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가 나무들은 어떤 것은 봄 같고, 어떤 것은 가을 같다. 막 피어난 초록 이파리는 헝겊으로 일일이 닦아 낸 듯 윤기가 졸졸 흐른다. 공기 냄새는 쇠똥과 말똥과 타는 건초와 민트를 적절한 배율로 섞어 놓은 것 같다. 초록 구릉 사이를 종일 달리는 일이 뉴질랜드 자동차 일주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 p.60
햄버거를 먹고 차로 돌아왔더니 운전석에 핸들이 사라졌다. 뉴질랜드에는 자동차 핸들만 뽑아 가는 도둑이 있나? 당황해서 가만 보니 핸들이 저쪽으로 옮겨 가 있다. 한국의 운전 습관대로 하면 반드시 조수석에 올라타 핸들을 찾는 바보짓을 하게 마련이다. --- p.63
포후투카와(Pohutukawa) 나무 한 그루가 절벽 끝에 위태롭게 서 있다. 나이는 800살이다. 마오리족은 나무가 있는 절벽을 ‘뛰어내리는 곳’이라는 뜻의 ‘레잉가(Reinga)’라고 불렀다. 마오리족은 죽은 부족원의 영혼이 이 절벽에서 뛰어내려 나무뿌리를 타고 지하 세계로 간 뒤, 선조들의 고향인 하와이키로 돌아간다고 믿었다. 마오리족의 영혼이 고향으로 돌아가는 신성한 장소. 그렇게 이름 붙여진 케이프 레잉가는 파 노스(Far North)로 불리는 뉴질랜드 북섬에서도 가장 북쪽 끝에 있다. --- p.87
타라나키는 질척대는 잡풀 지대를 한참 나아가다가, 너도밤나무 숲 개울이 나타나면 한참을 따라 올라가다가, 어쩌다 사람을 만나면 헬로-하이- 하다가, 갑자기 나타나는 적당한 크기의 폭포 앞에서 뽀뽀 사진을 찍는 동양인 신혼부부를 구경하는 코스다. 산 정상에서 흘러내리던 두꺼운 용암이 멈추며 절벽이 생겼고, 뒤따르던 물이 폭포를 만들었다. 와이탕기 하루루 폭포에 비하면 다섯 배쯤 폭포답다. 물은 어쩌면 저렇게 하얀 속살을 깊이 숨겼다가 떨어지는 찰나 부끄럼도 없이 찬란하게 뽐낼 생각을 했을까. 저렇게 파랗다가 돌연 저렇게 하얗다니, 저 솜씨로 하얀 눈도 만들겠지! --- p.157
차를 들이밀다가 튤립 심던 인부의 삽자루에 얻어맞을 뻔한 식물원은 25헥타르 크기 동산에 하늘을 찌르는 아름드리 침엽수림과 장미 가든, 막 심은 튤립과 고요한 오솔길이 압권이다. 그 사이 베고니아 하우스와 트리하우스, 오리 연못이 구성지게 배치돼 있다. 헨리 무어, 앤드류 드러먼드, 크리스 부스 같은 예술가들이 공원 곳곳에 조각 작품을 들여놓았다. 뉴질랜드 왕립 원예협회가 어지간히 신경 써 관리하는 덕분에 일부러 구불구불 식물원 산길을 택해 출근하는 시민들은 아침 출근길인데도 표정이 행복해 보였다. 완벽하게 쾌청한 아침 햇살을 반사하는 공원의 풍경이란! --- p.179
타푸테랑기섬(Taputeranga Island)을 지나 오휘로만(owhiro bay)까지 달렸다. 길은 레드 록스(Red Rocks), 싱클레어 곶(Sinclair Head)으로 계속 이어졌다. 날이 저물자 파도는 천천히 들이치는 대신 소리는 무겁고 쓸쓸해졌다. 포말이 부딪힌 뒤 밀려 나가는 묵음이 너무 깊어 아득할 지경이다. 우리나라였으면 호텔이다 리조트다 펜션이다 건물 짓느라 호들갑 떨었을 멋진 바닷가에 여전히 가난한 어촌 마을 사람들이 터 잡고 좋은 풍경을 누리며 살고 있다. 세상이 공평해진 기분이다. 길을 되짚어 돌아오며 웰링턴에 온 사람들이 이 해변도로의 아슬아슬함을 즐기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 p.184
넬슨 시내를 천천히 걸었다. 과연 명불허전(名不虛傳), 좋은 햇살이 도시의 모든 사물에 건강한 에너지를 불어넣고, 나무와 집과 거리와 사람과 벤치와 그늘의 색감이 선명 선명하게 일어났다. 검회색 종탑이 서 있는 성공회성당(Christ Church) 계단에 가만히 앉아 폭우처럼 쏟아지는 해를 온몸으로 맞았다. 성당 길 건너 작은 광장에서 교복 입은 아이들의 오케스트라 연주회가 시작됐다. 이날 오후의 순간은 얼마나 충만함으로 가득했던지. 다시 생각해도 따뜻하다. 선명한 도시, 달달한 음악, 매혹적인 커피 향, 흔들리는 야자수 그늘, 음악에 맞춰 건들거리는 사람들의 옅은 발장단, 어쩌면 저렇게 하얀 갈매기, 5초에 한 번씩 Barking, Barking하는 넬슨 소녀들의 유쾌한 수다까지. 모든 게 꽉 찬 느낌을 주었다. --- p.196
빙하가 지나가며 파 놓은 거대한 U자 계곡 한가운데 길이 나 있다. 어떤 곳은 제법 너른 들을 달리는 기분이 난다. 길은 구불거리느라 끊어질 듯 이어지고, 옆으로 눈 덮인 고봉이 줄지었다. 저 높은 아서스 패스를 언제 넘나 싶게 길이 한참 평평하더니 갑자기 고도가 높아진다. 협곡에 길이 8㎞가 넘는 오티라(Otira)철도 터널과 고가도로와 다리와 수로가 동시에 등장했다. 워낙 험한 자연과 싸우느라 당시 인류의 가능한 모든 공학을 동원했을 것이다. 루프(Roof)형 낙석방지 터널이 내려다보이는 쉼터에 잠시 멈춰 ‘사랑한다’로 끝나는 손 편지를 한 장 써 숨기고, 잠시 그리워했다. --- p.206
숲길 너머에 이윽고 나타난 매서슨 호수는 물색이 칠흑을 지향하는 암갈색이라 모든 사물을 투명하게 반사했다. 일찍 잠깬 물오리 한 마리가 전진하며 수면에 은빛 알을 흩뿌리고 있다. 가만히 앉은 물새 주위로 잔잔하게 동심원이 퍼져 나갔다. 물안개가 그늘진 호수 가장자리부터 번져 왔다. 지느러미 뱀장어도 아직 잠에서 깨지 않은 이른 아침, 물안개만 조금 피어오르는 수면은 놀랍도록 아름다운 서던 알프스의 속살을 적나라하게 반사했다. 구름 한 점 없이 쾌청한 하늘 아래 모든 설산이 최고의 기량을 아낌없이 뽐내고 있다. 첫 번째 전망대 제티 뷰 포인트(Jetty View Point)에 서서 숭고한 산들과, 데칼코마니(Dealcomanie)로 반사하는 호수면과, 그 둘 사이 정교한 소품처럼 쭉쭉 솟은 백송 카히카테아(Kahikatea), 리무(Rimu), 양치식물들을 보자니,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12월 달력 사진 속으로 뛰어든 기분이다. --- p.219
하스트 비치. 하얀 백사장, 탁 트인 바다. 아름드리나무들 이 해변에 널브러져 있고, 백사장의 이쪽 끝과 저쪽 끝이 보이지 않는다. 보이는 백사장만 족히 8㎞는 넘어 보인다. 해변 뒤로 눈 덮인 마운트 어스파이어링 국립공원(Mount Aspiring National Park) 준봉들이 뾰족뾰족하다. 꽤나 아름다운 풍경인데 역시 사람이 없다. 아무도 찾지 않는다. 해변 입구에 사람 발자국과 100년 전 사륜구동 자동차가 모래를 밀고 지나간 흔적 한 줄이 있을 뿐이다. 뉴질랜드에서 이 정도 해변에는 사람이 오지 않는다. 풍경의 과잉이다. 우리나라에 있었다면 수많은 파라솔과 인파와 호텔과 모텔과 식당이 즐비했을 텐데. 여긴 파도와 햇살과 모래와 갈매기와 나뿐이다. 외롭다. --- p.229
호수를 따라 왼쪽으로 길게 난 미루나무 숲길을 천천히 걷는다. 일요일 오전다운 속도로 걷다 보니 천국에 온 기분이다. 뉴질랜드에 와서 처음 ‘천국’이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아침 해에 반짝이는 호수, 새 소리, 하늘, 바람, 거대한 적송, 잔디와 흔들리는 작은 꽃들. 호수를 일렁이게 하는 물새와 보트, 크루즈, 걷는 사람들, 뛰는 개들. 와나카는 모든 것이 둥글게 어우러지는 천국이 분명하다. 물 가운데 호수를 건너는 자세로 작은 버드나무(Willow)한 그루가 서 있다. 70년 전 가축을 보호하던 울타리 말뚝이 뿌리를 내려 지금은 와나카 호수의 아름다움을 대표하는 오브제(Objet)가 되었다. --- p.236
다음 날 아침. 구름이 조금 끼었고, 날씨는 쾌청이다. 나와 보니 여기가 퀸스 타운이라는 게 여간 대견하지 않다. 관광지답게 아침부터 사람과 차로 활기를 띠고 있다. 공기가 오로지 쾌적하기 위해 치밀하게 설계된 송풍기에서 나오는 바람 같다. 아, 공기가 이렇게 쾌적할 수도 있구나. 쌀쌀하지도, 덥지도 않은 절묘한 선선함에 햇살이 더해지며 나의 이비인후들이 완벽하게 정상 가동 중이다. 글쎄, 뉴질랜드 자체가 비염치료제라니까. --- p.248
피오르드 국립공원(Fiordland National Park)의 다른 이름, 밀퍼드 사운드다. 덩치 큰 코끼리 떼가 태즈먼 바다를 건너 막 뭍으로 기어오르는 형국이다. 수면 위로 거대한 머리를 드러내고, 몸 근육을 따라 물이 철철 흐르는 모습이 역동적이다. 선두는 거침없는 직진으로 용맹함을 인정받는 해발 1,690m 마이터 피크(Mitre Peak)다. 5개의 봉우리로 이뤄진 마 이터 피크는 수심 수백 미터 바닥에서 수직에 가까운 절벽으로 단숨에 치고 올라오는 기세가 대단하다. 함께 솟은 엘리펀트 피크, 라이언 피크 같은 절벽의 호위를 받으며 좁은 뱃길이 15㎞나 깊숙이 전진해 들어와 있다. 연평균 182일 동안 8,000㎜나 쏟아 붓는 폭우로 숲과 폭포가 무성해졌고, 비와 안개에 가려 있는 비밀 공간에 바다표범과 펭귄, 돌고래가 은둔의 헤엄을 치고 있다. --- p.274
조금 더 동굴 안으로 기어 올라가자 빛 한 줌 들어오지 않는 깊은 곳에 강이 흐르고, 아리아드네(Ariadne)의 실로 묶은 배 한 척이 미궁을 향해 출발을 기다리고 있다. 동굴 가이드가 밧줄을 당기고, 동굴 벽을 손으로 밀어 가며 안으로 들어가자 조금씩 글로웜 불빛이 보이기 시작했다. 과연 한여름 밤의 별처럼 온통 초록인 수천, 수만 빛이 머리 위에서 대롱거렸다. 고개를 쳐들고 어둠을 응시하자 유충이 내뿜는 빛은 마치 광활한 사막에서 올려다본 밤하늘 같다. 선선한 바람이 불고, 어디서 풀벌레 소리가 들리더니 머릿속 턴테이블에서 〈원 서머 나잇(One Summer Night)〉이 자동 플레이됐다. --- p.283
바람 부는 절벽 7부 능선을 타고 바다를 향해 나아가자 저 앞 불룩 솟은 산머리 위에 하얀 등대가 빛나고 있다. 바다에서 곧장 차오른 육지의 끝은 자다가 갈매기 똥을 맞은 거북이 뒤통수를 닮았다. 파도가 미역줄기 멱살을 잡아 흔들고, 육지 끝에 다다르자 바위 너깃 십여 개가 이제 막 뿌려 놓은 공깃돌처럼 어수선하게 늘어서 있다. 돌의 배치는 수평선을 향해 흔들리는 노스탤지어 같기도 하고, 교토 료안지(龍安寺)에 뿌려 놓은 선(禪)의 정원 ‘석정’을 닮기도 했다. 뉴질랜드에서 가장 큰 물개 서식지답게 움직이는 바위처럼 보이는 물개 두 마리가 요란하게 영역싸움을 하는 중이다. 하늘에는 얼룩가마우지와 검정섬새, 가넷새가 남극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몸을 맡기고 활공하고 있다. --- p.297
정원 너머 길게 흘러내리며 둥실대는 오타고 반도의 진초록 풍경. 오타고 반도의 끝까지 동글동글하고, 몽글몽글하고, 올록볼록하게 엠보싱(Embossing)한 섬, 산, 들, 물, 나무, 꽃, 햇살, 바람이 뒤섞여 있다. 아, 미안하지만 나는 글레노키와 와나카에서 이미 써 버린 ‘천국’을 라나크에서 별수 없이 다시 데려오고 말았다. 신들이 모여 연못 딸린 정원을 만든 다면 딱 저렇게 만들겠다 싶을 만큼, 라나크 성에서 내려다본 오타고 반도의 모습은 저항할 수 없는 매력을 풍겼다. 옅은 노랑색 캐슬 볼룸 담벼락에 오타고의 강렬한 오후 해가 사선으로 비쳐 들었다. 풍경이 아름다우면 슬퍼서 눈물이 날 수 있구나, 겨우 라나크 성 하나 봤을 뿐인데 더니든에 온 보람이 느껴졌다. 볕 좋은 성 정원 카페에 앉아 고농축 에스프레소를 롱 바디 블랙으로 주문해 오래 마셨다. --- p.302
종일 운전하며 풍경 하나하나에 가슴 뭉클하고, 덜컥하고, 행복하다. 햇볕, 1자로 늘어선 미루나무 방풍림, 무너져 희미하게 드러난 흙의 속살, 바람에 흔들리며 반짝이는 나무 이파리, 작은 들꽃, 둥글게 구부러져 나가는 길, 해변에 널브러진 옷 벗은 나무들, 파도가 하얗게 밀려오다 검은 모래와 마주치는 순간 검게 변했다가, 다시 하얗게, 잉크색으로 변해 가는 순간의 멋짐. 그리고 살아갈 방편들에 대한 짧은 생각들. 가슴이 저밋, 뭉클, 찌릿하다. 모래가 검은 블랙비치(Black's Beach)에 내려 오줌을 누고 해를 쬐며 이 길 은 어디로 나를 데려갈까 멀리 넘겨다보았다. --- p.388
멀리서 소가 음메- 운다. 벌이 붕붕거린다. 나무 그늘에 새들이 재잘댄다. 숲에서 깊은 바람이 운다. 파도 소리가 작게 들린다. 오래 묵은 나무들은 바람에도 조금만 흔들린다. 나무껍질색이 회색이라 무게 있고 듬직하다. 파리가 윙윙 댄다. 담장 너머로 거리낌 없이 드나드는 바람이 평화롭다. 어미 말이 등걸에 목을 비벼 긁고, 새끼는 꼭 붙어 어미 하는 짓을 배운다. 망아지가 이리저리 뛴다. 노랗고 하얀 작은 꽃들, 그들도 치열한 중이다. 겨울을 견뎠고, 봄볕에 잎과 꽃을 틔웠고, 번식을 준비하고 있다. 가벼운 생명이 어디 있던가. 차문을 열고 눅눅한 옷들을 해와 바람에 말려 널었다. 옷들이 살랑거린다. 사람들은, 나는 왜 이 멀고 구석진 끝에 와 보고 싶어 하는가. 와 보면 언제나 외로움 외에 이렇다 할 것이 없는데 무엇을 찾고, 무엇을 보고, 무엇을 얻어 가려고 파도처럼 쉼 없이 끝을 향해 부딪쳐 가는가. 살 만큼 살다가 가는 것이다.
--- p.39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