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 선생은 틈만 나면 자신이 글을 쓰는 이유가 오로지 ‘진실’을 밝히기 위한 것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리영희가 말하는 ‘진실’이란 무엇인가? 당연히 진실은 사실들(facts)의 덩어리가 아니다. 예를 들어 우리는 단군 신화나 고구려 또는 신라의 건국 신화, 에밀레종 설화의 구체적 내용이 사실이라고 믿지는 않는다. 하지만 각 시대의 신화나 설화가 ‘진실’을 담고 있다고 믿는다. 하나의 사실(fact)은 누군가가 인식한 현실의 작은 조각에 불과할 수 있다. (중략) 가령 많은 사람이 ‘광주 학살’은 미국의 묵인 속에 전두환 일당에 의해 자행된 것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우리가 미국이 발포 명령을 했다는 사실을 알거나 전두환이 광주 현장에서 총을 쏘아 사람을 죽였다는 사실을 확인했기 때문에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아니다. (중략) 리영희 선생은 ‘진실’을 알기 위해 공부에 헌신했고, 알게 된 진실을 알리는 데 자신의 존재를 다 던졌다. 취재와 공부를 통해 알게 된 지식·정보의 집적이자 그 관계의 통찰에서 나오는 ‘총체적 앎’이 리영희 선생이 생각하는 진실이었다. --- pp.24~25
리 선생님이 말년에 자연인으로서 보여주고자 했던 것은, 특정 권력자나 언론인이라고 ‘자처’하는 자들이 아니라 양심과 상식을 공유하는 시민이 직접 나설 때 역사가, 그리고 세상이 바뀔 수 있다는 ‘평범한’ 진실이었을 것이다. 이렇듯 리영희의 삶은 해방과 전쟁, 독재 정권과 4·19 혁명, 군사 쿠데타와 공포정치, 신군부와 광주 학살, 6월 항쟁과 직선제 개헌, 문민정부와 참여정부로 이어지는 격동의 현대사와 맞닿아 있다. 본인의 의지와 무관하게 대한민국 현대사의 ‘중심’에서 역사의 수레바퀴 아래 자신을 던질 수밖에 없었다. 권력의 탄압과 인신구속 같은 반복된 수난은 오히려 리 선생의 언론인, 지식인으로서의 실천 활동을 강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직업이 바뀌고 직장이 달라졌지만 정론 직필의 기자, 우상 타파와 이데올로기 비판의 ‘전사’로서의 삶은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 pp.78~79
리 선생은 1970년대 중반까지 주로 베트남전쟁이나 중국 혁명, 국제 관계에 대해 글을 썼고 국내 문제와 관련해서는 주로 언론이나 문화 관련 에세이를 썼다. 1970년대 말 『우상과 이성』 등과 관련해 재판을 받는 과정에서 「상고이유서」를 쓴 후 국내 반공주의의 문제에 관한 글을 발표하기 시작했다. (중략) 리 선생은 1989년 4월 ≪한겨레신문≫ 방북 취재 기획 과정에서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되어 9월에 풀려난다. 취재를 하러 북한에 간 것도 아니고 취재 계획을 세운 것을 문제 삼아 리 선생을 구속한 것이다. 리 선생은 특유의 탄탄한 논리를 앞세워 ‘국가보안법 전문(前文)의 대전제’를 진실 검증대에 세운다. 리 선생이 세운 진실 검증 기준은 다음과 같다. 휴전선 이북 지역의 정치적 성격, 승계 국가 여부, 유엔 결의 ‘유일 합법 정부’ 해석 문제, 유엔 결의의 ‘권고 사항’, 북한의 ‘국가’ 자격 문제, 북한 지역에 대한 대한민국의 통치권 유무 문제, 6·25 전쟁 휴전협정의 조인 당사자 지위 문제, ‘7·4 남북공동성명’의 상호 국가승인, 김일성 (국가) 주석 호칭의 공식화, ‘한미상호방위조약’의 남한 행정권 지역 제한 규정 등이다. --- pp.126~130
리 선생은 정권 변화와 상관없이 우리 사회의 부조리와 부당한 권력 작용에 대해 비판의 고삐를 늦추지 않았다. 리 선생은 다른 많은 진보적 지식인들과 달리 국민의 정부, 참여정부 시기에도 일체의 공직을 맡지 않았다. 참여정부 시절 정치권 일각에서 리 선생을 KBS 이사장으로 모시려는 움직임도 있었으나,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아예 정치권의 근처에도 가지 않았다. 진정한 자유인이자 독립적인 지식인의 모습이었다. 그렇게 권력의 장에 철저하게 거리를 두었기 때문에 평생 소신을 굽히지 않으면서 자신의 목소리를 낼 수 있었다. --- p.141
리 선생은 식민지 시대에 태어나 학생 시절 해방을 맞았고 이후 전쟁, 분단, 독재 정권의 시대를 살았다. 한국 현대사를 보면 한국인의 일상적 삶을 근원적으로 속박하고 있는 것이 식민성과 제국주의 지배 논리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리 선생은 일본과 미국 두 제국주의 사이에서 한국이 어떻게 자주적으로 민족 정통성을 세울 수 있을지를 평생의 화두로 삼았다. 탈식민 문제는 글로벌 시대에 지구촌의 새로운 화두이기도 하다. 디지털, 인터넷, 모바일로 이어지는 21세기 신자유주의 네트워크는 우리의 일상생활까지 자본주의 시스템 속에 철저하게 편입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일상적 삶의 ‘자발적 식민화’라고 할 수 있다. --- p.190
많은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리 선생을 ‘휴머니스트’라고 하는 이유는 거의 모든 글의 저류에 ‘인간’이라는 주제가 흐르기 때문일 것이다. 인류 역사상 전쟁과 핵무기는 인간을 말살하는 집단 범죄행위의 정점이다. 동족상잔의 현장에서 7년간 근무하면서 겪은 전쟁의 참상과 반인간성은 평생 리 선생을 반전주의자로 살게 한 원체험이었다. (중략) 리 선생의 생각은 이렇다. 무지란 핵 기술을 모르는 것이 아니라 ‘자기 땅에 남의 핵무기가 들어와 있으면 안전하다고 착각하는’ 무식함이다. 무감각하게 된 것은 수십 년간 언론의 ‘냉전·반공 세뇌’의 결과다. 소위 언론이라 ‘참칭하는’ 매체들이 미국 정부와 군사정권의 말만 주입해왔기 때문이다. 그 ‘세뇌’의 결과 한국인은 핵 문제에 무관심하게 되었다. 한반도가 강대국 핵전략의 희생양이 될 수 있는데도 아무런 자각이 없는 것이 현실이라는 것이다. 세 가지 과한 것은 미국의 이성과 호의에 대한 과신, 원자로 같은 초정밀 기계는 안전할 것이라는 과신, 그리고 핵무기를 포함한 군사력의 우위가 우리를 지켜줄 것이라는 과신이다. --- pp.225~235
리영희는 뛰어난 문장가다. 리영희의 책이 널리 읽혔던 이유 중 하나는 글이 쉽고 탄탄한 구성을 통해 흡입하는 힘이 있기 때문이다. 루쉰과 마오쩌둥의 문장론에서 민중을 위해 쉽게 써야 한다는 것을 배웠다고 한다. 리 선생은 특히 루쉰의 ‘잡문’을 좋아했다. 리 선생은 격식이나 형식에 구애받지 않고 자유롭게 주장을 펼치는 방식으로 글을 썼다. 소설과 수필, 논문과 신문 기사를 크게 구애받지 않고 넘나들며 글을 썼다. (중략) 리영희 작가의 작품 중 그 문학성과 문체에 주목해볼 만한 글로 「전장과 인간」, 「D 검사와 이 교수의 하루」, 「키스 앤드 굿바이」를 꼽을 수 있다. 「전장과 인간」이 한 편의 실감나는 전쟁 다큐멘터리라면 뒤에 두 편은 탄탄하게 구성된 소설이다. 「전장과 인간」은 청년 리영희가 전쟁을 체험하면서 엄혹한 세상에 대해 눈을 떠가는 과정을 보여준다. 리영희식 ‘성장소설’이라고 할 만하다. 이 글을 쓰게 된 동기는 서로 바쁜 시간에 쫓겨 차분한 대화의 시간을 갖기 어려운 자식들에게 아버지라는 ‘한 인간’의 살아온 모습을 숨김없이 이야기해주고 싶은 마음에서였다. --- pp.257~260
리 선생의 삶은 늘 긴장과 ‘투쟁’의 연속이었다. 본인의 선택이라기보다 시대가 그러했고 그러한 ‘운명’을 회피하려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중략) 권력의 핍박에도 불구하고 베트남전쟁에서 통일 문제까지 리 선생이 계속 글을 써온 것은 한국 사회에서 사상과 표현의 공간을 확장하기 위한 시도이기도 했다. 베트남, 중국, 미국 등 어느 나라의 이야기를 하던 그 자체가 한국 현실의 이해관계의 환기이고 현실 권력의 모순을 드러내는 일이기 때문이다. 리영희는 자신의 글쓰기 행위가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충분히 예측할 수 있는 상황에서도 회피하는 법이 없었고, 야만과 허위가 지배하는 사회 조건 속에 자신을 내던진 것을 보람으로 느끼며 살았다. --- pp.313~ 326
순응자나 질문자와 달리 자신이 살 수밖에 없는 시대적 상황을 ‘나의 문제(problem)’로 인식하고 이와 대결하는 사람들은 상황에 대한 지적 해명에 만족하지 않고 문제 해결을 추구했다. 시대의 문제는 곧 자신의 문제였기 때문에 방관자가 될 수 없었고 그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자신의 삶도 부정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중략) 리 선생이 평생 싸웠던 헛것, 허위의식, 어둑서니들로는 냉전·반공이데올로기, 반공법과 국가보안법, 한미 혈맹론, 국수주의, 기독교 유일신교리, 물신주의, ‘자유민주주의’, 제복과 유행, 지식인의 기회주의, 남한 유일 합법 정부론, 핵무기 신앙, 북한 전쟁 능력 우위론, 충효 사상, 지역차별 등 헤아릴 수 없이 많다. 리영희는 온갖 거짓으로 꾸며진 권력과 지식, 그리고 상식, 철학, 학문, 신앙, 교육, 언론매체들이 이런 어둑서니들로서 진실에 다가가려는 이성을 억압하고 있다고 보았다. 정리하자면 리 선생이 이데올로기를 비판하는 이유는 이데올로기로 인해 ‘조건반사적인 토끼’가 되어버린 인간의 자유를 회복하기 위함이다. 이데올로기는 허위의식이고, 허위란 진리를 부정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데올로기를 비판하는 것은 ‘부정된 진리’를 회복하는 일이며, 결국 휴머니즘을 회복하는 일이다. --- pp.355~359
리영희의 자기비판과 성찰은 늘 준엄했다. 리영희 휴머니즘의 핵심은 자유인이다. 리영희에게 자유인이란 우선 무지와 몽매, 미신의 굴레에서 자유로워진 인간이며, 나아가 온갖 사회적 억압으로부터 자유로워진 인간을 말한다. 자유인은 변화하는 세상을 끊임없이 성찰하고 학습해야 한다. (중략) 리영희는 평생 동안 ‘공부’하고 반성하는 것을 생활의 일부로 삼았다. 자기가 해온 이야기가 동굴 속의 ‘독백’에 불과한 것은 아니었는지, 자신이 신뢰했던 이성이라는 것이 허상은 아니었는지, 지성으로써 인간이 이기주의에서 벗어나는 것이 불가능한 일은 아닌지, 자신이 또 다른 ‘우상’이 되어버린 것은 아닌지, 가족보다 사회를 늘 중시한 자신의 태도가 과연 정당한 것이었는지 등, 그의 성찰과 반성, 자기비판은 죽을 때까지 계속된다. 그렇기 때문에 리영희는 늘 ‘현재의 리영희’로 존재하는 것이다. --- pp.365~366
준엄한 자기반성과 가혹한 성찰은 리 선생이 생각하는 자유인의 기본 조건이다. 자유인이란 우선 무지와 몽매와 미신의 굴레에서 자유롭게 된 인간이고 나아가 온갖 사회적 억압으로부터 자유로워진 인간을 말한다. 자유인이 되기 위해서는 변화하는 세상을 끊임없이 돌아보고 학습해야 한다. 리 선생은 일상생활에서도 사물의 어떤 하나도 그냥 방관하거나 지나치는 법이 없었다. 술집에 걸린 족자 따위도 반드시 읽어본 다음 술을 마시기 시작하는 사람이었다. 리 선생이 까다롭고 독해보였던 것은 자신과 만나는 사람들에게도 최소한의 성실성과 엄격성, 자기반성을 요구했기 때문이다. 누구도 예외가 될 수 없었다. 부단한 성찰로 자신의 주어진 조건을 회의하고 극복해야만 모든 인연, 조직, 집단, 이념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다. 그 과정을 거쳐 자유인이 되었을 때 비로소 어떤 문제에 대해서도 구애됨 없이, 각 주장과 이해가 교차하는 경계에서 인간의 본성과 권력의 본질, 진리에 대해 생각하고 실천할 수 있다는 것이 리 선생의 신념이었다.
--- p.39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