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제로 양자역학에 접근하는 가장 좋은 길은 역시 고전역학이다. 고전역학에 길들여진 사고는 한편으로 양자역학의 이해를 방해하는 측면도 있지만 그렇기에 오히려 이것을 의식적으로 넘어서는 작업이 필요하다. 그리고 고전역학은 좋은 길 안내자이기도 하다. 생소한 양자역학의 세계에 들어서서 방황하게 될 때 개략적인 ‘약도’의 구실을 하는 것이 바로 고전역학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우리는 다시 고전역학을 새롭게 이해하게 된다. 그간 우리는 고전역학에 너무도 친숙하여 문제점을 느끼지 못하고 있었지만 진정 이것을 이해했다고 말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 p.25
서울 해석이 기존의 대다수 해석들과 특별히 구별되는 점은, 쟁점이 되고 있는 실재성 문제 및 측정 문제와 관련하여 그동안 대다수의 해석들이 주목하지 못했던 양자역학의 인식구조, 곧 양자역학을 통해 대상 사물을 인식하는 과정을 명확히 하고 이로부터 실재성 문제와 측정 문제가 진정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그리고 이를 어떻게 해결 또는 해소할 것인지를 밝히려 한다는 점이다. 서울 해석이 양자역학의 인식 과정에 특별히 주목하는 이유다. --- pp.93~94
서울 해석의 성취는 보어 이후 한동안 잊힌 인식론적 문제를 다시 논의의 초점으로 끌어냈다는 것이다. 정보이론이나 서울 해석처럼 과거의 통찰을 재발견하는 일은 단순한 반복이 아니라 새로운 의미의 창조이다. 역사란 과거에 이미 완결된 사건이 아니라 미래의 전개에 의해 새로운 의미가 끊임없이 펼쳐지는 장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양자역학의 초기 해석과 해석상의 논쟁을 검토하는 일도 현재의 작업을 반추하며 미래의 가능성을 타진하는 의미가 있다. 물리학에서 진정으로 새로운 진보와 혁명은 이렇게 다양한 관점을 공정하게 검토하고 평가하는 과정에서 예기치 않게 생기는 것일지 모른다. --- pp.160~161
봄의 양자운동이론이 보여준 것은 입자가 시공간상에서 연속 궤적을 가진다는 발상이 양자역학의 정식 체계와 양립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나아가 그의 이론은 슈뢰딩거 파동방정식으로부터 입자의 궤적을 실제로 계산해낼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이와 관련된 논문과 교과서들이 1980년대 이후 점증하고 있다. 비평가들은 봄 이론이 기존 해석을 능가하는 실험 차이를 산출하지 못했다고 논평한다. 이 논평은 현재 상태에서 거의 틀리지 않았다. 하지만 양자운동이론이 우리의 상식 존재론을 파괴하지 않는다는 점은 결코 과소평가할 수 없는 매력이자 장점이다. --- pp.177~178
양자역학은 우리가 직접 경험하는 세계의 여러 현상들에 대해 매우 정확한 예측을 제공한다. 이러한 양자역학을 참인 이론으로 받아들이면, 인간의 감각으로 직접 경험하는 현상뿐만 아니라, 직접 경험하지 못하는 미시세계의 모습에 대해 양자역학이 말해주는 바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관심을 갖게 된다. 그런데 양자역학은, 우리가 직접 경험하는 현상들을 예측하고 통제하기 위해 필요한 최소한의 틀을 제공할 뿐, 미시세계의 구석구석이 어떻게 생겼고 어떤 방식으로 작동하는지에 대해 모두 말해주지는 않는다. 양자역학이 대답하지 않는 질문들에 대해 양자역학과 일관된 대답을 제공하는 것이 해석이다. --- pp.195
란다우어와 서울 해석 모두 정보를 추상적 수준에서는 물리학 이론이 상정하는 상태기술에 내재하는 것이면서 동시에 대상계가 존재론적으로 구현하고 있는 것으로도 볼 수 있다는 점에 동의한다. 하지만 이 둘 사이의 차이에 대해 그다지 주목하지 않는, 그래서 정보의 물리적 성격과 물리학적 성격 사이의 차이점에 둔감한 란다우어에 비해 서울 해석은 정보의 물리학적 성격을 보다 강조한다. 물론 서울 해석도 정보가 물질적 우주에 내재하는 물리적 성격을 가질 수 있는 가능성을 부인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일차적으로 정보는 인식주체의 인식 활동에서 획득된 인식론적 추상물로 간주되어야 한다. 정보를 존재론적으로 해석할 수 있는지의 여부는 인식주체를 인식 과정에서 ‘남겨진 부분’ 이상으로 명확하게 해명할 수 있을 때에나 대답될 수 있을 것이다. --- pp.233~234
의사소통 중인 사회의 맥락, 타자와 함께 사물과 접촉하는 기나긴 지각 과정의 역사, 나아가 인류가 자연과 교류한 지각의 전체 역사, 인류가 공통 세계 속에서 서로 의사소통한 전체 역사가 현재 우리가 갖고 있는 의미를 구성한다. 어쩌면 우리가 발화하는 문장의 의미는 인류 출현 이전 생명의 역사까지 어렴풋이 담고 있을지도 모른다. 이 거대한 정보의 네트워크를 대강이나마 파악하려는 과제는 전체 과학들이 참여해야 하는 거대한 연구 프로젝트일 것이다. 정보가 플라톤이 사유의 장소로 상정했던 곳, 버클리가 무한 정신이라 불렀던 곳, 프레게가 제3의 영역이라고 말했던 곳에서 생성되는지, 아니면 역사 속에서, 특히 진화의 역사 속에서 생성되는지, 우리의 물음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 pp.290~291
생명현상과 관련하여 널리 알려진 “생명이란 네겐트로피를 먹고 사는 존재”라는 명제에서 엔트로피를 잃어버린 정보로 해석하면 네겐트로피는 바로 정보에 해당한다. 이 명제는 원래 생명의 본성으로서 물질대사를 지적한 것이다. 그러나 물질대사도 본질적으로 정보의 흐름과 깊은 관련이 있다. 따라서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이 명제는 복잡계의 전형이라 할 수 있는 생명의 본질을 기술하는 데에 결국 정보가 핵심적이라는 사실을 강조한다. --- p.419
‘앎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은 매우 독특하다. 무릇 어떤 물음이 추구하는 것은 그 해답에 해당하는 앎을 말하는 것인데, 이 물음은 앎 그 자체가 무엇인가를 다시 묻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편 앎이란 것도 우주 안에 나타나는 한 가지 현상임에 틀림없으므로 우주 안의 모든 것에 대한 보편적 존재 양상을 일단 전제할 때, 그리고 우리가 그 보편적 존재 양상을 잠정적으로나마 이해한다고 할 때, 앎이란 것은 그 안에서 어떤 위상을 차지하게 되는 것인지를 논의할 수가 있다.
--- p.44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