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9년 2월 1일(양력)에 발표된 선언문이다. 국호를 대한으로 사용했고, 당대 민족대표 안창호, 이승만, 김좌진, 박은식, 신채호 등 39명이 동참 서명한 명실상부한 첫 선언서로 꼽히며, 음력으로 무오년에 발표되어 일명 ‘무오독립선언서’로 불린다.
본 선언서의 집필자는 삼균사상을 주창한 조소앙 선생이다. 선언서의 내용은 대한은 완전한 ‘자주독립국’이요, 민주의 ‘자주국가’임을 골자로 대내외적으로 이를 확인시키려는 의도가 담겼다. 즉, 국권의 자주성을 강조하는 한편 독립은 민족자존의 정당한 권리 행사이지 감정이나 보복이 아니라는 것을 강조했다.
특히 일제의 강제 병합수단은 사기, 위협, 무력에 의한 것이므로 이로 인한 한일합방은 무효이며, 일본은 자기 나라 섬으로, 반도는 반도로 돌아갈 때 비로소 제자리를 찾고 안정된다는 해결 방법까지 제시했다, 만약 그렇지 않을 때는 이천만 민족이 무적의 칼과 정의를 앞세워, 하늘을 거스르는 일제와 그들의 모든 악을 제거하기 위하여 몸을 탄환삼고 싸워 독립을 완성할 것을 선언했다. ---「대한독립선언서」중에서
일본 도쿄에 유학 중인 청년학도들이 결성한 ‘재일본 도쿄 조선독립청년단’은 1919년 2월 8일 [2·8독립선언서]를 작성하여 조선기독교청년회관에서 선포했다. 본 선언서는 이광수 선생이 기초하고 백관수 선생이 발표하였다. 여기에 실린 현대어 해설은 YMCA와 한국독립유공자협회 측에서 한 것을 게재했음을 밝힌다.
본 선언서의 주된 내용은 일본이 우리 요구에 불응하면 영원히 혈전하겠다는 무력적 결사항쟁 의지를 선포한 것으로, 이 부분은 [무오독립선언]과 그 맥을 같이 한다. 특히 적국 한복판인 일본 동경에서 민족자결을 위하여 민족대회를 개최했다는 것과, 22세에서 31세까지의 청년학도들의 선언서란 점에서 큰 의미가 담겨 있다. 또한 본 선언서는 [3·1독립선언서]보다 거의 한 달이나 앞서 선포된 것으로, 3·1만세운동의 도화선 역할에 결정적이었고, 대내외적으로 우리 동포들의 자주독립운동을 하는 데 있어 큰 반향을 일으켰다. ---「2·8독립선언서」중에서
1919년 3월 1일 조선민족대표 33인에 의하여 종로 태화관에서 선포되었으며 3·1만세운동의 기폭제란 점에서 독립선언서의 백미로 꼽힌다. 특히 비폭력주의란 기치 아래 무저항의 평화주의에 입각한 정의, 인도주의적 선진문화민족의 선비기질을 최대한 표방한 독립선언서로 의미가 크다.
본 선언서는 육당 최남선 선생이 기초하고, 만해 한용운 선생과 최린 선생의 자문이 컸다. 본서에 실린 현대어 풀이는 일석 이희승 선생께서 하신 것을 그대로 게재했음을 밝힌다.
특히 [3·1독립선언서]는 천도교, 기독교, 불교 등 광범위한 민족대표들이 하나가 되어 선포한 것으로, 우리나라는 물론 세계적으로 한민족의 기상을 떨친 위대한 선언서로 꼽힌다.
3·1정신은 실제 상해 임시정부를 세우고, 일제의 무단정치를 중지시켰으며, 죽었던 한민족의 혼을 되살린 민족부활의 대행진이었다. 특히 3·1정신은 식민지 국가들의 자주독립의 물꼬를 튼 기념비적인 쾌거로, 세계사의 흐름을 바꿀 정도로 많은 국가에 영향을 미쳤다. ---「3·1독립선언서」중에서
1919년 3월 13일 간도에 거주하고 있던 우리 동포들에 의해 발표된 것이다. 조국 광복을 손꼽아 기다리며 살아가던 80여 만 명의 동포들은 본국의 3·1독립운동의 소식을 듣자, 기다렸다는 듯이 적극 호응해 그곳에서 독립운동의 집회를 열고 본 선언서를 발표하였다.
본 선언서는 [3·1독립선언서]의 내용에 따라 비폭력주의를 표방하는 한편 [3·1독립선언서]와 동일한 공약3장을 실었다는 점에서, 간도지방의 3·1독립선언서라 칭할 만하다. 문장은 비록 짧지만, 문체의 화려함은 탄복을 넘어 경이롭기까지 하다. 내용의 요지는 ‘하늘과 땅, 천리와 순리가 다 우리 편이니, 일본은 크게 반성하여 돌아가라’고 타이르는 격조 높은 선언서라 할 수 있다. 다만 이 선언서를 누가 기초했는지 밝혀지지 않아 안타깝다. ---「독립선언포고문」중에서
1919년 3월 17일 노령 니콜리스크, 우스리스크에서 조선국민의회가 선포하였다. 당시 노령에서 거주하던 동포들은 조선국민의회를 결성, 본 선언서를 작성하여 회장, 부회장, 서기 세 사람이 대표로 선포했다. 선언서의 주된 내용은 일제의 만행을 하나하나 지적하며, 침략적인 야심들에 대해 역사적 근거를 들어 조목조목 꾸짖는다. 한편 과거 역사에 있어서도 우리 한국이 일본을 가르친 스승의 나라이며, 중국과 연합하여 동아시아의 대문명을 이룬 ‘문명국’이라는 것을 주지시키고 있다. 특히 데라우찌총독 암살미수사건 일명 105인사건은 기독교를 박해하기 위하여 일제가 한국 기독교와 애국지사들을 연계시켜 탄압한 조작된 사건이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또한 일제의 강제합방에 대해 담담히 기술하며, 3·1운동 때 일본이 군중들에게 가한 만행을 상기시키며, 그 어떤 희생이 있더라도 자유와 정의, 평화와 이상을 위해 ‘용감히 분투’할 것을 선언했다. ---「조선국민의회 의장 등의 독립선언서」중에서
1919년 2월 17일(자료에 따르면 1919년 3월 18일 선언한 것으로) 경상남도 하동에서 박치화를 비롯한 12명의 대표들이 한국의 독립을 선언한 선언문이다. 이에 일명 3·1만세운동이 일어나자 하동군 적량면 면장 박치화는 사표를 제출하고, 정낙영·정인영·이성우 등 12인의 대표들과 함께 독립만세 운동을 계획하여 지방 자체적으로 독립선언서를 작성하여 선포했다.
하동은 지방의 자그마한 읍내에 지나지 않았지만 그 선언서의 웅장함은 놀랍다. 선언서의 요지는 ‘세계평화회의와 민족자결주의를 하느님이 주신 기회로 보고, 하나된 마음은 총칼보다 강하며, 만세소리는 대포보다 강하다’는 것을 주지시켰다.
또한 최후의 1인까지 최후의 1각까지 폭력이나 무질서를 버리고, 정의와 인도로서 대한의 광복과 세계의 평화를 위하여 독립의 문으로 나아가자고 호소하고 있다. ---「하동지방독립선언서」중에서
1919년 3월 19일을 전후하여 일본 오사카지방에서 노동자들이 주축이 되어, 3·1만세운동을 지지하며 이 운동에 동참할 것을 선언한 것으로 노동자들을 대표하여 염상섭 선생이 선포하였다. 당시 일제에 의하여 강제로 끌려간 많은 한인들은 오사카에서 노동에 종사했는데, 고국에서 3·1만세운동이 일어나자 이들도 이에 호응하고자 분연히 일어서 선언문을 발표했다.
주된 내용은 미국 윌슨대통령의 민족자결주의에 입각하여 우리 민족의 자주권을 주장했다. 또한 ‘일본과 한국은 조상이 같다’는 것을 부각시켜 합병을 정당화시키려는 일제의 이중성에 쐐기를 박는다. 역사적으로 우리가 천여 년이나 앞서 있고, 어찌 동족이라고 하면서 합병이라는 것을 할 수 있는가에 대한 부당함도 지적하고 있다.
비록 적지 일본 땅이지만, 우리의 독립을 위해서라면 주저함이 없이 한 목숨 바쳐서 독립운동에 동참할 것임을 분명하게 상기시키고 있다. ---「재오사카한국노동자독립선언서」중에서
1919년 3월 20일 혼춘에서 대한국민의회의 이름으로 선포되었다. 오사카를 비롯한 재외동포들의 뜨거운 애국심의 면면이 잘 드러나 있다.
선언서의 주된 내용은 강제합병조약을 폐지할 것, 극악무도한 일제의 탄압정책을 중지할 것, 한민족은 4천년의 역사와 이천만 민중이 자급자족할 수 있는 천연의 산물을 가지고 있으므로 독립할 자격이 있음을 주장하며, 또한 동양의 평화는 먼저 한국의 평화를 이룬 후에야 가능하다는 것을 강조했다.
한편 3·1만세운동을 진압함에 있어 일본 헌병과 경찰의 잔인함과 일제의 만행에 대해 일일이 열거해 그 참상을 상기시켰다. 한편 그들이 뜻한 바가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죽음을 불사하고 독립을 달성할 때까지 영구적인 혈전에 돌입할 것을 선언했다. ---「대한국민의회독립선언서」중에서
만주 모아산 부근에서 1919년 3월 25일에 선포된 선언서이다. 당시 만주는 우리의 독립운동의 거점지로 의병활동이 활발하게 전개되던 곳이다
본 선언서는 [3·1독립선언서]의 대전제를 인용하여, 한편의 짧은 선언서를 작성하여 독립 의지를 천명했다. 다른 선언서에 비해 문장이 매우 간단하지만, 선언서를 발표한 곳이 만주 모아산 부근이란 상징성과 한규설, 곽종석, 손병희, 최린 선생 등 서명자들의 면면이 우리 독립운동사에 있어서 손꼽히는 국내외 저명인사란 점에서 선언서가 갖는 의미가 매우 크다. ---「만주모아산부근독립선언서」중에서
1919년 3월경 함경북도 경성군에서 박용한을 비롯한 천도교 교인들이 발표한 선언문이다. 지방의 선언문이지만 그 내용은 역사적 근거와 실례를 바탕으로 문체가 논리적이고 수려하며, 실로 장엄하기까지 하다.
단군 이래 우리의 모든 역사를 더듬어 민족의 정통성을 주장하며, 북미주의 흑인노예해방과 민족자결주의를 연계시켜 조선 독립의 당위성을 주장했다. 특히 한·일 관계에서, 한국은 일본에 문화와 문명을 전수해 준 선진문명국임을 환기시켰다.
한편 종교인들의 선언서란 점에서 거룩한 뜻을 하늘로 돌리고, 모든 동포들이 분연히 일어나 동참할 것을 호소하며, 세계평화회의에 대한 기대와 조국독립에 대한 희망과 평화를 천명한다. ---「함경북도천도교인독립선언서」중에서
1919년 4월 ‘재대륙대한독립단임시위원회’ 명의로 만주에서 선포하였다. 본 선언서는 실제 만주에서 독립운동에 가담하고 있는 단체에서 발표한 것이란 점에서, 그 내용이 힘차고 박진감이 넘친다.
또한 독립에 대한 자신감으로 충만하며, 향후 일제의 행보에 따라 폭력대응도 서슴지 않겠다는 항쟁 의지가 결연하다. 이들은 3·1운동 때 일경이 우리 민족 5천여 명을 학살하고도, 국제무대에서는 거짓만 일삼는다는 것을 일제에 상기시키고 있다.
한편 일본이 이러한 학살을 계속한다면 세계 인류의 적이며, 동양의 평화를 깨는 원수로서, 거족적으로 자유행동을 취할 것을 경고하며 ‘이에는 이, 눈에는 눈’ 폭력의 가능성을 예고하고 있다는 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재대륙대한독립단임시위원회독립선언서」중에서
1919년 10월 31일 [대한민족대표독립선언서]란 제목으로 박은식 선생을 위시한 30명이 서명하여 선포한 선언서이다.
이 선언서의 특징은 대한민국 원년 3월 1일이라고 선언문에 명기함으로, 임시의정원과 임시국무원, 임시정부의 체계적인 발전을 공포했다는 점에서 대내외적으로 대한민국이 독립국임을 선포한 정치적인 선언서이다.
3·1만세운동이 있은 후 수개월이 지난 시점, 이후 더욱 악랄해지는 일본의 만행에 대해 성토하되, 3·1정신의 대의에 따라 다시 한 번 인내하며 끝까지 비폭력을 고수할 것을 대내외에 공포하고 있다.
한편 일제가 우리의 영토를 계속 점유한다면 혈전뿐이라며, 공약 삼장의 세부 지침까지 정해 최후의 1인까지 독립의 요구를 할 것임을 강조하고 있다. ---「대한민족대표독립선언서」중에서
1919년 11월 영친왕 이강 선생을 위시한 33명의 대한 민족대표들이 선포한 선언서이다. 본 선언서에는 ‘황제의 실수’로 인해 백성들이 일제로부터 참혹한 고통을 겪는다는 참회의 정을 피력했다. 또한 3·1만세운동은 미국의 민족자결주의의 선언 등 세계 평화를 추구하는 시대 변화에 따른 극히 당연한 거사임을 강조했다.
이러한 추세에 따라 우리는 독립을 선언하고 정부까지 세웠으나, 시대의 형세와 추이를 외면한 일제는 탄압과 학살, 만행은 날로 더해 감을 대내외적으로 알리는 한편, 일제가 끝내 회개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목숨을 걸고 최후의 1인까지 혈전을 펼치겠다는 경고가 담긴 선언서이다. ---「대한민족대표 의친왕 등의 독립선언서」중에서
1919년 11월 15일 대한승려연합회에서 선포한 것으로 12명의 대표자가 서명했다. 본 선언서는 일제의 만행을 일일이 적시하며, 우리 역사에 있어서 나라가 위기에 처했을 때마다 불교가 나라를 구하는 데 앞장서며 충성을 다해 왔음을 밝히고 있다.
또한 3·1만세운동의 민족대표 33인 중에 한용운과 백용성 두 명이 승려임을 각인시키며, 그동안 수많은 불교도들이 독립운동에 헌신해 왔음을 상기시킨다. 일제의 교활한 종교탄압을 신랄하게 비판하는 한편, 불교도인 이전에 대한의 국민으로서 나라를 구하고, 역사에 빛나는 한국불교의 계승발전을 위하여 분연히 일어나 싸울 것을 다짐하고 있다. ---「대한승려독립선언서」중에서
1919년 여성들이 선포한 [대한독립여자선언서]이다. 도산 안창호 선생의 장녀 수산 여사가 소장했던 것을 ‘한국독립문헌전시회’에서 일반에게 공개되었다. 일본의 야만적인 합방의 부도덕성과 탄압정치의 잔인함을 하느님께 호소하는 일종의 탄원적인 선언서이다.
여성들의 선언서란 점에서 여타 선언서에 비해 감성적인 면과 문체의 수려함이 돋보인다. 특히 ‘스파르타국의 사리부인’의 구국적인 충정, ‘이탈리아의 메리야 부인’의 용기, 임진왜란 때 ‘진주기생 논개의 충정’, ‘평양 기생 화월의 희생’ 등을 예로 들면서, 실제 여성들도 단합을 하면 그 역량이 만만치 않을 것임에 분연이 일어나 분발할 것을 잔잔하게 호소한다. 한편 초대교회의 성도들의 무장을 보면서,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독립을 이룰 것을 기원하는 선언서이다. ---「대한독립여자선언서」중에서
1920년 11월 5일 한국청년독립단 대표 5명의 이름으로 선포된 선언서이다. 3·1운동이 일어난 지 근 2년 가까이 세월이 흐른 무렵, 일본의 만행이 더욱 교활한 방법으로 한국을 철저하게 고립시키려 할 때, 중국에서 활약하던 한국청년독립단에서 ‘중국 선언서’를 발표한 것이다.
선언서의 내용은 동양평화의 근본이 한국의 독립이요, 일본의 한일합병은 사기로 증명되었으며, 일본의 현재 정책으로는 한국의 발전은 기대할 수 없다는 것이 주된 골자다. 이런 상황에서 세계 평화의 보장은 불가능하니, 금번 개최되는 워싱톤 회의에서 이 문제가 원만히 해결되기를 바라면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입장을 지지하는 선언서이다. ---「한국청년독립단독립선언서」중에서
1922년 3월 1일 천도교의 보성사 이종일 사장을 중심으로 사원 일동이 발표한 선언문이다. 본 선언문은 3·1만세운동의 3주년에 즈음하여 그간의 일제의 폭력과 만행을 상기시키며, 기미년의 감격을 재현하기 위하여 끝까지 조선독립을 위하여 신명 바칠 것을 맹서하는 선언문이다.
선언문의 주된 내용은 애국지사와 독립운동가들에게 용기와 희망을 심어 주고, 백성들은 광복의 꿈을 갖고 일제에 맞서 분연히 일어날 것을 호소하는 선언문이다.
특히 일본의 교활한 음모술수 즉, ‘유화정치’의 함정에 기만당해서는 안 되며, 짚단 위에 잠자고, 창을 베개 삼아서라도 자주독립을 성취하여 훌륭한 조상이 되자는 결기가 담겨 있다. ---「자주독립선언문」중에서
1919년 7월 10일 만해 한용운 선생이 3·1운동으로 구금되었을 때, 일본인 검사총장의 요구에 응하여 옥중에서 집필한 독립선언서이다. 본 선언서는 1919년 11월 4일자 '독립신문', 1947년 4월 1일 자 '신천지' 제2권 3호(3,4월 합병호) 등에 게재되어 당시의 애국지사들의 높은 공감을 일으킨 선언문이다.
'독립신문'에는 그 제명을 [조선독립에 대한 감상의 대요]로 되어 있다. 만해를 오래도록 모시던 김관호 선생에 의하면, “이 글을 본 일본인 검사는 선생의 탁월한 사상에 경의를 표하며, 이론은 정당하나 본국 정부의 방침이 불변하니 수용할 수 없다”고 언명하였다는 유명한 전문이 있다. 그때 한용운 선생은 간수의 눈을 피하기 위하여, 그 전문을 세서로 휴지에 등사하여 접고 접어서 종이노끈을 만들어, 형무소로부터 차출하는 의복 갈피에 꽂아 넣어 밖에 내보냄으로 빛을 보게 된 것이다. ---「조선독립의 서」중에서
1923년 1월 단재 신채호 선생이 의열단의 요청으로 집필한 의열단 선언문이다. 의열단은 독립운동을 실천함에 있어 가장 격렬한 무력혁명의 방식을 고수한 열혈단으로 그 명성이 자자하다. 의열단은 “혁명수단으로 우리 생존의 적인 강도 일본을 살벌함이 곧 우리의 정당한 수단이다”고 선언하며 무력에 의한 극렬한 투쟁을 선호했다.
동시에 일본과 타협하는 자(내정독립, 자치, 참정권론자)나 강도정치 아래서 기생하려는 자(문화운동자) 등은 모두가 우리의 적으로 타도의 대상이라고 주장한다. 또한 외교론자와 준비주의자들을 배격하며, 민중의 직접적인 혁명을 선창한다. 강도 일본을 몰아내자면 혁명 아니고는 길이 없다는 것이다. ---「조선혁명선언」중에서
1919년 2월 27일경 임규 선생편으로 일본에 보낸 독립통고문이다. 본 통고문의 주된 내용은 일제의 침략이 아시아의 위협이며, 더 나아가 세계평화의 장애라는 것이다. 동시에 서구 백인들의 위협에 대처하여 아시아는 평화를 유지해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세계적으로 인도주의와 평화가 대세란 점에서, 일제의 대륙에 대한 침략 야욕은 꺾일 수밖에 없음을 천명하며, 결국 한일합병은 불가능함으로 조선은 독립해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한편 일본을 위해서도 조선독립이 유익함을 설득하며, 한일 양국 관계를 개선하여 새로운 미래를 열어 가야 함을 논리 정연한 논지로 설명한다. ---「일본에 보낸 통고문」중에서
1919년 2월 26일 현순 목사 편으로 미국의 윌슨 대통령에게 보낸 조선독립에 대한 일종의 탄원서이다. 주된 내용은 세계대전에 참여하는 미국이 세계평화를 위하는 길이라면 조선의 독립이 필수라는 것을 역설하는 한편, 극동의 조선 문제가 유럽의 발칸지역 문제와 동등한 가치가 있음을 부각시키고 있다.
또한 일제의 침략주의와 한국에 대한 가혹행위를 폭로하며, 러일전쟁, 청일전쟁에서의 한국의 피해와 일본의 거짓과 기만에 대해서도 자세하게 밝혀 윌슨 대통령의 관심을 유발케 하는 일종의 탄원서 성격이 강하다.
이에 민족자결주의를 주창한 미국의 윌슨 대통령을 ‘신의 사도요 정의의 투사’라고 한껏 치켜 올리며, 우리의 뜻이 관철되기를 희망하는 구진서이다. 그러나 미국은 결국 진주만 공격을 당한 후에야 이를 깨닫게 된다. ---「윌슨대통령에게 보낸 호소문」중에서
일제의 한일합방 후 통한의 분을 삭이지 못한 유림들이 기회만 보고 있던 중, 1919년 1월부터 세계평화회가 파리에서 열린다는 것을 듣고 작성해 발표한 선언서이다.
한국 유림 대표 137명이 서명한 본 선언서는 심산 김창숙 선생으로 하여금 우리 한국의 실정과 일본의 침략성과 만행에 대해 국제 정의에 호소하는 장문의 글로 논리 정연하고 수려한 문체와 힘이 돋보이는 호소문으로 유명하다.
---「한국유림파리장서」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