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곡리유적지는 동아시아에서 최초로 ‘주먹도끼’가 발견된 곳이다. 주먹도끼는 전기 구석기시대의 대표적 유물이다. 주먹도끼는 원석을 가공해 끝은 뾰족하고 몸체는 둥근 형태로, 나무를 가공하거나 동물을 도축하는 것 등에 다양하게 사용되었다. 전곡리유적지는 발굴 조사 후 4차 발굴지를 제외하고 모두 잔디로 덮었다. 그리고 넓은 유적지 대부분은 공원으로 조성했다. 관람객 누구나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기 때문에 도시락을 준비해서 가족 소풍을 즐길 수도 있다. ---「경기도 연천·포천, 연천전곡리유적」중에서
암각화는 대곡천 건너 바위 절벽에 새겨져 있다. 암각화를 집중적으로 새긴 중심 암면의 크기는 너비 약 8미터, 높이 약 5미터에 이를 정도로 거대하다(전체적인 암각화의 규모는 높이 4미터, 너비 10미터의 ‘ㄱ’자 모양이다). 조사를 통해 지금까지 밝혀진 암각화는 약 300여 점이다. 바다와 육지 동물은 물론이고 사냥과 어로 장면까지 등장한다. 강 건너 암각화를 육안으로 확인하는 것은 불가능하고 망원경을 통해서만 볼 수 있다. 하지만 망원경으로도 쉽게 암각화를 관찰하기는 어렵다. 풍화작용과 하류 댐 건설로 인해 침수가 반복되면서 암각화가 많이 훼손된 탓이다. 망원경 위에 부착된 암각화 사진을 참조하면 찾는 데 도움이 된다. ---「경상남도 울산·양산, 울주 대곡리 반구대암각화」중에서
미륵사지에서는 현재보다 과거의 모습을 떠올려야 한다. 그래야 융성했던 백제시대의 놀라운 미륵사 절터의 규모를 가늠할 수 있다. 대부분의 사찰이 탑 하나와 부처를 모신 금당 한 채로 이뤄진 것과 달리 미륵사는 3탑 3금당의 엄청난 규모였다고 한다. 미륵사지 주변을 한 바퀴 돌면 당대의 규모를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다. 미륵사지는 이른 아침에 찾는 것이 좋다. 해가 떠오를 때 햇빛이 조금씩 동탑을 비추는 모습이 무척 아름답다. 잔잔한 연못 위로 돌탑이 비치는 모습도 빼어나다. 동틀 무렵이 지나면 바람이 불어 수면을 어지럽히기 때문에 좀처럼 그 모습을 보기가 어렵다. ---「충청남도 공주·부여와 전라북도 익산, 미륵사지」중에서
부석사는 전통 사찰 제작의 진수로서 건축물의 가치가 매우 높다. 목조 건축물의 세부적인 양식과 다양한 기교가 잘 조화된 부석사는 자체로 예술품을 마주하는 느낌이다. 이렇듯 아름다운 부석사는 2018년 6월에 “산사, 한국의 산지 승원”이라는 명칭으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부석사에는 무려 5개의 국보와 6개의 보물들이 자연과 어우러져 그 운치를 더해준다. 끝없는 지혜와 무한한 생명을 지닌 아미타여래를 ‘무량수’라고 부르는데, 이 무량수를 모신 곳이 바로 무량수전이다. 이것은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가장 오래된 목조 건물이다. ---「경상북도 영주, 부석사」중에서
서산동 일대 씨줄 날줄로 얽힌 골목 마디마디에는 수많은 기억이 간직되어 있는 듯하다. 이 마을 아래에 연희네슈퍼와 방공호가 있다. 목포의 명소로 급부상하고 있는 곳이다. 연희네슈퍼와 방공호는 영화 〈1987〉의 촬영지로 알려지면서 찾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지금도 연탄 및 각종 소품과 전자제품 등이 촬영 당시의 모습을 유지한 채 남아 있다. 연희네슈퍼는 이한열 역의 강동원과 연희 역의 김태리가 시국의 아픔을 이야기하는 장면이 촬영된 곳이다. ---「전라남도 목포·진도, 연희네슈퍼와 방공호」중에서
고고학자들은 오랫동안 동아시아에 구석기 문화가 없다고 확신했어요. 그 확신을 깬 것이 바로 연천에서 발굴된 ‘아슐리안형 주먹도끼’랍니다. 한반도의 역사를 새롭게 만든 이 위대한 돌멩이를 연천에서 만나보세요. 그리고 이 지역에서 작은 돌멩이들을 비롯해 자신의 비밀을 털어놓으려는 역사의 여러 흔적을 찾아보세요. 연천 구석구석에 있는 그 흔적은 고구려, 신라, 백제 그리고 고려와 조선, 일제강점기, 그리고 한국전쟁을 거쳐 분단에 이른 현재까지의 역사 이야기를 두루 들려줍니다. 자, 이제 그 이야기를 들으러 연천으로 떠나볼까요? ---「연천전곡리유적을 중심으로 선사시대 탐방하기」중에서
왜 그렇게 고래를 많이 그렸을까요? - 고래에 관해 누군가에게 알려주고 싶었던 것 같아요. 반구대암각화에는 북방긴수염고래, 혹등고래, 참고래, 귀신고래, 향유고래 같은 대형 고래가 작게는 20센티미터 크기로, 크게는 80센티미터가 넘는 크기로 곳곳에 새겨져 있어요. 마치 높은 곳에서 해안으로 몰려드는 고래 떼를 보고 그린 것처럼 위에서 내려다본 그림과, 바로 옆에서 헤엄치며 관찰한 것을 그린 듯한 측면 그림이 있어요. 특히 새끼를 업고 있는 어미 고래나 물 위로 도약하는 모습은 고래를 오래 관찰해야만 그릴 수 있는 그림이지요. ---「울주 대곡리 반구대암각화를 중심으로 선사시대 탐방하기」중에서
『팔만대장경』은 어떻게 보관되었나요? - 『팔만대장경』은 완성된 이후 처음에는 강화성 서문 밖의 대장경판당에 있었다고 합니다. 이를 강화 선원사로 옮겼다가, 1398년 봄에 합천 해인사로 옮겨 오늘에 이르렀지요. 현재는 해인사 법보전(法寶殿)과 수다라장(修多羅藏)에 보관되어 있어요. 법보전과 수다라장을 합쳐서 장경판전(藏經板殿)이라고 부릅니다. 팔만대장경판을 보관하고 있는 해인사 장경판전은 1995년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그리고 『팔만대장경』은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지정되었습니다. ---「팔만대장경을 중심으로 고려시대 탐방하기」중에서
조선의 기반을 만드는 데 큰 역할을 한 제도는 무엇인가요? - 이성계가 왕의 자리에 오르는 데는 정도전의 역할이 컸습니다. 그중에서도 정도전이 시행한 과전법(科田法)이 큰 몫을 했지요. 정도전은 권문세족이 다시 힘을 쓰지 못하게 하려면 그들에게서 땅을 빼앗아야 한다고 생각하고 과전법을 시행했습니다. 권문세족에게서 빼앗은 땅은 원래 주인에게 되찾아주고, 나머지 땅은 국가에 귀속했지요. 또한 나랏일을 하는 관리에게는 일정한 땅에서 세금을 거둬들일 수 있는 권리를 주었습니다. 이에 관리는 부유해졌고, 권문세족은 힘이 약해졌습니다. 나라는 세금을 제대로 거둘 수 있게 되었고, 농민은 이전보다 세금이 줄어 형편이 나아졌지요. 그 덕분에 새로운 나라를 세울 기반을 마련할 수 있었습니다.
---「청계천을 따라 조선시대 탐방하기」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