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모든 일은 시간 위에서 일어나고, 어느 한 지점에서 우뚝 멈춰버린다. 그 멈춤을 우리는 죽음이라 말한다. 이 생각은 과연 옳을까? 죽음은 삶의 끝일까? 시간을 되돌릴 수만 있다면 죽음 이전으로 돌아갈 수 있지 않을까? 답은 없다. 명확한 답은커녕 비슷한 답조차 찾기 어렵다. 시간과 죽음은 아무리 궁리해도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와 같다. 분명히 꿈을 꾸었는데, 꾸었다는 사실을 물리적으로 증명해낼 수가 없다. 그것은 잡으려 해도 잡을 수 없는 물, 꺾으려 해도 꺾이지 않는 바람, 출구가 존재하지 않는 미로와 같다. 소설 『미로』는 시간과 죽음이 만들어놓은 출구 없는 미로 속으로 들어간, ‘미로’라는 이름을 가진 스물다섯 살 청년의 이야기다. ---「작가의 말」중에서
그렇게 묵은 시계가 가고 새로운 시계가 왔다. 하지만 변한 건 없다. 선반 위에 새로운 시계가 놓인 것은 변화가 아니다. 며칠 전에 하얀색 종이시계 자리에 바다 빛깔의 푸른색 종이시계가 있었다는 걸 기억하는가. 그때도 당신은 푸른색 종이시계를 왁살스럽게 구겨버렸다. 계속 이런 식이다. 앞으로 며칠 뒤에 또, 회갈색 종이시계 대신 다른 색의 종이시계가 그 자리에 놓이게 될 것이다. 이처럼 변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중요한 것은 오늘이 2041년 11월 1일이라는 사실이다. --- p.25
삶이란 우연의 축적이다. 그 축적된 데이터를 정밀하게 분석하면 필연이 된다. 그러나 필연이 되기 전, 우연으로 인식될 뿐인 삶에서는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다. 아내의 죽음과 어린 아들에 대한 사랑이 물리학자를 소설가로 변신하게 했듯이 말이다. 그러나 모든 것이 그렇듯, 필연의 물길을 따라 흐른다면 억지스러움은 자연스럽게 지워진다. 우연을 견디고 견디면 결국 필연이 승리자가 된다. 만약 그가 아내의 죽음이 가져다준 슬픔에 매몰되었다면 우연을 견디고 견디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 p.61
안타깝게도 인간에겐 자의적으로 시간의 ‘흐름’을 되돌릴 수 있는 방법이 없다. 이 ‘방법 없음’은 마치 누군가가, 가령 절대적인 힘을 지닌 능력자가 인간으로 하여금 되돌아갈 수 없도록 하기 위해, 즉 직진성의 감옥에 가두어놓기 위해 그렇게 설계한 것처럼 정교하고 완벽하다. 그러나 다행인지, 그 능력자의 실수인지, 인간이면 누구나 시간을 거슬러 갈 수 있는 유일한 기회가 주어진다. 바로 죽음이다. 죽음은 자신의 삶으로 되돌아가는, 경험을 경험하기 위해 출발하는 스타트라인이다. --- p.131
가끔은 뻔뻔스러운 인간도 눈물 나도록 인생이 애처로울 때가 있다. 넌덜머리가 난다고 해야 옳겠지만. 한쪽 마음속에 숭고한 정신이 들어 있는 건 어쩔 수 없다.
세 번 정도, 신을 만난 적이 있다. 신이 아닐 수도 있지만, 여하튼 어떤 식으로 표현해도 상관없다. 그건, 인간을 인간이라고 표현하지 않거나, 고양이를 고양이라고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과는 다르다. 완전히 상대적인 존재니까. 여기서만큼은 그저 신이라고 해두자. 처음에 ‘신’을 만났을 때 알아보지 못했다. 다시 만났을 때 그때서야 그것이 ‘신’이었구나, 하고 확신했다. 그러니까 두 번째 만났을 때 비로소 ‘신’과 제대로 맞닥뜨렸다. 하지만 볼 수는 없었다. 실체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형체를 갖고 있지 않았다는 뜻이다. --- p.205
모든 것이 존재하고 모든 것이 가능한 곳은 항상 대가를 치르게 되어 있어요. 모든 것이 존재한다는 건 쓸데없는 것도 존재한다는 것이고, 모든 것이 가능하다는 건, 해서는 안 되는 것도 가능하다는 얘기죠. 서울을 자유구역으로 만든다는 건 그런 곳으로 만드는 거죠. 아니, 이미 만들어져 있어서 유지하려는 거죠. 아닙니까? --- p.239
‘인간이 이 세상에 존재하는 이유는 뭘까? 인간은 이 세상에 꼭 필요한 존재일까?’
이런 질문들은 오래전 시작되었다. 그리고 인간은 신화를 만들어 그 안에 수많은 질문에 대한 답을 담아두었다. 그 중에는 아주 그럴듯한 답도 있었다.
어느 날, 신은 궁금해졌다. ‘내게는 왜 생명이란 게 없을까?’ 신이 이런 생각을 한 것은 자신의 생명과 비교할 수 있는 무언가가 없어서였다. 바로 죽음이었다. 자신이 살아 있다는 걸 확인하기 위해서는 죽음이 필요했다. 그렇다고 신이 자신에게 죽음을 부여할 수는 없는 일. 그래서 신이 만든 것이 인간이었다. 영원히 살 거라고 믿는 인간이 어느 날 죽음을 맞이하게 되는 것을 지켜보면서 신은 비로소 자신의 생명을 확인할 수 있었다. 신화는 때로 사실보다 강하고 자극적이다. 그리고 때로 냉혹할 정도로 현명하다.
--- p.27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