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와 같은 근대의 기획들 가운데 ‘지성인의 결혼’도 있다. 이 ‘결혼’에 지성적이라는 수식어를 붙이는 이유는 파트너 중 한쪽 혹은 두 사람 모두가 지적인 활동에 종사하기 때문은 아니다. 파트너 선택과 동거 형식이 개성적이고 합리적인 이유를 댈 수 있는 구상을 따르기 때문에 그렇게 부르는 것이다. 즉 지성인의 결혼은 ‘하나의 생각’에서 태어나고, 그것에 의해 지속되며, 바로 그것 때문에 흔들리지 않고 유지될 것을 기대할 수 있는 관계이다. 결국 ‘지성인의 결혼’이란 하나의 약속된 관계이며, 바로 그렇기 때문에 ‘지성적인’이라는 타이틀을 당당하게 주장할 수 있는 것이다.
이 책의 테마인 ‘지성인의 결혼’은 결국 독립된 한 개인의 어떤 행동에 대한 이야기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단지 그 기획과 체험, 거기 담겼던 희망과 실패가 너무나 눈에 띄어, 후대의 커플들이 따라 하거나 변형을 시도하거나 혹은 그 모델 자체를 아예 거부하고도 남을 만했던 어떤 행동이다.
‘지성인의 결혼’은 결혼과 그것에 대한 회의 사이의 불안한 절충이다. 서로 대립적일 수밖에 없는 이상들이 하나로 모아져야 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지속적인 성찰과 토론, 실험들이 필요했다. 그로스가 살았던 삶을 막스 베버가 숙고했고, 슈바빙에 사는 사람들의 삶의 방식이 하이델베르크에서 토론의 주제가 되었다.
시몬 드 보부아르가 루앙에서 교사 생활을 할 때부터 친구였던, 소설가 콜레트 오브리(Colette Aubry)는 이 두 사람의 등장이 미친 영향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그들의 관계는 완전히 새로운, 어떤 것이었다. 그와 비슷한 것을 나는 그때까지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이 두 사람이 함께 경험했을 그 감정이란 것이 어떤 것인지, 나는 설명할 수가 없다. 그것은 바라만 보기에도 너무나 강렬한 것이었다. 그래서 때때로 슬퍼지기도 했다. 그런 것을 나 자신은 가질 수 없다는 생각이 들면 말이다.”
오직 사랑에 대해서만 이야기하고, 감정의 매 순간순간을 만끽하고, 거대한 열정 대신 소소한 즐거움을 누리는 것이, 그들이 살았던 시대에는 뻔뻔스러운 일이었다. 더군다나 그런 일을, 마치 무슨 혁명적 대범함인 양, 인류에 대한 봉사라고 주장하는 것은 있을 수도 없는 일이었다. 보부아르와 사르트르는 오토 그로스처럼 자신들의 에로틱한 실험을 구원의 행위로 보았다. 다만 오토 그로스와 다른 점이 있다면, 여기에서는 해방에 참여하는 여성이 이미 스스로 해방된 여성이라는 점이다.
낭만적인 사랑은 항상 결혼을 꿈꾸었다. 왜냐하면 결혼에 이르러야만 몽상적인 독서의 세계가 비로소 현실적인 이성이 믿을 수 있는 예비학교로서 인정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마리안네 베버가 자기 자신과 막스 베버에게 까다롭게 요구했던 것들은, 약혼한 처녀가 충분히 가질 법한 환상들이었으며 결혼으로서만 그 정당성을 입증받을 수 있는 것들이었다. 막스 베버와 인생의 동반자로서의 삶을 시작하면서 그녀가 독서로부터 얻었던 지성적인 행복은 곧 현실에서의 지성적인 행복이 되었다. 그렇지만 낭만적인 사랑에 있어서 마리안네 베버는, 그녀뿐만 아니라 소설을 즐겨 읽던 많은 여성 독자들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는데, 정신적 열정만 사실로 인지할 수 있었을 뿐, 감각적 열정은 느낄 수 없었다. 문학이라는 예비학교는, 두 사람의 몸이 가까워지게 하기보다는 두 사람의 머리를 보다 쉽게 연결시켰던 것이다.
“제3의 일”은 이미 오래전부터 커플들을 결속시켜왔다. 예컨대 가족의 체면, 돈, 살림살이, 자녀. 하지만 브레히트의 창작 공동체는 미래를 향하고 있었으며, 규격대로 짜 맞춘 반복이 아닌 창작품들을 내놓았다. 마치 세대에서 세대로 이어져가는 흐름처럼. 브레히트 주식회사는 새로운 아이디어, 새로운 형식들, 새로운 연극들을 만들어내었다. 아내들, 연인들, 자녀들, 그리고 친구들로 구성된 브레히트의 지성적 창작 공동체는 가치를 확신할 수 있는 일에 시간을 바쳤다. 브레히트의 작업장은 모든 가능한 능력들을 하나로 결속시켰다. 다만 그들의 자아실현을 위해 두 사람 이외에 더 필요한 “제3의 일”이 무엇이어야 하는지는 스스로 결정해야 했을 것이다.
“모든 사람이 꼭 결혼을 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결혼은 점점 더 그 고유한 의미를 찾은 사람들에게만 의미 있는 일이 되어갈 것이다. 그것은 무엇이든 고도로 발달할수록 당면하게 되는 일이다.” 카이절링의 미학적 요구들은 결혼생활이 사라진 사회를 가리키고 있다. 결혼이 하나의 예술작품이 되어야 한다면, 그것은 어떤 흔치 않은 재능을 필요로 할 것이다. “결혼관계의 유일무이성에서 볼 때, 그로부터 추론할 수 있는 것은 결국, 결혼이 진보하면 할수록 그것이 이성 간의 유일한 관계로 간주되는 일은 점점 더 늘어나기는커녕, 점점 더 드물어질 거라는 점이다.”
수많은 결혼들이 명백한 실패로 끝났음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이혼한 남자의 80퍼센트가 재혼을 하고, 이혼한 여자들 가운데 72퍼센트가 또다시 결혼을 결심한다. ‘지성인의 결혼’은 하나의 일부일처제가 끝나면 새로운 일부일처제가 시작되는 형식으로 변화된다. 여기에 현대적인 결혼의 진정한 특성이 비로소 드러난다. 그것은 본질적으로 하나의 실험이며, 실험이란 결코 끝을 맺을 수 없으며, 다시금 반복되기 마련이다.
지난 수십 년 동안 수많은 비속어들이 결혼이라는 사전에서 사라졌다. 그와 관련된 언어가 정화되었다는 것은 파트너를 일컫는 다양한 관계들을 휴머니즘의 관점에서 바라볼 수 있게 되었음을 말해준다. 그에 반해 감정을 교환하는 관계의 다양한 가능성들을 지칭하는 새로운 개념들이 나타났다. 동거, 파트너, 반려자, 동반자, 생활공동체, 계약결혼 등. 단지 결혼이라는 말만으로는 더 이상 의미할 것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거기에 어떤 형용사가 덧붙여지느냐에 따라 어떤 종류의 관계가 문제되고 있는 것인지 드러난다. 삶의 파트너로서의 결합인지, 동지들의 결합인지, 전통적인 부부 역할에 충실한 결합인지, 아니면 지성적인 합의를 모색하고 있는 결합인지.
결혼은 이제 더 이상 강요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결혼을 해야만 획득할 수 있었던, 오직 결혼 안에서만 가능했던 모든 것들을 그사이 다른 곳에서도 찾을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성생활, 자녀교육, 주거 공동체, 사회적 접촉 등. 식당과 작은 술집들, 유치원과 탁아소, 독신자들의 거주지와 주거 공동체, 도시의 축제와 동호인들의 파티가 예전에는 부부들이 담당했던 전통적인 과제를 넘겨받았다. 그들이 공개적으로 표방하고 있는 사회 단위의 형태는 가족이 아니다. (…) 문제는 그룹이다. 한 쌍의 커플이 아니라 하나의 그룹이 사회를 구성하는 가장 작은 단위인 것이다. 물론 그런 그룹들은 어느 한 시기에 즐거움을 공유할 뿐이며, 그 이상의 어떤 의무를 지지는 않는다. 모범적인 그룹은 당연히 책임감을 가지고 함께 일하는 팀이어야 한다. 한 팀으로서의 삶은 어쨌거나 꽤 많은 시간과 파트너로서의 집중을 요구한다. 팀으로 존재하는 관계에서도 에로틱한 관계들은 형성될 수 있다. 우정도, 토론 서클도, 동호인 그룹도 가능하다. 어쨌든 그들은 단독자로 존재하는 개체를 잠시도 가만히 내버려두지 않고 바쁘게 만들어준다. 누군가와 커플이 되는 순간부터 그러하듯이 말할 수 없이 다양한 사건들로.
‘지성인의 결혼’을 둘러싼 실험들은 행복에 이르는 길 위에 있는 사회를 보여준다. 그들이 지향하고 있는 행복은 쉽게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 힘겨운 역사적 시도는 결혼 형태의 변화뿐만 아니라 모든 삶의 영역에서 하나의 새로운 개방성을 가져왔다. 실험 자체가 이제 하나의 라이프스타일이 되었다. 제도로서의 결혼은 이미 명망을 잃어버렸다. 남자든 여자든 결혼을 하지 않았다는 것이 심각한 결점이 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파트너와의 내면적 유대는, 일단 그것을 받아들이게 되면, 점점 더 친밀해지고 보다 많은 책임감을 요구하는 것이 되고 있다.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