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항에 가득한 크리스마스 장식과 들려오는 신나는 음악 때문에 다이하드 오프닝 같아.
두근두근 무슨 일이 생길 것만 같은 출국길! 은 무슨. 여행 첫날 생리하는 거 이젠 징크스인가?
진통제 입에 털어 넣고 비행기 탔는데 잠은 안 오고, 읽으려고 가져온 책은 가방에 넣어서 선반에 올려뒀고,
하는 수 없이 일기장 펴서 끄적거린다. 계획도 정리하다 하다 할 게 없으니 눈에 보이는 거 뭐라도 그리자.
근데 진짜 오랜만에 종이에 그림 그리니 다시 학생이 된 기분이야.
양장 스케치북을 일기장으로 들고 온 게 너무 허세 같아서 약간 후회되기 시작한다.
여느 때처럼 한 삼사일 쓰다 말고 그대로 가져가겠지. --- 본문 중에서
베이징을 경유하는데 공항이 너무 넓어서 ‘으악!’ 하고 캐리어를 들고 달린다.
환승 게이트는 도대체 어디에 있는 것인지, 게이트 번호도 너무나 많고, 시간도 촉박하고, 몸까지 아프다. 나는 왜 매번 후회하면서 배낭 대신 캐리어를 들고 오는가.
돌다 돌다 간신히 내 게이트를 발견해서 벤치에 쪼그려 눕는다.
이번 비행기에서는 제발 편히 잠들게 해주세요, 생리의 신이시여! --- 본문 중에서
태국은 운전석이 한국과 반대라는 걸 몰랐어.
기사님이 짐을 실어 주시는 동안, 택시 문을 열고 운전석에 앉을 뻔했지 뭐야.
기사님도 나도 ‘으하하’하고 웃어버렸어.
“치앙마이는 처음이니?”
“응응, 처음이에요!”
“여길 좋아하게 될 거야. 정말 아름다운 곳이거든!”
택시는 반짝반짝한 치앙마이의 ‘old town(올드 타운)’ 강물을 따라간다.
‘맞아요. 벌써 좋아하게 될 것 같아요.’ --- 본문 중에서
11시 늦은 기상. 날씨는 아주 좋아.
가볍게 동네를 산책하다가 올드 타운 구석구석에 숨어있는 사찰을 구경.
커다란 꽃송이들 발견하고 그 앞에서 엄마와 영상통화를 했다.
쌀국수가 맛있다!
너무너무 더워서 코끼리 그려진 반바지를 사서 바로 갈아입었어.
입고 온 청바지를 버리고 싶다! 인터넷에서 1월의 치앙마이가 춥다는 글을 읽은 것 같은데 말이지.
‘올드 타운’의 네모난 성곽을 따라서 강이 흐르고, 분수에서 무지개를 볼 수 있었던 날. --- 본문 중에서
난 지금!
내일에 대한 걱정도 없고, 아무런 걱정이 없다.
이렇게 많은 사람이 아무도 나를 모르기에
나는 무엇이든 할 수 있고
어디든 갈 수 있다는 사실! --- 본문 중에서
타패게이트 앞 커다란 무대에서 전통의상 입은 사람들이
피리 불고 노래하고 춤을 춘다.
바닥에 앉아서 손뼉을 치며 들썩이는데
어쩐지 해방감에 눈물이 날 뻔했다. --- 본문 중에서
수영장에서 수영을 하고, 썬베드에 누워 그림을 그리고 일기도 쓰고,
볕은 따가운데 물은 시원하고, 사람도 적어서 그야말로 유유자적할 수 있는 시간.
나중에 나도 노년에…. 아니 뭘 노년이야.
…중년 즈음엔 이렇게 커다란 (함께 있지만, 개인의 공간도 지켜지는) 집에서, 친구들이랑 모여 살면 좋겠다.
남는 방은 게스트하우스? 여성 홈리스나 청소녀, 미혼모, 노약자를 위해서 사회적 기업처럼 빌려주며 재활을 돕는 건 어떨까.
하고 싶은 공부, 하고 싶은 일을 마음껏 할 수 있는 학교도 좋을 것 같아. 예술대학을 설립하고 싶어.
주말엔 수영장 파티와 프리마켓, 전시를 여는 거야. --- 본문 중에서
늦은 시간, 기타를 어깨에 메고 꽃 셔츠를 입은 남자가 대문 앞에서 내 쪽을 보고 있었다.
‘아, 또 직원으로 오해한 건가?’ 싶어 직원을 불러주려는데, 그 남자가 나를 바라보며 바지를 내리고 있었다.
너무 놀라 로봇처럼 그대로 고개만 돌려, 등 뒤에서 시끌벅적 이야기 중이던 백인 친구들에게 눈으로 구조요청을 해보려는데,
그들은 나에게 “Hi~” 하고 인사를 한다.
아니 아니, 그게 아니고,
“There is a guy! enjoying himself with his…….”
하고 속삭이듯 소리쳤더니, 남자들이 총알처럼 튀어 나갔다. 하지만 이미 아저씨는 도망간 후였다. --- 본문 중에서
Rene Smit이라는 친구가 아까 그리던 그림이 궁금하다고 보여줄 수 있는지 물어보더라. 쑥스러웠다.
사장님도, 매니저도, 다른 친구들도 모두 내 그림을 돌려보며 즐거워 보였다.
친구들이 인스타그램 하냐고 친구 하자고 해서 인스타그램 계정을 만들었다.
웃기지 않아? 나는 한글로 일기를 쓰니까 아무도 내가 쓰는 걸 읽지 못해.
이렇게 오픈된 곳에서 바로 옆에 사람들이 북적북적거려도, 나는 그저 하고 싶은 말들을 적을 수 있다는 게, 무언가 안심이 된다. --- 본문 중에서
바로 며칠 전 20대의 마지막 겨울
까만 밤, 일은 끝이 보이지 않았고
잠을 못 자 일하다 죽을 것 같았고
혹여 잠이 들면 얼어 죽을 것 같은 회사에서
하루종일 컴퓨터만 보며 그림 그리는 직업을 왜 택했나 후회했었는데 --- 본문 중에서
내가
그림 그리는 걸 좋아하니까
그리지 않고는 견딜 수 없으니까
그리면 행복하니까
행복하게 그리고 싶으니까
---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