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장 동한시기의 경학사상
1. 시작하는 말
유학은 진시황제의 탄압으로 침체를 면치 못하다가 한나라가 건국된 이후부터 매우 빠른 발전을 하게 된다. 이러한 원인 가운데의 하나가 바로 한나라 건국 이후 진나라 멸망의 근본원인을 진시황제가 법가의 사상을 숭상하고 유가의 사상을 탄압한 것에 있다고 보는 역사적 교훈의 자각 때문이었다. 또 다른 원인으로는 유학의 내적인 요인에 기인하는 것으로, 그것은 곧 “군신 부자지간에 지켜야할 예를 바르게 제정하고, 부부 장유 사이의 구별을 정한 것은 비록 백가라고 할지라도 바꿀 수 없는 것이다.”라고 하는 기능이었다.
선진시기의 유학은 윤리도덕이 중심이 되는 관념론적 성격이 매우 짙어서 시종일관 통치의 이데올로기로서 자리 매김을 하지 못했다. 그러나 한나라 초기의 유학자들에 의해 특히 동중서에 의해서 유학은 최종적으로 백가쟁명 속에서 독존의 학문으로 자리 매김을 하게 된다. 이로부터 민간의 학설에서 정권의 이데올로기로 그 지위가 상승하게 된다.
한나라 초기의 통치자들은 황노사상黃老思想을 통치사상으로 사용하기는 했지만, 이러한 이유 때문에 유학을 억압하지는 않았다. 한나라 초기의 유학은 견고한 사회적 기반 아래서 도가와 상호 융합과 영향을 주고받는 과정 가운데 자기발전을 이루어 갔다. 당시의 경학은 실제로 이러한 사실을 잘 설명해주고 있다.
2. 동한 이전의 경학
진秦나라 시기에 자행된 분서갱유 정책에 의하여 유가사상은 진나라에서 어떠한 형태의 발전도 이룩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맹자학 역시 어떠한 발전도 없었다고 할 수 있다. 한漢나라 시기로 진입한 이후 유가사상은 줄곧 중요한 각색을 연출한다. 서한西漢초기에는 육가陸賈ㆍ숙손통叔孫通ㆍ가의賈誼 등이 중심이 되어 막 통일의 대업을 완수한 한나라의 정치와 제도를 정비하는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렇기 때문에 비록 한대 초기의 정치권에서는 황노학黃老學을 이용하여 전란에 지친 민생의 안정을 도모 하였지만 유학 역시 일정한 역할을 하고 있었다. 문제文帝와 경제景帝의 치세 이후 정치와 사회적 필요에 의하여 유학은 발전의 발판을 확보한다.
서한중기에 이르러 군주는 새로운 통치문제에 직면하게 되며 게다가 외환까지 겹쳐지는 형국이 발생하자 군주는 왕권과 국가를 공고하게 지키고자 한다. 이러한 시대적 분위기 속에서 학술적으로도 ‘무위無爲’ 사상이 아닌 ‘유위有爲’ 사상의 필요성이 적극적으로 대두된다. 그렇기 때문에 서한중기에 무제武帝가 집권한 후 독존유술獨尊儒術의 정책이 시행되기에 이른다. 통치권의 강력한 지지 속에서 서한시기의 유학은 경학이 중심이 되고 유가의 여타 분야는 그 다음 순으로 밀려나게 된다.
제자 십가十家 가운데 볼만한 것은 구가九家일 뿐이다. 모두 왕도王道가 쇠미해지고 제후들이 힘의 정치를 하고, 당시의 군주가 좋아하거나 싫어하는 방향을 달리함에서 구가九家의 학술이 벌떼처럼 나와서 함께 일어났다. 각각 한 단면을 끌어와 그들이 잘하는 것을 숭상했다. 이것을 가지고 유세하여 제후에게 영합하였다. 말하는 것이 비록 다르지만 비유하면 물과 불이 서로 없애기도 하고 생기게도 하는 것과 같다. 인仁과 의義, 경敬과 화和가 서로 상반되지만 모두 서로를 이루게 해준다. 『역경易經』에 이르기를 “천하가 같은 곳으로 돌아가지만 (가는) 길은 다르고 (궁극의) 하나에 이르지만 생각은 백가지로 다르다.”라고 했다. 지금 서로 학파를 달리하는 사람들이 각각 뛰어난 것을 확장하여 지혜와 생각을 다하여 그 요지를 밝혔다. 비록 모르고 취약한 부분이 있지만 그 귀결점을 합하여 보면 또한 육경六經의 갈래와 끝은 된다.
반고는 제자諸子의 학술이 “육경의 갈래와 끝은 된다.”라고 여기고, 또한 제자의 학술이 말하는 것이 비록 다르기는 하지만 그것들의 요지는 결국은 육경六經으로 귀결된다고 생각했다. 반고의 이러한 생각은 경학이 근본이 되고 제자학諸子學은 경학의 보조에 불과하다는 것을 단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맹자孟子』는 진나라 시기의 분서갱유의 화마를 피해 완전하게 보존되어 전해지고 있기는 하였지만 서한시기 유학자들의 관심의 초점이 되지는 못하고 있는 실정이었다. 문제文帝 시기에 일찍이 『맹자』에 박사를 두었는데, 이러한 사실은 조기趙岐의 「맹자제사孟子題辭」에 “효문 황제는 학문을 광범위하게 넓히고자 『논어論語』, 『효경孝經』, 『맹자孟子』, 『이아爾雅』 등에 박사를 두었다.”라고 한 언급 속에 잘 나타나 있다. 유흠劉歆은 「이서양태상박사移書讓太常博士」에서 “효문 황제가 정권을 장악하기 시작하자 조조晁錯를 보내 복생伏生에게 『상서尙書』를 배워오게 했다.……박사를 두었다.”라고 언급하고 있는데, 이러한 조기와 유흠의 언급은 한나라 문제시기에 이미 유가의 제자학설이 중요하게 취급받고 있었음을 설명하는 것이다.
무제시기에 이르러서 진나라의 분서焚書 이후 많은 서적과 전적들이 산실된 것을 통감하는 한편 조정에서는 관방에 소장하고 있었던 장서들 가운데 대다수가 궐본인 것을 파악하고 장서정책을 선포하여 민간에 소장되어 있던 산실된 서적들을 수집한다.
진秦에 이르자 이를 염려하여 서적을 태워 없애고, 그렇게 함으로써 백성들을 우매하게 하고자 했다. 한나라가 일어나서 진나라의 실패를 고치고자, 서적을 크게 모으고 책을 헌납할 수 있는 길을 널리 열었다. 무제시기에 이르기까지 여전히 백서帛書는 결손 되기도 하고 죽간竹簡은 떨어져나간 것도 있고, 예악이 무너진 상태가 되자 군주는 탄식하며 “나는 이를 매우 안타깝게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에 장서藏書의 정책을 세우고 사서寫書의 관직을 설치하여, 아래로 제자諸子의 전傳과 설說까지 모두 비부秘府에 채웠다. 성제成帝시기에 이르러서는 서적이 꽤 많이 분산되고 유실되어, 알자謁者 진농陳農으로 하여금 천하에서 전하지 않는 책을 구하게 했다. (그리고) 조서를 내려 광록대부光祿大夫 유향劉向에게 경전經傳 제자서諸子書 시부詩賦 등의 전적을 교감하게 하고, 보병교위步兵校尉 임굉任宏에게 병법서를 교감하게 하고, 시의侍醫 이주국李柱國에게 방기方技에 관한 서적을 교감하게 하였다. 매번 책 한 권의 교감이 끝나면 유향은 그 서적 각 편의 조목을 정리하고, 요점을 간추리고 기록하여 상주하였다.
무제는 이처럼 민간에 흩어져 있던 책들을 수집하는데 있어서 그 대상을 제자학諸子學의 서적에까지 확대하여 수집된 제자학의 서적을 비부秘府에 보관시켰다. 이러한 조치의 결과로 제자학의 학술사상은 민간에 전파될 수가 없었다. 동시에 경학을 표준으로 삼아서 모든 학술에 대하여 정리 작업을 진행하여 그것들의 요점을 논하고 오류를 바로잡았다. 이러한 조처들은 비록 서적들을 수집 정리하여 보관한 공적은 있으나, 제자학이 민간에 광범위하게 퍼지는 것을 막았기 때문에 제자학이 발전하는데 장애요인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맹자』는 한대에 제자계열에 분류되었기 때문에 그것의 발전에 이러한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서한시기가 끝날 때까지 『맹자』에 주석을 달은 학자는 없었다. 맹자학과 관련 있는 저작은 다만 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 「맹자순경열전孟子荀卿列傳」에 보이는 맹자의 생애와 사상에 관한 부분일 뿐이다. 비록 서한시기에 맹자학과 관련된 저작이 많지는 않지만, 그 시기의 유학자들은 『맹자』의 학설을 유학에 있어서 중요한 연구 자료로 취급했다.
3. 동한시기의 경학
동한東漢시기에 들어와서 시작된 금문今文경학과 고문古文경학의 대립은 갈수록 치열해져가고 맹자학에 대한 연구는 학자들로부터 비교적 중시를 받는다. 비록 『한서漢書』, 「예문지藝文志」에서는 『맹자』를 「제자략諸子略ㆍ유가류儒家類」에 수록하고 있지만, 『논어論語』ㆍ『효경孝經』ㆍ『이아爾雅』는 「육예략六藝略」가운데의 「논어류論語類」ㆍ「효경류孝經類」에 귀결시킨다. 그래서 『맹자』의 지위는 마치 『논어論語』ㆍ『효경孝經』ㆍ『이아爾雅』보다 아래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지만 동한시기 학자들의 맹자학에 대한 연구는 대폭적으로 진보한다.
동한시기의 『맹자』에 대한 주석은 여섯 종류가 있는데, 양웅揚雄의 『맹자주孟子注』ㆍ정증程曾의 『맹자장구孟子章句』ㆍ정현鄭玄의 『맹자주孟子注』ㆍ고유高誘의 『맹자장구孟子章句』ㆍ유희劉熙의 『맹자주孟子注』ㆍ조기趙岐의 『맹자장구孟子章句』가 그것이다. 이들 가운데 지금까지 전해져오는 것은 유희의 『맹자주』와 조기의 『맹자장구』뿐으로 그 외의 것들은 모두 유실되었다. 비록 동한시기의 『맹자』에 대한 주석본이 후세에 비하여 적은 수에 불과하지만 서한시기에 비할 때 주목할 만큼 많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주석본 이외에 고문경학이 흥기하자 훈고학이 유행하게 되는데, 이때 『맹자』에 기록되어 있는 언급들은 동한 학자들에 의해 광범위하게 논증의 자료로 인용된다. 조기가 「맹자제사」에서 “오늘날 여러 경전들의 의미는 『맹자』를 인용하여 사실을 밝힌다.”고 언급한 바에서 알 수 있듯이 동한시기의 학자들은 경전의 의미에 대하여 논의할 때 『맹자』의 내용을 인용하여 논증의 근거로 삼았었다.
『맹자』는 전기류의 서적이었기 때문에 한대의 학자들이 경전에 대하여 주석을 달 때, 그 내용을 많이 인용하여 논증의 근거로 삼았으며, 『맹자』에 기록된 사실들을 인용한 서술을 박학다식한 것으로 여겼다. 동한시기 『맹자』의 학술적 지위는 더욱 높아지게 되어 그 영향력은 매우 광범위하게 확대되는 추세를 보인다. 아울러 맹자사상의 가치 역시 학자들에 의해 새롭게 인식되어지는데, 양웅揚雄의 “양주나 묵적의 학설을 물리친다.”는 언급과 왕충王充의 「자맹刺孟」 편 등이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서한에서 동한시기에 이르는 동안 『맹자』의 지위는 점진적으로 향상되어가는 추세를 보인다. 서한시기의 유학은 정치를 위한 도구적 기능을 담당했기 때문에 경세치용經世致用분야에 치중했었던 반면 심성론心性論 분야에는 소홀했었다고 말 할 수 있다. 이러한 학술적 추세 속에서 맹자의 사상은 심성론을 중시하는 사상이었기 때문에 자연히 당시 학자들의 주목을 받지 못했었던 것이다. 경학은 한나라 조정의 장기간에 걸친 지원 속에서 이미 학술계에서는 요지부동의 지위를 점하고 있었으며, 유학의 독존적인 분위기 속에서 학자들의 연구 범위는 경서에서 시작하여 유가의 제자학諸子學에까지 확대된다. 그렇기 때문에 『맹자』는 동한시기 학자들의 연구대상에 포함되었던 것이다.
양한시기의 맹자학의 발전과 경학은 매우 밀접한 관계를 형성하고 있었다고 판단된다. 한대 유학자들은 경전에 대한 해석과 주석 작업을 할 때 맹자의 관점을 인용하곤 했는데, 조기가 「맹자제사孟子題辭」에서 “효문 황제는 학문을 광범위하게 넓히고자 『논어論語』, 『효경孝經』, 『맹자孟子』, 『이아爾雅』 등에 박사를 두었다.”라고 언급한 것은 양한시기의 맹자학이 경학에 의탁하여 발전했음을 단적으로 설명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양한시기 맹자학의 발전은 학술사상에서는 경학의 독존과 제자학의 지속적인 발전에 의한 것이었다고 할 수 있는데, 당시의 제자학의 연구는 경학을 종주로 삼고 모든 이론을 경학의 관점에 맞췄다. 이와 같은 이유로 제자학이 경학이 일세를 풍미했던 양한시기에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이다. 『맹자』의 이론은 유가에 뿌리를 두고 있어서 공자孔子의 학문을 계승하여 그 이론체계가 육경六經의 이론체계와 유사하기 때문에 한대 학자들이 경학연구에 있어서 『맹자』의 관점을 다양하게 인용하였던 것이며, 이로 인하여 『맹자』의 학술적 지위가 신장될 수 있었던 것이다.
동한 말기부터 시작된 정치적 혼란과 두 차례에 걸친 당고黨錮의 화禍는 동한의 학술발전에 심각한 타격을 가하여 경학의 발전에도 심각한 영향을 끼친다. 동한 말기의 정치적 혼란과 사회질서의 붕괴는 학술계에 많은 부정적인 영향을 끼쳤는데, 구체적인 예를 들자면 경학의 쇠퇴라는 초유의 현상이 발생한다. 이러한 상황은 위魏나라 문제文帝의 시기에 와서 태학太學의 회복으로 비로소 진정의 기미를 보이기 시작한다. 그러나 이 시기의 태학의 수준은 양한시기에 한참 못 미쳤다고 할 수 있는데, 그 이유는 태학생의 대부분이 병역 기피 수단으로 태학에 입학했기 때문이었으며 박사들의 수준 역시 양한시기에 비해 형편없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상황으로 인하여 위나라의 태학은 그 수준이 저급했으며 따라서 당시의 경학 연구도 수준에 못 미쳐 결국은 쇠퇴의 길을 걸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동한 말기에서 삼국을 거쳐 서진西晉에 이르는 시기의 경학의 집대성자가 나타나는데, 그가 바로 정현鄭玄이다. 피석서皮錫瑞가 “정강성은 폭넓은 학식과 기억력이 뛰어난 인재로 고상한 절개와 탁월한 행실로 유명했다. 저술한 책이 집에 가득했으며 문하생이 매우 많았다. 당시의 모든 사람들이 그를 우러러 보았으며, 이수와 낙수의 동쪽 회수와 한수의 북쪽에서 정강성은 제일 뛰어난 사람이었다고들 말한다.”라고 언급한 것처럼 정현은 당시 사회에 매우 커다란 영향을 주고 있었다. 정현의 영향 속에서 동한 말기에서 삼국시대에 이르는 동안 유학은 새로운 관점을 거의 내놓지 못하고 있었으며, 맹자학에 대한 연구 역시 전혀 새로운 성과를 못 내놓고 있다. 동시에 경학 분야에서 정현학파와 왕숙王肅학파 간의 분쟁이 발생한다. 이러한 두 학파 사이의 분쟁으로 인하여 학자들은 학술적 입장을 견지하기 위하여 정치적으로나 학술적으로 서로 헐뜯고 비방한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경학의 발전은 정지되었으며, 전문적인 학술의 발전 역시 기대할 수 없었다. 경학이 이와 같은 상황에 처했기 때문에 경학에 의탁해서 발전을 했던 맹자학 역시 어떠한 진보도 없었던 것이었다.
동한 말기에 발생한 사회적 혼란으로 인해서 기존의 예악禮樂질서는 붕괴되는 지경에 이르게 되는데, 그 결과 당시 사람들은 유가의 가르침에 대하여 회의적인 태도를 갖게 된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경학에 대한 연구는 급속도로 쇠퇴하였으며, 학자들의 학문연구 대상은 더 이상 경학에 국한되지 않았다. 다시 말하면 동한 말기부터 위진魏晉에 이르는 시기에서 유학은 더 이상 사회질서를 유지시켜주지 못하게 되어 사람들은 더 이상 유가사상에 대하여 믿음을 가질 수 없게 된다. 또한 당시의 학자들은 경학에 대한 연구만으로는 더 이상 혼란에 빠진 세상을 바로잡을 수 없다는 사실을 통감한다. 그래서 적극적으로 세상사에 참여하고자 했던 사람들은 법가法家나 종횡가縱橫家의 학술을 추종했으며, 소극적으로 개인의 안신입명安身立命을 추구했던 사람들은 노장老莊사상과 현학玄學의 가르침을 추종했다. 당시의 지식인들은 유가사상에 대한 흥미를 상실하였으며, 또한 그들이 고민하던 문제도 사회질서의 회복 같은 것보다는 생명의 온전한 보전에 관한 것들에 초점이 맞춰져있었다. 이러한 시기의 경학은 자연히 쇠퇴의 길을 걸을 수밖에 없었으며, 새롭게 흥기한 현학이 경학에 영향을 끼쳐서 경학의 현학화玄學化 현상이 발생하게 된다.
한대의 경학은 주로 천인관계天人關係의 문제에 대하여 중시하는 경향을 보였는데, 현학 역시 본체론本體論적 관점에서 천인관계의 문제에 대하여 논의를 집중하는 경향을 보인다. 그러므로 경학에서 현학으로 무게 중심이 이동해가는 추세 속에서도 연구 주제에는 변화가 없었다고 할 수 있으며, 변한 것은 단지 연구시각과 연구방법론일 뿐이었다. 즉 현학은 도가道家의 이론과 연구방법론을 사용하여 천인관계 문제를 규명했다.
경학의 현학화 이외에도 위진시기 경학의 발전은 점진적으로 불교화佛敎化 되어가는 경향도 보인다. 동진東晉시기에는 많은 학자들이 불교에 대하여 연구를 진행하는데, 그들은 불교의 이론을 경학을 통해 보충하고자 했다. 남조南朝시기에 들어서자 불교는 통치자의 강력한 지지 속에서 공전의 발전과 번영을 구가하게 되며, 학풍 역시 다양한 이론들을 접목하는데 경학이 그 중심에 있었다. 이와 같은 이유로 경학은 불교화 된다.
위진남북조 시기는 유학과 현학 및 불교가 정립되어 있는 형태를 보이고 있었는데, 경학의 연구는 남조의 삼례三禮에 대한 연구가 불교의 영향을 받은 것 외에도 경전에 대한 주석의 내용은 동한시기보다 더욱 정밀한 형태를 보이고 있었지만, 연구 내용과 범위는 동한시기의 그것을 벗어나지 못했다. 당시의 학술사상의 추세는 유학은 규모가 축소되고 있는 상황을 보이고 있는 반면, 현학과 불교의 사상은 매우 흥성하고 있는 경향을 보이고 있었다. 이러한 학술사상의 추세는 위진남북조 시기의 학자들로 하여금 더 이상 유학의 육경六經에만 전념할 수 없게 만들었다. 그렇기 때문에 유학은 그 발전의 여지가 없었다고 할 수 있으며, 이에 따라 맹자학의 발전 역시 제지당하는 형국을 맞이하게 된다.
위진남북조 시기의 『맹자』주석서는 진나라의 기무수毋邃의 『맹자주孟子注』가 있다. 기무수의 『맹자주』는 『수서隋書ㆍ경적지經籍志』와 『당서唐書ㆍ예문지藝文志』에 수록되어 있으며, 『수서』에는 총9권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기록되어져 있다. 기무수의 『맹자주』는 아쉽게도 이미 유실되어 현재에는 전해지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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