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길
나를 위로하며 감나무 호박 봄꽃 폐가 청둥오리 부부 그 샘 거미 보따리 초승달 최제우 옥탑방 귀향 폐타이어 식목일 백미러 길 위에서 깔려 죽은 뱀은 납작하다 길의 길 물 정수사 길 2 그림자 봄 환한 그림자 불타는 그림자 질긴 그림자 불 탄 산 고향 개밥그릇 뿌리의 힘 폐타이어 2 일식 그림자 사십 세가 되어 새를 보다 그늘 학습 원을 태우며 아, 구름 선생 달과 설중매 그리움 해바라기 논 속의 산그림자 3 죄 천둥소리 전구를 갈며 김포평야 검은 역삼각형 눈사람 여름의 가르침 소스라치다 감촉여행 그리운 나무 십자가 돌에 기호 108번 같은 자궁 속에 살면서 개 도살장에서 죄 큰물 4 뻘 섬 뻘에 말뚝 박는 법 뻘 숭어 한 지게 짊어지고 승리호의 봄 닻 주꾸미 푸르고 짠 길 물고기 동막리 가을 어민 후계자 함현수 분오리 저수지에서 개 낚시 이후 한밤의 덕적도 저 달장아찌 누가 박아 놓았나 물고기 2 뻘밭 딱딱하게 발기만 하는 문명에게 산문 ㅣ 섬이 하나면 섬은 섬이 될 수 없다 |
저함민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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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시집 [우울씨의 일일]과 두번째 시집 [자본주의의 약속]에서 시인은 자본주의 혹은 수직으로 세워진 문명에 대해 비판한다. 그리고 세번째 시집, [모든 경계에는 꽃이 핀다]에서 함민복은 문명비평가와 우울증을 떨쳐버리고, 슬쩍슬쩍 존재의 안쪽을 들여다본다. 세번째 시집 출간 후 시인은 강화도로 삶의 거처를 옮긴다. 아니 밀려간다. 여기서 시인은 문명도 존재의 의문을 이전처럼 되새김하지 않는다. 대문을 열면 눈앞으로 끝없이 펼쳐져 있는, 먼지도 일지 않는 바닷길, 거대한 수평선은 딱딱한 땅위에 수직의 길로 세워진 거만한 문명을 일순간에 지운다. 섬과 함께 섬처럼 떠 있는 시인의 마음도 섬으로 밀려오고 다시 밀려가는 바닷물의 흐름과 함께 가득 채워지고 또다시 비워진다. 그렇게 채워지고 비워진 지 어언 10년, 어느 사이 시인의 마음은 부드럽고 말랑말랑한 뻘밭이 되었다. 그리고 마음의 뻘밭에선 문명 속에서 자랄 수 없는 생명의 힘이 꿈틀꿈틀 존재의 구멍을 만들어 내었다. 그래서인가, 함민복의 네번째 시집 [말랑말랑한 힘]은 잘 반죽된 부드러운 개펄에서 캐낸 펄떡이는 시어들로 가득 차 있다. 개펄의 상상력과 그 언어는 온전한 삶을 걸어가게 하는 길을 제시해준다. 함민복 시인은 개펄의 ‘물골’이야말로 길의 원형이라고 말한다. 육지에 난 물길은 물이 스스로 길을 내어 휘어지고 돌아가면서 강이라는 길을 만들어내지만, 뻘에서는 사람들이 걸어가며 만들어낸 길과 물이 스스로의 본성으로 찾아간 길이 결합돼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그것이 뻘의 물골이다. 하지만 시인은 물길만 보지 않는다. 살아 우는 글자를 찍으며 날아가는 기러기들의 하늘길도 있는 것이다. "요즘 내가 살고 있는 강화도에서 들을 만한 소리는 기러기 소리다. 하늘에서 나무대문 열리는 소리가 나 나가보면 수십, 수백 마리 기러기가 하늘에 글자를 쓰며 날아간다. 살아 우는 글자. 장관이다."의지만으로 개척할 수 없는 것이 인생의 길이라면 개펄의 물골과 새들이 나는 하늘길과 같은 자연의 길은 우리가 바라보고 걸어가야 할 삶의 길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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