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정할 건 인정하자. 초콜릿만이 엉망진창인 기분을 달래줄 수 있는 운수 사나운 날이 있는 법이다. 바로 그런 날 사람들은 자신을 홀리는 초콜릿 조각에 손을 뻗는다. 쇼콜라 뒤 주르(chocolate du jour, ‘그날의 초콜릿’이라는 뜻의 프랑스어)라고나 할까. 오늘 같은 날 어울리는 초콜릿은 어느 것일까 골똘히 생각한 끝에 프랜시는 선반에서 로열블루빛 상자를 꺼내 하얀 리본을 풀고 봉인을 뜯었다. 상자는 시거케이스처럼 위로 열렸고 그 아래 파란별이 새겨진 은색포일로 화려하게 차려입고 줄줄이 늘어선 봉봉의 자태가 드러났다. 둥근 덩어리처럼 생긴 이 봉봉의 이름은 바치(Baci, 이탈리아어로 ‘키스’라는 뜻), 세계적인 초콜릿메이커인 페루지나의 제품이었다. 맛은? 오페라가 따로 없었다.
“맘껏 먹자고.”
진저 앞으로 바치 하나, 바스락. 프랜시 몫의 바치 한 개, 바스락. 바치는 포장을 뜯는 것마저도 섬세한 경험이다. 포일 안쪽에 끼워진 사랑의 글귀는 함께 싸여있는 부드러우면서도 바삭한 헤이즐넛 초콜릿만큼이나 큰 위안이 되어주었다. 머지않아 신나는 연애를 하게 되리라고 적혀 있었으니까. 우리 둘 다 별다른 연애를 하고 있지 않았으므로 희망적인 운세를 읽고 나자 바치는 곱절이나 더 맛있게 느껴졌다. 순간 삶이 조금 더 밝아졌다. --- p.14-15
‘초콜릿중독(chocoholic)’이라는 단어가 생겨나기도 전부터 초콜릿중독이었던 우리에게 초콜릿 전문점을 여는 건 세상에서 제일 자연스러운 일처럼 여겨졌다. 초콜릿이 천정까지 꽉 들어차고 초콜릿향기가 거리까지 흘러나와 길 가던 손님들을 유혹하는 그런 가게를 꿈꿨다. 어쩌면 친구를 사귈 수 있을지도 몰랐다. 초콜릿을 쌓아 풍요로운 사업과 삶을 일구자. 앞으로는 가게가 제2의 보금자리가 될거야. 문제는 없었냐고? 눈먼 생쥐 두 마리처럼 도통 우리가 뭘 하고 있는지 몰랐다는 게 문제였다. 초콜릿을 좋아한다는 것 외엔 아무런 것도 명확한 것이 없었다. 대체 어떻게 동화에나 나오는 초콜릿 성을 지을 것인가? 가게 이름부터가 문제였다. 초콜릿 천국? 아냐. 초콜릿 바? 아냐, 아냐. 초콜릿 사랑? 아냐, 아냐, 안 돼. 진저가 오븐에서 다 구워진 브라우니 한 판을 끄집어냈다. 하지만 둘 다 머릿속으로는 미래의 가게에 어울리는 이름을 생각해내려 애쓰고 있었다. 생각해… 젠장, 생각하라고…! 브라우니에서 풍기는 달콤한 향기 때문에 도저히 집중할 수가 없었다.진저는 종이냅킨 크기와 맞먹을 만큼 커다란 브라우니 조각을 잘라 언니에게 건넸다. 한입 베어 물자 행복에 겨운 신음소리가 절로 흘러나왔다.
“진저…, 어디서 이 조리법을 찾아낸 거야? 이건 진짜 초콜릿스러운걸.”
“조리법 같은 건 없어. 초콜릿스러운 맛을 두 배로 내려고 초콜릿칩을 넣었을 뿐인걸. 더블초콜릿이라고나 할까.”
진저가 브라우니를 우물거리며 말했다. 프랜시가 부스러기를 핥으며 꿈꾸듯 눈을 반쯤 감았다.
“초콜릿… 초콜릿….”
진저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방금 뭐라고 했어?”
“뭐라고 했느냐니…, 초콜….”
자매끼리만 통하는 바로 그 순간, 우리는 번개를 맞은 듯했다.
“그래, ‘초콜릿초콜릿’이 좋겠어!!!” --- p.23-25
주머니에는 돈이 있었고 잠잘 만한 바닥이 있었지만 엄마는 거지나 별다를 바 없었다. 쌀은 겨우 배급으로나 받을 수 있었고, 팔 물건이 없는 시장은 휑뎅그렁했다. 어느 날 엄마는 작은 가게 앞을 지나갔다. 그 가게의 진열장도 여느 가게와 다름없이 거의 비어 있었지만 무언가 가 엄마의 눈을 끌었다. 배가 고파서 헛것이 보이는 걸까? 눈앞에는 마음을 사로잡는 신기루가 도사리고 있었다. 지금껏 본 것 중에서 가장 큰 초콜릿바가 가득 든 통이었다. 갈색 포장지에 영어가 쓰여 있었다. 숨을 삼킨 엄마는 가게 주인에게 물었다.
“이게 다 어디서 난 거예요?”
주인은 날카로운 목소리로 말했다.
“공산당 녀석들이 미군 PX에서 쓸어온 걸 나한테 판 거야.”
암시장의 초콜릿. 그보다 더 맛있는 게 어디 있으랴? 엄마는 두 번 생각할 겨를도 없이 호주머니를 털었다.
그날 밤 미군의 B-52 전투기가 서울에 폭격을 퍼부었다. 이웃의 하숙집이 불타 사라지고 파편이 날아와 엄마의 머리 위에 있던 교회의 창유리를 산산조각내는 동안 엄마는 허쉬초콜릿바를 품에 넣고 두꺼운 군부대용 담요 아래 웅크리고 있었다. 그리고 다짐했다.
“죽을 운명이라면 초콜릿을 먹다 죽겠어.” --- p.86-87
아빠가 돌아가시고 나자 아빠가 가꾸던 정원도 시들었다. 대숲만 살아남았다. 제대로 가꿀 사람이 없으니 자연스레 뒷마당의 대숲은 정글로 변했다. 몇 번이나 엄마와 함께 뒤꼍에 나가 대나무를 상대로 치열한 전투를 벌였지만 열심히 뿌리를 잘라낼수록 죽순은 더 빨리 솟아나는 것만 같았다. 이런 난리통을 해결하려면 판다를 키우는 수밖에 없다며 서로 툴툴거렸다.일곱 해가 지났다. 꽃 없는 봄도 일곱 번 지나갔다. 미친 듯 자라나는 대나무로 가득한 봄이 일곱 번 흘러갔다. 어느 날 오후 엄마는 허리를 펼 새도 없이 죽순을 뽑고 자른 대나무를 묶어 쓰레기 수거 트럭이 가져갈 수 있도록 집 앞 모퉁이에 내다놓았다. 그다지 보람도 없는 일을 하느라 목을 타고 땀방울이 흘러내렸다. 고갯짓 한 번이면 달려오는 하인으로 그득한 집에서 자란 소녀가 그렸던 미래는 아니었다. 그렇게 자괴감에 빠지던 그 순간, 섬세한 파란색 왕나비가 대숲에서 피어올랐다. 딸들보다 굳센 성격의 엄마였지만 이유 모를 감동이 밀려왔다.
“안녕, 나비야.”
엄마가 부드럽게 흥얼거렸다. 전쟁을 겪거나 미망인이 된 여자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노래였다. 비극의 노래. 나비는 날개를 파닥이고 춤추며 엄마를 달래주었다. 날갯짓으로 엄마에게 말을 거는 것만 같았다. 그리고 오후 내내 엄마 곁을 떠나지 않았다. 떠나지 않으려 했다. 엄마는 맹세코 나비가 엄마를 따라다녔다고 했다. 엄마가 믿는 카드점처럼 신비로운 일이었다.
“난 네가 누군지 안단다, 나비야….”
아빠가 돌아가신 지도 7년이 지난 그해 봄, 엄마네 집의 장미 울타리는 기적처럼 꽃을 피웠다. --- p.239-240
그러나 감히 꿈꾸어온 이상으로 금빛으로 빛났던 황금시대의 한가운데에 그 일이 터졌다. 9·11 사태. 많은 사람들처럼 우리도 뉴욕에 사는 지인 걱정에 미칠 지경이었다. 그날 오후 얼마전 뉴욕으로 발령받았던 다크아몬드바크를 사랑하는 오랜 친구인 ‘곰돌이 씨’에게 연락을 취했지만, 건물이 무너지기 전 가까스로 탈출에 성공했다는 말을 들은 건 꽤 오랜 시간이 지나서였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지만 믿기지 않을 만큼 많은 사람이 죽었으므로 씁쓸한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어쩌면, 어쩌면, 몇 년 전 그가 사다준 초콜릿 네잎클로버가 그에게도 행운을 가져다주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끔찍한 사태도 그렇지만 앞으로 어떻게 계속 가게를 운영해야 할지도 잘 알 수 없었다. 그처럼 거대한 비극의 여파 속에서 우리는 앞으로의 일이 어떻게 될지 한치 앞도 알 수 없었다. 대체 누가 초콜릿을 먹고 싶은 마음이 들까? 가게 문을 열어둔다는 것 자체도 옳은 일인지 알 수 없었다. 게다가 워싱턴 시내에 있는 게 안전하기는 한 걸까? 알아낼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다음 날 우리는 영업을 재개하기로 결정했다. 그날 엄청난 수의 손님이 왔다. 우리와 마찬가지로 손님들도 전쟁이라도 터진 듯 충격받은 상태였고 일어난 사태에 할 말을 잃은 채 가게에서 위안을 찾았다. 같은 생각을 품은 손님이 잇따라 들어와 초콜릿을 샀다.
“마음에 위안을 줄 초콜릿이 필요해요.”
마음의 위안이 되는 초콜릿이라. 언제 죽게 될지 모르던 한국전쟁 폭격 당시 어째서 엄마가 암시장의 초콜릿을 갉아먹었는지 그 이유를 이제야 알 수 있었다. 반세기가 지난 지금 지구 반 바퀴를 돌아와야 하는 곳에서 우리 가게의 손님도 똑같은 감정을 겪고 있었다.
“평생 두고 먹을 수 있겠네요.”
손바닥만큼 커다란 다크아몬드바크 덩어리를 든 비즈니스맨 손님이 말했다. 세태에 지친 여자 손님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저 초콜릿으로 250그램 포장해주겠어요?”
초콜릿을 포장한 진저는 슬픈 미소를 띠고 손님에게 상자를 건넸다. 가게를 나서는 한 손님이 문간에서 돌아서더니 봉지를 들어 보였다.
“이걸 전쟁터에서 나눠준다면 세상에도 평화가 찾아올 텐데 말이죠.” --- p.302-303
“하우스트뤼플을 그렇게 많이 만들었는데 하나 맛도 못 봤네.”
“믿음을 잃지 말라고.”
언니가 동생에게 말했다. 프랜시가 엉금엉금 기어가더니 진열장 아래 재고를 넣어두는 공간을 뒤지기 시작했다. 뒤지고… 찾고… 바깥에서 희미하게 깜박이는 가로등 불빛 아래 프랜시의 보물찾기는 한없이 오래 걸렸다.
“언니, 대체 뭐….”
“쉿…!”
깊이 묻힌 보물은 열심히 파낼 가치가 있는 법이다. 이윽고 프랜시가 갓 뿌린 코코아가루 위에 트뤼플 대여섯 개가 올라앉은 조그마한 크림색 접시를 끄집어냈다. 별빛처럼 반짝였다. 땅에서 막 캐낸 귀중한 보석 같은 초콜릿 덩어리의 매혹적인 자태라니. 진저가 숨을 삼켰다.
“우리 거야?”
그리고 밀려든 아름다운 고요 속에 하나씩 집었다. 입술로 가져갔다. 코코아가루가 각자의 운명대로 날아가도록.
--- p.348-34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