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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해 겨울은

그 해 겨울은

[ 한글·영문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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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19년 01월 31일
쪽수, 무게, 크기 320쪽 | 640g | 148*210*30mm
ISBN13 9788993694512
ISBN10 8993694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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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1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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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의 눈 소식에 나는 비행기 예매부터 해버렸다. 봄의 달콤한 진달래 산행에 이어, 여름과 가을의 광교산의 매력은 나를 겨울로 끌어들였다. 아이젠을 준비해 두었으나 주말의 눈 소식은 나를 감질나게 했다. 겨울 산이라 하면, 몇 해 전 직원 야유회로 한라산을 오른 때가 생각난다. 눈이 녹아 안개에 덮인 백록담은, 1950미터 정상의 고지를 내 발자국 남긴 사진 한 장으로 아쉬움을 고스란히 남겼다. 다시금 한라산의 백록담을, 이젠 눈 쌓인 한라산을 보고 싶었다.
게스트하우스에 도착하니 버스에서의 흥분이 조금 가라앉았다. 그러나 저녁시간의 어둠이 낯선 곳의 긴장감을 주었다. 안내자의 설명을 들으니 이곳은 대부분 한라산 등반하는 사람들이라고 한다. 성판악과 관음사 편으로 나뉘어 아침 7시에 출발한다고 한다. 저녁을 간단히 먹고 둘러보니 20, 30대 젊은 층이 많았다.
아침에 눈을 뜨니 청명한 날씨가 우리를 반겼다. 간단하게 아침을 먹고, 게스트하우스에서 준비해준 김밥과 생수를 챙겼다. 휴게실의 한라산 등반지도를 보며 이번에는 관음사 입구에서 출발하기로 결정하였다.
산 전체에 펼쳐진 은빛 물결의 설경. 폭설 후의 무릎까지 쌓인 온통 하얀 등산로. 나무 사이로 눈 위에 비춰진 반짝이는 보석의 햇살, 눈꽃나무에 시선을 뺏겨 탐라계곡을 지나 탐라골 개울을 건너가고 깔딱고개를 치고 올라간다. 기지개를 켜며 잠시 몸의 유연성을 가다듬는다.
구름 없는 파란 하늘의 설원은 삼각봉대피소의 12시 이후 입산통제라는 안내가 무색하다. 해발 1,500미터 얼어붙은 나뭇가지에 매달린 겨울은 꽃처럼 길을 안내해 주었다. 여기 모인 산객들은 따뜻한 차 한 잔을 하며 눈 쌓인 평화로운 하루를 감사하며 마음속 탄성을 지르며 변덕쟁이 겨울을 달래고 있다. 발아래 펼쳐진 제주 시내가 한 눈에 보이며, 멀리 바다의 물결에 시선이 끝 간 데 없다. 더불어 몇 해 전 삼각봉 인근 낙석이 발생하여 삼각봉 대피소에서 용진각 현수교까지 정밀진단으로 통제가 되었던 구간이었는데 지금은 복구되어 안전하게 오를 수 있다니 이것은 어찌 보면 나의 행운이다.
겨울왕국이다. 출렁다리 용진각 현수교는 내가 마치 공주가 된 듯 설레임으로 왕관릉을 바라보고 있다. 임금의 왕관같이 생겨 왕관릉으로 불린다. 웅장하게 우뚝 한 것이 거의 수직을 이루며 깎아지른 듯 높이 솟은 눈 쌓인 암벽. 왕관릉과 한라산 능선의 설경은 장관이었다.
고지가 높아짐에 아이젠의 위력이 대단하다. 미끄러움 없이 계단을 오를 수 있어 시야는 온통 상고대 감상으로 눈 위에 벌렁 누워버렸다. 눈과 바람과 나무가 빚어낸 조화, 뭐라 형언할 수 없는 기쁨이 밀려든다. 태양을 보고 전진하는 기상과 아름다운 자태의 구상나무는 우리나라에서만 볼 수 있다. 햇살과 마주치니 은구슬처럼 반짝인다. 한라산 북벽을 따라 눈꽃이 절경이다. 제주도 서쪽과 동쪽 지역이 한눈에 보이며, 드문 인적에 스치는 인연이 혼자의 산행이냐며 굳이 사진 한 장을 남겨준다. 백록담에서 관음사로 내려오는 그들을 바라보며 정상의 고지가 나의 걸음을 재촉한다.
녹담만설綠潭滿雪. 백록담에 쌓인 흰 눈은 그대로 표출되었다. 새벽에 옹달샘 약수로 갈증을 해소하듯 시원함을 느낀다. 어디 그뿐이랴. 정상에서 바라본 북쪽의 다도해섬, 남쪽 바다의 섬들이 저 멀리 파란하늘과 뭉게구름이 하나 되어 마치 내가 신선이 된 듯하다. 이런 조화는 스위스 융프라우(4,158미터)를 오르던 그때의 감동을 다시 떠올리게 했다. 22킬로미터나 뻗어 있는 알레치 빙하와 이곳 백록담 오늘의 만년설은 자연의 경이로움에 나에게 평생 가져갈 마르지 않는 샘, 힘의 기운을 느끼게 해준다.
성판악으로 내려오며 눈 속의 고사 식물은 걸음을 멈추게 했고 지루함을 달래주었다. 그리고 사라오름 호숫가는 약 250미터 축구장 만 하다. 눈 덮인 호수 북쪽으로 난 탐방로를 따라 숲을 지나고 전망대로 향한다. 전망대의 오른쪽은 한라산 정상이 보이고, 왼쪽 멀리 푸른 바다가 펼쳐지고 가운데로 서귀포가 보인다. 태고의 숲 너머로 이국적인 제주의 풍경이 파노라마로 펼쳐진다.
한라산은 금강산, 지리산과 삼신산三神山의 하나로 꼽히는 명산이라 한다. 예전엔 삼복더위에도 한라산 정상에는 얼음과 눈이 남아 얼음을 날라다 공물로 바쳤다고 하니, 오늘 나는 겨울왕국의 터널을 지나온 것이나 다름없다. 그저 그 신비로움에 감탄할 뿐이다.
수증기의 승화로 생긴 나무 서리인 상고대가 펼쳐지고, 그 곳에 또 눈이 쌓이면서 한라산 전역은 눈꽃 세상이 되었다. 여덟 시간의 산행으로 온 우주를 품은 듯 나는 새로운 세상을 보았다. 처음으로 홀로 산행을 하며 힘든 코스도 즐기며 자신감으로 충만함을 가졌다. 이런 경험은 나의 앞으로의 삶에 용기를 주는 원천이 될 것이다.
그해 겨울. 그렇게 나는 가슴속에 사진 한 장을 품는다.
---「그 해 겨울은」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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