 풍경은 아주 많이 흡사하면서도 전혀 다르다는 것을 가는 곳마다 실감하게 된다. ---「역사의 상처가 새겨진 섬들: 부산까지」중에서
가는 곳마다 사람들은 샌디의 그림에 많은 관심을 보이며 한마디씩 했지만 적의를 드러낸 적은 없었다. 북한에서는 카메라가 영혼을 훔치지는 못하더라도 비밀을 몰래 담을 수 있기 때문에 사진 찍는 사람을 의심의 눈초리로 보지만, 스케치는 아무런 해가 없는 독특한 취미 정도로 본다. 우리 가이드들의 통역으로 어부는 점차 대화에 끼어들었는데, 처음에는 약간 수줍게 시작되었지만 자신감이 생기자 따뜻한 미소가 해풍에 거무스름해진 그의 젊은 얼굴에서 눈부시게 빛났다. ---「금강산 가는 길: 원산 남쪽」중에서
우리는 연못 얕은 곳에서 울고 있는 개구리 소리를 들으며 잠시 동안 앉아 있었다. 남쪽으로 이 산들이 끝나는 곳에는 세계에서 가장 중무장이 되어 있는 국경선을 따라 여전히 철조망이 뻗어 있다. 북한과 동북아시아는 중대한 변화의 고비에 불안하게 서 있다. 저 아래에서는 검은색 도요타 사륜구동차가 우리를 평양으로 데려가려고 대기 중이다. 하지만 그 차는 지금 당장은 기다릴 수 있다. 바다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오늘도 소리 없이 금강산의 모습을 빚어내고 있는 동안, 우리는 그 자리에 앉은 채 연못의 수면 위로 잔물결이 번져나가는 것을 지켜보았다.
---「희망으로 나아가기」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