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아손이 콜키스로 떠난 것은 누구의 관심도 끌지 못했던 양털 따위를 얻으려고 그랬던 것이 아니라 신들의 숨은 뜻에 따라 메데이아를 찾기 위해서였고, 황금 양털은 신들이 던져놓은 미끼였다. 황금 양털은 원정의 진짜 목적을 감추는 수단이었고, 이아손은 이런 사실을 꿈에도 눈치채지 못했다. 이는 욕망에 대한 완벽한 비유이다. 우리도 이아손처럼 자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고, 더구나 왜 원하는지는 더더욱 모른다. 우리를 가지고 노는 주체가 신이 아니라면, 그것은 바로 우리 자신의 무의식이다. 우리 욕망의 대상이 그토록 우리를 매료하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이런 대상은 우리 안에 무언가를 숨기고 있다. 이것을 찾아 나서는 여행은 그래서 더욱 흥미로울 수밖에 없다. --- p.24
자신이 누구인지 잘 아는 자, 그리고 포기할 줄 아는 자가 바로 영웅이다. 곤경에 빠질 때마다 오디세우스는 여러 차례 거절하는 능력을 보여준다. 칼립소가 선사한 영생불사를 거절했던 것처럼 파이오스섬의 왕이 아름다움의 극치에 있었던 자기 딸 나우시카와의 결혼을 제안했을 때도, 그는 거절했다. 매우 강렬한 이런 유혹도 처자가 있는 집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욕망에서 그를 떼어놓지 못했다. 유혹의 대상이 되지 못하는 자에게는 거절할 것도 있을 수 없다. 그런 자들은 이 세상에서 다른 사람들보다 무엇이든 덜 누릴 수밖에 없다. 결국 호기심으로 추동되는 오디세우스의 지혜는 두 배로 늘어나고, 그는 서서히 매료된다. 다른 세계를 보러 가고, 타자를 발견하고 싶어 하는 호기심이 우선이고 신중함은 그다음인 만큼, 호기심을 의식적으로 경계하지 않으면 순탄하게 가던 길의 방향을 갑자기 틀어버릴 수도 있다는 사실을, 지혜로운 그는 잘 알고 있었다. --- p.39
그리스 신화에서 아들은 아버지 죽이는 법을 배워야 한다. 하지만 유일신을 섬기는 종교에서 아버지는 항상 고마워하거나 그 위상에 비추어 부끄럽지 않은 자식이 되는 법을 배워야 하는 존재다. (...) 신들이 제 자식을 삼켜버리지 않을 때면 일을 더 빠르게 처리하고자 그 아이를 잉태한 어머니를 삼켜버렸다. 왜 이런 일이 반복됐을까? 이는 자식이 세대, 시간, 변화, 그리고 삶 자체를 상징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이 영원의 지배를 위협하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자식에 의해 대체된다. 이것이 바로 새로움의 힘이 탈취한 권위이며, 쇠락할 차례를 맞이하기 전 성장과 승리를 요구하는 생명의 용솟음이다. 비극적이면서 명쾌한 지혜, 아니 비극적인 것에 대해 명쾌한 그리스 신화 고유의 지혜가 여기에 있다. --- p.46
‘자기 모습에 취한’ 상태의 ‘나르키소스’와 ‘마취된’ 상태를 뜻하는 ‘나르코크’는 어원이 같다. 그는 사랑하는 자신을 끌어안고 싶지만, 그럴 수가 없다. 그렇다고 자신의 이미지에서 떨어져 나올 수도 없다. 자신의 이미지가 끊임없이 자신을 유혹하고 포박하여 거기서 벗어나지 못하는 그는 결국 그렇게 죽게 될 것이다. 물가에 붙박여 지내던 그는 결국 자기 이름으로 불리게 될 꽃으로 변하고 만다. 젊고 아름다운 나르키소스는, 우리가 흔히 그렇게 알고 있는 것처럼 자신을 지나치게 사랑해서 죽음을 맞이한 것이 아니라, 죽음에 이를 정도로 자신의 이미지를 지나치게 숭배했다. 이 둘은 같은 것이 아니다. 실제로 문제는 자신에 대한 사랑이 아니라 이미지가 행사하는 치명적인 매혹이며, 정확히 말해서 자신의 이미지는 자신이 아니다. 이미지는 자신을 한정하고, 자신을 불모로 만들며, 자신을 고착시킨다. 투사된 자신의 이미지를 향해 고개를 숙이고, 자신의 외모에 현혹된 나르키소스는 실제 자신의 깊이와 풍부함을 비껴간다. 다시 말해 그는 자신을 빗나가고, 또한 다른 사람들을 빗나간다. 진정으로 누군가를 사랑하려면 매혹에서 빠져나와야 한다. --- p.50
사람들은 똑같은 고속도로 나들목을 지나고 똑같은 광고판을 보고, 층층이 쌓인 똑같은 침대를 사고, 똑같은 햄버거를 먹는다. 기독교의 잘못일까? 우리가 평등하다고, 차이는 중요하지 않다고, 우리는 자주 반복해오지 않았던가? 어쨌든 같은 무리의 핵심으로 들어온 이방인을 상상하기는 쉬운 일이 아니다.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조건에 극단적으로 명확한 태도를 보이지 않는 한 우리 안에서 디오니소스가 자기 자리를 찾을 가능성은 희박하다. 가령, 누군가의 자유가 시작되는 시간에 다른 누군가의 자유는 멈춰야 하기에 노래하고 춤추는 행위를 21시 59분에 멈출 것. 휴대전화 앱으로 점검하면서 적어도 하루에 만 보를 걸을 것. 행동요법 의사의 치료를 받아 안정된 심리 상태를 계속 유지할 수 있게 단련할 것. 간단한 방법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정의하고 이를 열정적으로 유지하려고 노력할 것. 괴팍한 노인들이나 뻔뻔한 젊은이들을 더는 자주 만나지 말 것. --- p.57
헤라가 헤라클레스를 깎아내리거나 그를 파멸시키려고 구상했던 모든 음모는 오히려 헤라클레스에게 스스로 힘을 확신하게 하고 그 힘을 키워나갈 계기이자 자신의 가치를 드높일 기회가 됐다. 시험과 전투로 점철된 그의 삶은 십자가를 지고 걸어간 길과도 같으며 그에게 불멸을 선사하게 될 것이다. 그는 신 가운데서도 으뜸 신이 될 것이다. 헤라클레스라는 이름이 ‘헤라의 은총’을 의미한다는 사실도 명확하게 드러날 것이다. 결국, 헤라가 없었다면, 그러니까 그녀가 그에게 부과했던 그 모든 시련이 없었다면 헤라클레스는 절대 그 자신이 될 수 없었을 것이다. 잔혹하면서도 흐뭇하고, 또한 난감하기도 한 이런 진실은 못된 부모에게 시달리는 자식들, 상사들에게 괴롭힘을 당하는 샐러리맨들, 다른 사람들의 해코지에 상처 입은 자들을 안심시킨다. 우리의 불행을 바라는 자들이 때로는 우리에게 좋은 일을 하기도 한다는 사실을 알려주기 때문이다. --- p.69
운명에 대한 고대인들의 생각은 현실에 대한 정의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현실을 요리조리 피해 간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며, 부정하기에는 또한 너무도 극적이기 때문이다. 정신분석의 진정한 목적이 바로 여기에 있다. 우리가 현실을 받아들이고, 현실에 귀 기울이도록 돕는 일 말이다. 세상에는 우리 힘으로 바꿀 수 없는 것들이 있다.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그럭저럭 잘 해결하고 살아가는 아이들보다 우리는 훨씬 더 복잡한 존재다. 예컨대 우리는 우리가 이 세상에 오기 훨씬 전에 이미 시작됐고, 싫든 좋든 우리를 구성하고 있는 서사의 상속자들이다. 이 서사에서 빠져나오려고 하면 할수록 이것은 운명을 우리 몸에 절대 떨어지지 않도록 붙들어 맬 것이다. --- p.91
오비디우스는 『변신 이야기』에서 거인들과 맞선 올림포스 신들의 전쟁에 관한 일화를 들려주는데, 여기서 신들은 작은 동물로 변신해서 이집트 사막으로 도망친다. 그렇다면 단순한 필멸자 인간에게는 허락되지 않는 이 변신의 힘이 내포한 의미는 무엇일까? 겉모습은 언제라도 달라질 수 있으니 속지 말라는 교훈일까? 그럴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변신은 우리가 경이롭다고 생각하는 것이 거기서는 아주 자연스러운 것인 어떤 세계, 우리의 하찮은 정신으로는 모순이라고 규정할 수 없는 것이 거기서는 전혀 그렇지 않은 어떤 세계에 대해 우리에게 말한다. 변신은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것을 받아들이기를 우리에게 요구하고, 신들과 필멸자들, 그러니까 육체에 묶여 살아가도록 강제되고, 자신의 외모, 자신의 정체성에 붙박인 필멸자 사이의 차이를 강조한다. 니체나 사르트르 같은 몇몇 철학자가 강력하게 거부하는 것은 바로 본질에 갇힌 인간의 이 같은 한계다. 그리스 신들과 마찬가지로 우리도 변신할 수 있다고, 제한 없이 우리를 다시 발견할 수 있다고, 그들은 우리에게 말한 것이다 --- p.113
사르트르는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에서 인간은 ‘본질’을 갖지 않는다고 썼다. 다시 말해 그는 바로 이렇게 인간을 동물과 사물로부터 구별했던 것이다. 인간은 있는 그대로가 되려고 고집할 필요가 없다. 인간은 이것도 저것도 될 수 있으며, 좋은 사람도 나쁜 사람도, 즐거울 수도 슬플 수도 있으며, 동성애자도 이성애자도 될 수 있다. 인간은 영웅이나 겁쟁이로 변신할 수도, 매력적인 사람이나 못생긴 자로 변신할 수도 있다. 정체성이 인간을 결정하는 것은 아니며, 본성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은 더욱 아니며, 사회적 배경이 인간을 결정하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그렇다고 주장하는 자들은 기만하는 것이다. 이런 자들은 이 총체적인 자유와 그에 따른 책임감에 두려움을 느낀다. 그러니까 이들은 신이 되는 것에 두려움을 느끼는 것이다. 결국, 신의 죽음을 선언한 니체와 무신론적 실존주의를 주장한 사르트르는 우리 자신에 관해, 우리의 결정, 우리의 가치, 우리의 삶에 관해, 우리가 신처럼 되기를 바랐다. 우리는 이 철학자들의 주장을 따를 수도 있다. 아니면 이와 반대로 그들을 불신하고, 거기에서 위험한 교만, 그러니까 그리스 신화가 우리에게 경계하라고 끝없이 경고하는 그 ‘히브리스(오만)’의 철학적 발현을 목격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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