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의 발전은 국내총생산의 규모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국가의 성원 모두에 제공하는 교육, 의료, 복지 등에 의해 삶의 질의 수준이 결정되는 것이다. 경제성장률, 국가경쟁력 순위, 세계적 기업의 숫자가 국력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다. 모든 시민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돈이 없어 아플 때 병원에 가지 못하거나 배우기 위해 학교에 가지 못하는 상황이 일어나지 않는 것이다. 직장에 다니는 엄마가 몸이 아픈 자녀를 위해 눈치 보지 않고 직장에 휴가를 신청하고, 대학을 마친 사람이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직장이 많은 사회가 평범한 시민을 위해 필요하다. 진정한 발전을 이룩하기 위한 조건은 모든 시민이 인간답게 살 수 있는 기본적 생활을 보장받고 기회의 평등을 누릴 수 있는 사회이다. --- p.41
박정희 정부 시기는 지구적 차원에서 부상한 발전주의의 영향 아래 한국에서 발전 담론이 부상하는 시기이다. 선진국 담론은 급격한 사회변화를 민족의 역사적 사명인 ‘선진국 진입’을 위한 과정으로 해석함으로써 박정희 정부가 주도한 발전주의와 근대화 사업을 정당화했다. ‘주변화’한 후진국과 ‘이상화’한 선진국의 위계관계 속에서 경제발전의 당위성을 전자로부터 후자로의 이행에서 찾았다. 이 시기 선진국 담론의 부상은 주요 개념들의 사용이 증가한 데서 잘 나타난다. 실제 ‘선진국’, ‘후진국’ 등의 개념이 거의 나타나지 않는 이승만 대통령의 연설문에 비해 박정희 대통령 연설문에는 이런 개념들이 흔히 나타난다. 반면 ‘문명’, ‘야만’과 같은 개념의 사용은 크게 줄었다. ‘선진국’은 문명 담론 속의 ‘문명국’ 개념을 대체해 바람직한 나라를 지칭하는 대명사로 자주 사용되었으며, 현실적으로 한국이 근대화를 통해 따라잡아야 할 나라로 자리매김했다. --- pp.66~67쪽: 제2장 한국의 발전국가와 발전주의 中)
직접적 통제 이외에도 저임금?장시간 노동을 당연시하는 담론들이 대거 동원되었다. 공장새마을운동 및 새마음운동은 장시간 노동의 인내를 국가 발전이나 국가 안보, 충·효와 동일시하면서, 노동자의 계급적 이해를 ‘국가적인 것’으로 환치시켰다. 회사 및 고용주는 국민과 국가 사이의 관계를 ‘가족 관계’로 의인화한 담론을 그대로 작업장에 차용했다. 국민의 권리에 앞서 조국의 근대화가 우선해야만 한다는 국가주의 논리와 마찬가지로, 회사의 생산성·경쟁력 향상은 노동자, 노동조건, 노동자의 삶에 앞선다는 것이었다. 노동자들은 국가·자본의 성장과 발전을 위해 불평등한 현실을 ‘감내할’ 줄 아는 존재가 되어야 했다. 이러한 감내 메커니즘, 희생 논리는 공장새마을운동의 일환으로 출간된 모범근로자의 수기 속에서 반복적으로 계열화되는 것들이다. --- p.110
결과적으로 김대중 정부의 신자유주의 개혁은 초기에 강력한 재벌개혁 의지를 보이면서 개혁에 저항한 재벌들을 해체하는 데까지 나아갔다. 하지만 신자유주의 개혁에 순응하고 새로운 환경에 적응한 재벌들은 부채비율 감축을 통해 재무적으로 업그레이드되고 경제력 집중은 오히려 더욱 심화되었다. 부채비율의 감소, 국가경제 내부에서 지배적 재벌의 비중 확대는 국가의 재벌 통제역량을 약화시켰다. 나아가 재벌은 정부와 정계를 포함한 사회전체를 금전적, 이데올로기적으로 포섭하기 시작했다. 결국 위기가 수습된 후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의 말처럼 ‘권력은 시장으로 넘어갔다’. --- p.146
그러나 민주주의적인 국가들이 모두 경제적으로 부유한 국가는 아니라 하더라도 경제적으로 부유한 국가들이 민주주의적 정치제도를 실행하고 있는 이유는, 민주주의가 경제적 부를 창출하는 자본주의적 체제를 보호하고 유지시키기 때문이다. 슘페터가 지적한 대로 자본주의의 발전은 결국 사민주의적 요소를 도입할 수밖에 없고 그렇게 함으로써 자본주의는 마르크스가 예견한 혁명에 의해 파괴되는 대신에 사회주의적 요소를 도입하여 그 모순을 극복하게 된다. 예컨대 복지국가는 사민주의의 도입을 통해 자본주의를 구출하는 대표적인 정치적 전략이었다. 유럽의 국가들이 19세기부터 20세기 초반까지 겪었던 계급 갈등은 결국 민주주의를 촉진시켰고 경제적 부의 기반이 되었던 자본주의를 수정하여 유지시켰다. 선진국들이 민주주의 때문에 경제적으로 성장한 것이 아니더라도 자본주의를 유지하기 위해 도입한 가장 효과적인 처방이 민주주의였던 것이다. --- p.221
산재보험 도입 그 자체는 획기적인 노동자 복지제도의 발전이라고 보기 어렵다. 조국근대화 전략을 내세워 국가가 적극적으로 산업화를 추진하고자 했던 데 비해서 사회보험제도 발전에서 국가의 역할은 ‘적극적’인 것이 아니었다. 특히 이 시기에 ?공무원연금법?(1961)과 ?군인연금법?(1963)이 곧바로 실행되었던 것과는 대조적으로(국가재건최고회의, 1963.1.5), 산재보험과 동시에 논의되었던 의료보험이 강제성이 없는 보험제도로서만 출발하게 되었다는 점은, 정당성 이론의 지적대로, 군사정부가 일시적으로 사회복지정책에 관심을 가졌던 것일 뿐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기존 논의에서 간과되었던 부분은, 군사정부가 어떤 ‘정치적 의도’로 사회정책 개발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든 당시 사회개혁의 요구를 반영하기 위한 것이었든, 사회복지정책에 대한 군사정부의 ‘지도’가 사회복지정책 변화에 중요했다는 사실이다. --- pp.343-344
시민들이 사회복지정책을 기꺼이 지지하기 위해서는 공정하고 신뢰할 수 있으며 부패하지 않은 정부가 필수적이다. 1984년부터 2000년 사이의 18개 OECD 국가를 조사한 결과, 정부의 질과 복지국가의 규모 및 관대성 간에는 통계적으로 유의미한 상관관계가 나타나고 있다. 즉, 20세기에 들어 보편적 복지국가를 발전시킨 국가들은 이전 시기 동안 정부의 질을 꾸준히 향상시켜왔다. 일례로 스웨덴, 덴마크, 영국, 독일은 19세기 동안 부패와 후견주의의 폐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제도를 개혁했고, 공무원을 채용하고 정책을 실행하는 데 있어서 실적제에 기반한 불편부당한 시스템을 도입했다. 따라서 이들 국가는 복지정책의 성공적인 도입에 필수적인 정부의 역량과 신뢰성에 대한 시민들의 지지를 안정적으로 확보할 수 있었다. 결국 산출지향적 정당성을 위한 경제적 및 사회적 성과를 확보하는 데 있어서 정부의 질은 필수불가결한 요소이며, 북유럽과 남유럽의 복지국가 거버넌스의 차이 역시 상당 부분 정부의 질에 기인한다고 할 수 있다.
--- p.4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