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변 사람들과는 유별나게 다른 우리 가정의 삶의 여정은 하느님께서 준비하시고 하느님께서 이끄신 길이었습니다. 저와 제 아내는 아무것도 모르고 따라나선 이 길에 이런 행복이 있을 줄은 정말로 몰랐습니다. 생활성서사에서 처음 원고 청탁을 받았을 때, 이런 놀라운 행복을 발견한 사람으로서 저는 이 행복을 이웃에게 알려야 할 책임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월간지 『생활성서』에 한 달 한 달 조금씩 써 나간 것이 어느덧 3년이 되었고, 글을 모아 보니 적지 않은 분량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동안 많은 분이 우리의 글을 읽고 함께 기뻐해 주셨습니다. 무척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글을 쓰면서 다짐했던 것은 이 글이 제 개인의 이야기가 아니라 하느님의 이야기가 되게 하자는 것이었습니다. 우리 집의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사실은 우리 삶을 이끌어 주신 분이 하느님이시기에, 우리 집 삶의 이야기 속에서 언뜻언뜻 드러나는 하느님의 모습을 찾아서 보여 드리고 싶었습니다. 단행본으로 엮어 내는 이 글들이 행여, 우리 집의 자랑에 불과하다면 나중에 시간이 흐른 뒤에 그 누구의 기억에도 남아 있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들은 다름 아닌 하느님의 자랑이었다고 믿습니다. 그래서 이 글들이 독자 분들의 가슴속에 하느님의 손길에 대한 기억으로 오래오래 남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모아 보았습니다. -‘책 머리에’에서
정말 그 누구에게도 말하기 싫을 만큼 힘든 상황에서 우리 가족에게 위로와 버팀목이 되어 준 것은 나의 신앙 공동체였다. 윗집에 사는 교우는 김밥을 만들어 오고 또 어떤 이웃은 아내가 잘 먹어야 한다며 맛있는 점심을 사 주었다. 신앙 공동체에서 받은 애정 어린 선물들도 고마웠지만, 무엇보다 감사한 것은 기가 막힌 이 사실을 세상 사람들처럼 보지 않고, 하느님의 눈으로 보아 주고 위로와 격려를 아끼지 않은 사실이었다.
엘리사벳이 성모님께 하신 말씀, “주님의 어머니께서 나를 찾아주시다니 어찌 된 일입니까?” 엘리사벳은 어떻게 이런 놀라운 말을 할 수 있었을까? 성모님은 그 말 한마디에 또 얼마나 큰 위로를 받으셨을까? 주위에 아무도 이해해 주는 이 없고,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었던 성모님, 그런 가운데 배가 불러 오는 상황에서 ‘주님의 어머니’라고 불러 준 엘리사벳의 위로 한마디는 정말 위대한 찬미가 아닌가? -‘우리를 찾아 주시다니 어찌 된 일입니까?’에서
동전을 삼킨 지 한 달, 미사를 드린 지 사흘 만에 나온 동전이었다. 자비하신 하느님께서 그깟 돈 천 원을 갖고 노하실 분은 아니겠지만, 이 사건을 통해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려는 것이 있었던 것 같다. 부모인 나부터도 주일 미사 시간이 되면 아이들에게 별다른 생각 없이 봉헌금을 나누어 주곤 했다. 부모들이 쥐여 주는 봉헌금이 무슨 큰 뜻이 있으랴 싶었다. 나는 그것을 내 아이들이 나중에 커서도 봉헌할 수 있도록 미리 연습시키는 것이라고 잘못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하느님은 그렇지 않으셨나 보다. 비록 부모에게 받은 돈이지만, 아이들의 고사리 같은 손을 통해서 받으시는 그 봉헌을 하느님은 즐거워하셨던 것 같다. 마치 손자에게 과자를 얻어먹고 기뻐하는 할아버지처럼……. 그리고 하진이가 그 동전을 삼켰을 때, 한 달 동안 배 속에 놔두셨던 것도 우리에게 그 봉헌의 의미를 가르쳐 주고자 하셨던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이 사건을 통해 우리 부부는 하느님께 봉헌할 때에는 깨끗한 마음으로 봉헌해야 함을 하진이에게 가르쳐 줄 수 있었다. 그 이후로 하진이는 언제나 그런 마음으로 봉헌하고 있다. -‘하진이의 봉헌금은 어디에?’에서
이번엔 또 뭣 때문에 싸우는 걸까? 저러다 말겠지 하며 계속 기도를 바쳤다. …… 예전 같으면 싸우는 두 녀석을 불러다 놓고 또 혼을 냈을 텐데, 묵주기도를 바치고 있는 내 마음속에서는 두 아이들에 대한 사랑이 흐르고 있었다. 방문을 열고 나가 조용히 큰아이를 불렀다.
“하진아, 방으로 들어와.”
녀석은 깜짝 놀라는 듯했다. 이번에도 아빠한테 매를 맞는 것은 아닐까 하고 두려운 듯 쭈뼛쭈뼛하며 방으로 들어왔다. 아빠를 경계의 눈초리로 보고 있는 그 아이를 가만히 껴안았다. 갑자기 왜 그런 생각이 들었을까? 지금도 그 이유를 잘 모르겠다. 그냥 그 아이를 안아 주고 싶었을 뿐이었다. 안고 보니 내 안에서 사랑이 강물처럼 흘러나가는 듯했다. 내 안에 사랑이 정말 이렇게 흐르고 있는 것일까? 나는 아이를 꼭 껴안고 아무 말 없이 그대로 있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하진이를 밖으로 내보냈다. 밖으로 나간 하진이가 엄마한테 나지막이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엄마, 먹을 것 좀 없어요?”
아까의 그 화난 감정은 봄눈 녹듯 다 사라져 버린 것 같았다. 나는 무엇에 홀린 듯 동생 하윤이를 불러들였다. 쳀번에도 아무 말 없이 그 아이를 꼭 껴안았다. 아까와 똑같이 내게서 사랑이 흘러나가는 듯했다. 그리고 그렇게 한참 시간이 흐르고 나서 아이를 밖으로 보내 주었다. 그러고는 밖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형, 우리 밖에 나가서 놀까?” “그래!”
둘은 어느새 다시 친구가 되어 언제 그랬느냐는 듯 놀러 나갔다. -‘예수님을 때린 아빠’에서
우리 가족의 하루는 아침에 한 사람씩 눈 비비며 일어나 각자 말씀을 펴 드는 것으로 시작한다. 말씀을 읽고 그 가운데 마음에 와 닿은 말씀을 공책에 적어 두고 주말에 온 가족이 모여서 그 말씀을 돌아가며 나눈다.
“자, 지난 한 주간 읽은 성경 말씀 중에 제일 마음에 와 닿은 말씀을 이야기해 볼까?”
…… 엉터리 성경 묵상을 들을 때면 웃음이 나기도 하고, ‘그게 그런 뜻이 아니야.’라고 말해 주고 싶을 때도 있지만 중간에 내가 끼어들 것이 아니라 그대로 말씀께서 일하시도록 맡겨 두기로 하였다.
저녁기도는 사실 기도가 되는지 안 되는지 알기 어려울 정도로 힘들다. 일단 바쁘게 자기 일에만 골몰하는 일곱 아이를 한데 불러 모으기가 어렵다. 하던 일을 손에서 놓고 모이라고 아무리 소리를 질러 봐도 귀를 꼭 막은 듯이 하던 일을 계속하는 아이, 왔다가 다시 돌아가는 아이, 오기는 해도 오자마자 피곤하다고 드러눕는 아이……. 이런 아이들을 억지로 앉히고 묵주기도를 시작한다. 이웃의 교우가 선물로 준 30단 묵주는 아이들이 서로 잡아당기며 기도하다 여러 조각이 났는데 그것을 들고 묵주 알을 굴리기 시작한다. 굴리다 보면 꾸벅꾸벅 졸기도 하고 피곤해하기도 하지만 묵주기도가 끝나고, 엄마 아빠가 축복 기도를 해 줄 때면 모두 눈을 반짝이며 자기들도 손을 함께 뻗치고 기도한다. 이 축복 기도를 시작하면 옆방에서 장난치던 두 살 막내까지도 달려와서 안수해 달라고 넙죽 엎드린다. 그러면 모두 손을 뻗어 막내부터 시작해서 “전민경 아녜스를 축복하여 주소서!” “전하경 요한 비안네를 축복하여 주소서!” 하고 기도하는데 이때만큼은 모두가 활기에 넘쳐서 기도 소리가 아파트 복도까지 다 들릴 정도다. 그것이 저녁기도의 끝 순서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가족 모두가 한 사람 한 사람 자신의 이름을 불러 주며 축복 기도를 해 주는 것이 무척 좋기 때문인 것 같다. -‘말씀을 먹고 자라는 아이들’에서
다음 날 새벽 4시, 하상이는 혼자 일어나 부스럭거리기 시작했다. 옷을 주섬주섬 주워 입더니 목욕까지 하고 나왔다. 그러고는 혼자 우두커니 앉아서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자고 있던 나는 그 소리에 잠을 깨서는 깜짝 놀라 물었다.
“아니, 하상아, 안 자고 뭐하니? 이 시간에?”
“아빠, 예수님을 모실 생각을 하니 떨려서 잠이 안 와요.”
“……!”
갑자기 말문이 막힌 나는 “원, 녀석도 싱겁기는. 오늘 피곤할 거니까 잠을 푹 자 둬야지.” 하고는 돌아누웠다. 돌아눕다 말고 갑자기 가슴이 찡해지면서 눈에 눈물이 찔끔 고였다. 성체가 예수님의 몸이라고 알고, 아이들을 그렇게 가르쳐 왔지만, 그런 내가 언제 저렇게 떨리는 맘으로 성체를 모셔 본 적이 있었던가? 아이들을 사랑하셨던 예수님은 아이들에게서 정말로 진정한 사랑을 받고 계시는구나 싶었다. -‘하상이의 첫영성체’에서
---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